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들어와 샤워를 마친 후 아까보단 각성된 정신 상태로 곰곰이 아까 전 그녀와의 장면을 바닷가의 모래알세 듯 곱씹어봤다. 오랜만에 날 찾아온 이유도 못 들었는데 그녀는 왜 그렇게 잔뜩 화가 난 채 사라져 버렸을까. 내가 뱉은 말 중에 무엇이 문제였을까. 내가 기간제 교사라서? 아니다. 기간제 교사라는 걸 밝힌 이후에도 분위기는 썩 괜찮았다. 그럼 다음 장면들이 문제라는 건데. 그 장면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더라? 한 장면이 유레카처럼 발견됐다.
“응. 난 잘하는 것 없이 이냥저냥 시간만 때우며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사람이야.”
“그래. 지금처럼 대충 시간이나 때우며 살아.”
시간만 때우며 산다는 표현이 그녀를 자극한 말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런데 시간만 때우는 게 뭐 어때서? 분명 다른 맥락이 더 있을 것 같은데. 다시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응, 너 그때 썼던 글들 꽤 좋았어. 그래서 작가라도 될 줄 알았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난 그렇게 소질이 있는 사람이 아니야. 이 세상에 글 잘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정말 소질이 없다고 생각해?”
내가 글을 안 써서 그녀가 실망했다는 사실은 수긍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내가 글 안 쓴다는 사실이 왜 그녀에겐 실망이란 감정을 안겼을까? 차분하게 그 장면을 복기해 보니 그녀는 ‘정말 소질이 없다고 생각해?’라고 말하는 부분부터 분위기가 어딘가 어둡게 변해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글을 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는 건데. 그게 왜 그녀가 화날 구실이 되는 거지? 아무리 고민해 봐도 수능 시험의 미적분 킬러 문항처럼 답을 쉽사리 찾을 순 없었다. 글을 오랜 시간 안 써온 건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꾸준히 책은 내 곁에 두고 틈틈이 읽고 있었다. 임용교사를 준비할 때도, 기간제 교사로 힘들게 근무할 때도 글을 쓰겠다는 생각 자체가 사치이자 시간 낭비였다. 오직 외로울 때도 책을 봤고 괴로울 때도 책을 봤다. 독서는 글쓰기로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세상 사람들과 진지하게 교류를 해 본 적도 없다. 날 가장 잘 이해해 주고 나에게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친절하게 알려준 건 다름 아닌 책이었다. 마침 동네에 중고 서점이 있어서 틈만 나면 서점에 들러 원가 절반의 금액을 지불하고 보고 싶은 책을 장르불문 사들였다. 책을 하나씩 사들고 좁디좁은 원룸에 안 어울리는 검은색 재질의 철제 책장에 꽂을 때마다 왠지 내편이 한 명씩 생기는 느낌이었다. 몰론 전업 작가가 아니다 보니 독서량은 작가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그저 취미 독서였을 뿐이었으니까.
오랜만에 찾아온 그녀가 내게 남긴 차가운 말은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나의 과거 꿈을 따스하게 일깨워 주었다. 그 옛날, 작가를 열망했던 한 소년이 떠올랐다. 작가의 길을 포기하게 만든 아버지를 미워했던 한 소년이 떠올랐다. 학과방명록에 수많은 습작들을 남겼던 한 소년이 떠올랐다. 난 왜 그동안 글을 안 써왔던 걸까? 책은 그리 많이 읽어놓고 정작 글 쓸 생각을 못 한 채 살아왔다니. 세상에 데고 치였다 하더라도 너무 내 꿈에게 사기를 쳐가며 비겁하게 삶을 살아온 것 같다. 철제 책장을 바라보니 다양한 책들이 저마다의 색깔로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조정래의 <태백산맥>, <한강>, 그리고 정유정의 소설 등 대부분은 소설류였다. 물론 자기 계발서가 곳곳에 숨바꼭질하듯 숨어 있긴 했지만 자기 계발서를 그리 읽어 놓고도 내 삶과 본질은 절대 계발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니 어이없는 코웃음이 풍겨 나왔다. 오랜만에 브레인스토밍 노트를 펼쳐서 몇 글자 끄적여봤다.
