대지를 잘 돌보라. 우리는 대지를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아이들로부터 잠시 빌린 것이다. - 인디언 격언
우리의 아이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더 많은 아이들을 위해 이 숲을 보호해야만 한다. 자신을 위해 말하지 못하는 새와 동물, 물고기와 나무들을 위해 이 숲을 보호해야만 한다. - 콰치나스 (눅소크 족 세습 추장)
봄에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조심조심 걸으라. 어머니 대지가 아이를 배고 있으니까. - 카이오와 족 격언
나는 땅 끝까지 가 보았네.
물이 있는 곳 끝까지도 보았네.
나는 하늘 끝까지 가 보았네.
산 끝까지도 가 보았네.
하지만 나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네. - 나바호 족 노래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둠속 반딧불의 깜박거림.
한겨울 들소가 내쉬는 숨결.
풀밭 위에 불안하게 일렁이다가 일몰과 함께 사라져 가는 작은 그림자.
- Black feet (검은발) 족 추장인 Crowfoot (까마귀 발)이 임종을 앞두고 한 마지막 말
인디언들의 문화는 매우 철학적인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들의 가치관을 토대로 쓰여진 글들을 읽어 보면 그들이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세상이 돌아가는 근본 원리 혹은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실로 오랜 기간 삶을 이어왔다.
나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접 인디언을 만난 적이 없을 것이다. 혹시 그들에 대한 간접적인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디언의 말과 용모 그리고 행동을 서부 영화를 통해서 본 것이 거의 전부일 것이고, 이런 영화를 본 사람들은 적어도 40대~50대 이상은 되야 할 것이다. 흔히 서부 영화라고 칭해지는 카우보이 영화는 50년대에서 70년대에 걸쳐서 만들어진 영화가 많을 것이기 때문에 요즘 20대 혹은 30대의 경우는 거의 접해본 적도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그런 영화보다 재미있는 볼거리가 지금은 너무나도 많다.
나만 해도 초등학교 때 TV 에서 방영하던 서부 영화에서 인디언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접했었다. 당시 TV에서 서부 영화가 자주 방영된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영화 산업의 중심이 미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당시 TV에서 접했던 인디언의 모습은 무리지어 말을 타고 평원을 달리는 모습, '티피코시'라는 인디언 천막에서 자연 친화적으로 생활하는 모습들 그리고 사냥을 하거나 들판에서 자연과 어우러져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 등이었다. 그리고 이런 장면들 이상으로 자주 봤던 장면은 인디언들이 백인들에게 고문을 당하거나 학살당하는 모습이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따라서 서부 영화도 승자의 관점에서 만들어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영화 속에서 인디언들은 야만적이고 공격적으로 묘사되곤 했고 역사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었던 그 당시에는 그런 영화속에 나오는 인디언들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무서운 존재, 미개한 존재 그렇지만 불쌍한 존재로서 말이다.
나중에 그들의 슬픈 역사에 대하여 이해하게 된 후에는 그들이 결코 야만적이지도 공격적이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인디언과 관련된 여러 서적들을 접하게 되면서 그들이 도덕적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대단히 높은 경지에 올랐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위에 몇 가지 예를 들어 놓은 글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단편적인 내용들이지만 그들이 자연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자신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구 전체의 영속적 생명 유지를 위하여 온 평생을 살았다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거대한 자연의 섭리에 비하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미미한지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명망이 높은 인디언 추장들의 연설문을 모아 놓은 류시화의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를 보면 그들의 진정한 모습을 절절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위에 인용한 글도 이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900페이지가 넘는 만만치 않은 책이지만 일독을 권한다.
유한한 삶을 살아가면서 최대한 자연을 보호하고, 주변인들 모두가
나와 연결된 동등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고 산다면
아마 현재 온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갓 폭력과
파괴의 행위가 일순간에 사라질 것이다.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 중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다양한 종교에서 자비나 애정 혹은 헌신 등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런 말들 모두는 사랑의 한 단면이기 때문에 결국 모든 종교가 향하는 궁극적 목적지는 '사랑'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인디언의 사상 혹은 철학은 철저히 모든 생명에 대한 균등한 사랑에 기초하고 있다. 그들은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대단히 생태 철학적인 관점에서 자연과의 조화와 균형을 중요시했다. 특히 모든 존재가 하나의 세계 안에서 동등한 존재적 가치를 갖는다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런 방식의 철학적 사고는 특히 지금과 같이 환경 문제 측면에서 최악을 향해 달리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 의미가 심오하고 중요하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인디언들의 철학, 즉 '모든 존재가 하나의 세계 안에서 동등한 존재적 가치를 갖는다는 믿음'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문명이 파국으로 이어지는 문을 스스로 열게 되었다. 불청객인 '청교도'들도 '사랑'으로 동등하게 대우를 했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은 17세기 초인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했다. 배의 이름은 '오월의 꽃'으로 싱그러움과 아름다움을 느끼게하지만 그 속에는 '청교도'라고 불리는 영국 식민지 확장을 위한 일종의 선발대가 타고 있었다. 후에 인디언들은 그들을 '과도하게 물질주의적이고 욕망에서 단 한 순갇도 빠져나오기 못하는 얼굴 흰사람(백인)들' 이라고 칭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수세기 동안 거짓말과 기만 그리고 수탈과 학살을 통하여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은 씨가 마르게 되었다.
물론 아메리카대륙 전체로 보면 남아메리카에 콜롬부스가 1492년에 상륙을 했기 때문에 아메리카 인디언의 대량 멸종은 15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인디언의 총인구수가 당시에 몇명이었는지는 학자에 따라서 천차 만별이다. 적게는 5백만이라는 주장도 있고, 많게는 1억명이라는 말도 있다. 차이가 나도 너무 많이 나기 때문에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지만, 대충 짐작해도 최소한 1천만명은 되리라는 추정은 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 21세기초에는 약 25만명까지 감소했다고 하니 인디언은 그야말로 멸종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물론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처음 그곳에 자리를 잡았을 때 그들 또한 누군가의 정복자였을 것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꽤 오랜 시간 동안 평화로운 삶을 살다가 17세기에 또다른 정복자가 나타나서 20세기 즈음에는 거의 멸종의 단계까지 이르면서 새로운 주인에게 자리를 내 주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돌고 도는 자연의 순리라고 하면 더 할 말이 없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 땅의 새로운 주인으로 그 자리를 차지한 세계 최고의 강대국인 미국은 178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승인 받은 후 지금까지 약 250년간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실질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미국은 승전국으로서 세계 최강자의 자리를 차지했으니 최고의 시기를 유지해온지는 아직 채 100년도 되지 않았다. 언제까지 그들의 영광이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거기에 끝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인디언들의 철학 그리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강요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살다가는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수록 정서적으로 매말라가는 이 시대에 무엇보다도 더 필요한 것이 바로 인디언들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한다. 유한한 삶을 살아가면서 최대한 자연을 보호하고, 주변인들 모두가 나와 연결된 동등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고 산다면 아마 현재 온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갓 폭력과 파괴의 행위가 일순간에 사라질 것이다. 그야말로 꿈과 같은 일이다. 그런 꿈을 꾸기 보다는 그냥 온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살기를 바라지 말고 먼저 나부터 그런 삶의 태도를 갖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사실 그게 제일 현실적이고 빠른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