‘써 볼까? 무엇을 써야 할까? 쓴다고 해도 내 글을 사람들이 인정해 줄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써보기로 결심했다. 글을 쓰는 것이 그녀와 나 사이에 단단히 잠겨 있는 비밀스러운 무언가를 풀어주는 유일한 열쇠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써보자. 쓰고 나서 그녀의 반응을 확인해 보자. 진짜 내가 글을 안 써 왔던 게 화가 났는지, 아니라면 왜 화가 났는지 혹은 내가 글을 쓰지 않았던 사실이 왜 너로 하여금 화를 분출하게 했는지. 나 자꾸 너가 신경 쓰여. 오랜만에 찾아와서 이게 뭐야.
‘그래. 써보자. 쓰고 나서 너에게 따져야겠어.’
그녀가 원하는 건 분명 내가 단순히 글을 써야만 한다는 게 아닐 것이다. 내가 작가라도 될 줄 알았나 보다. 이왕 글을 써보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상 내 글로써 나라는 존재를 증명해야 했다. 까짓 거 해보지 뭐. 결심이 선 후 인터넷에 접속하여 ‘문학공모전’을 검색했다. 온갖 공모전 정보를 모아놓은 사이트가 몇 개 있었다. 공모전 사이트에 들어가 문학 작품을 공모하는 내용의 게시판을 모조리 훑었다. 시부터, 에세이, 단편 소설, 중장편 소설까지 좋은 글을 선정해서 등단 작가로 위촉해 준다거나 소정의 상금을 준다는 공모전은 생각보다 많았다. 한창 글을 썼던 대학생 때는 왜 이런 사이트를 몰랐을까. 내 글을 나만의 세계에만 가두어 두었던 건 아니었는지 억지스러운 후회가 밀려왔다. 어떤 대회에 공모를 해야 한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되는대로 몽땅 써서 모두 공모해 보기로 했다. 하나는 얻어걸리겠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모조리 소환하여 글감이 될 만할 추억과 장면을 이것저것 끄집어내었다. 고3 시절 작가의 꿈이 좌절된 이야기, 부모님의 고생과 눈물, 그녀와의 따스했던 추억, 군대에서의 고통과 고난. 떠올려보니 쓸 만한 글감들이 옥상 위 빨랫줄에 걸린 빨래처럼 널리고 널렸다. 시든 에세이든 소설이든 생각나는 대로 끄적여보자. 나의 새로운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브레인스토밍 노트에 당찬 목표를 새겼다. 갑자기 꺼져있던 삶의 활력이 자양강장제 성분처럼 혈관 구석구석에 퍼지기 시작했다.
‘문학 공모전 입상 후 그녀에게 당당하게 연락해서 따지기.’
한 달이란 시간을 오로지 글 쓰는 작업에만 신경을 쏟았다. 학교에서 자투리 시간이 날 때마다, 퇴근 후 귀가하자마자 글과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책상엔 뜯긴 머리카락 몇 가닥이 책상에 흠집이라도 난 듯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정말 글을 못 써서 미친놈처럼 하루하루를 글과 피 튀기는 전쟁을 치렀다. 몇 편의 글이 완성되면 마감이 임박한 공모전 위주로 작품을 제출했다. 공모전 결과 발표날이 되면 아침부터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왠지 될 것만 같았고, 반드시 되어야만 했다. 그래야 그녀에게 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공모전 심사위원들은 내 글에 깊은 인상과 감명을 못 받은 것 같다. 될 것만 같은 확신이 들었는데 돌아오는 현실은 내 글솜씨를 차갑게 비웃었다. 냈던 글들이 속속 떨어졌다. 떨어진 글을 다시 다른 공모전에 제출했다. 하지만 결과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패배의식만이 바닷가 마을에 피어오르는 짙은 안개처럼 내 마음에 뿌옇게 드리웠다. 한편으론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엔 얼마나 전문글쟁이들이 많은데 고작 최근에야 글이란 걸 써봤으니 어찌 보면 나의 과욕이 불러일으킨 당연한 결과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공모전에 작품을 제출하고 결과 발표날을 핸드폰 알림으로 설정해 놓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결과 발표날을 따로 기억하지 않게 되었다. 돌아오는 결과는 뻔할 뻔자니까. 시간이 흐르자 글을 쓰는 시간은 점차 줄어들었고 난 다시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꿈의 의미와 삶의 활력의 빛이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화창한 평일의 오후, 교재 연구와 행정 업무에 치이고 있던 중 사무실 책상이 지잉, 하고 울리기 시작했다. 스마트폰 화면은 켜져 있었고 알 수 없는 번호로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광고나 홍보, 스팸 문자이겠거니 하고 별 신경을 안 쓰려고 했는데 문자 메시지의 제목이 심상치 않았다.
‘장려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희미해진 기억을 뒤적이다 보니 어린 시절 붕어빵을 구워 파셨던 어머니의 추억을 그리며 썼었던 에세이 하나가 떠올랐다. 언제 공모했는지 기억도 안나는 붕어빵 이야기.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장려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본 공모전을 통해 친구, 가족 등 사람들을 한 마음으로 모으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추억을 만드는 기회가 되었길 바랍니다. 공모전에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소중한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입상하신 분들은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감격스럽고 역사적인 첫 결과물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고작 5만 원의 상금이었지만 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에게 닿을 수 있는 활로가 뚫린 것 같아 감격스러웠다. 공모전 운영진과 심사 위원들에게 직접 찾아가 넙죽 큰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덕분에 그녀에게 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만세.
입상 문자가 버젓이 떠 있는 스마트폰 화면을 캡처해서 그녀에게 보내는 문자 메시지에 담았다. 과연 그녀는 답을 해줄까? 어떤 답을 해줄까? 오분이 지나 그녀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역시 변수남. 해낼 줄 알았어. 정말 축하해. 나 사실 너 좋아해. 나랑 결혼할래?’
"헉, 사귀지도 않았는데 바로 결혼이라고? 나 아직 계약직이라."
개꿈도 이런 개꿈이 없다. 교무실에서 잠깐 존 사이 꿈을 꿨었나 보다. 하, 정말 현실 같았는데. 아니, 현실이라 믿고 싶었는데. 입가에 삐져나온 침을 닦고 있던 중 내가 언제 깨나 기미를 살피고 있었던 교무실무사 선생님이 소포 하나를 전해주었다.
“변샘, 소포 받아요.”
“네? 소포요?”
“푹 주무시길래 일부러 안 깨웠네. 아기처럼 새근새근 잘도 주무시더구먼.”
“아, 네. 죄송해요.”
인터넷 쇼핑을 안 하니 택배가 올리야 만무했고 뜬금없이 소포가 오다니. 옅은 갈색의 서류 봉투 겉면엔 ‘정지안’이라는 이름 석 자가 검은색 네임펜으로 뚜렷하게 써져 있었다. 무슨 일이지? 왜 선주가 나한테 소포를. 아무리 생각해도 선주가 나에게 소포를 보내는 사건의 흐름은 예측이 불가능했다. 책상 서랍에서 오랜만에 커터칼을 꺼내 조심스럽게 서류 봉투를 열었다.
“이건…….”
소포 속에 담겨 있는 물건은 남루해질 정도로 남루해진 1999년 학과방명록 ‘둘기네집’이었다. 대학 생활 추억의 한 장면을 골동품처럼 장식하고 있는 학과방명록. 새벽이슬을 머금은 안개꽃처럼 아련한 기분이 들었지만 동시에 선주가 이걸 나한테 보낸 의도가 궁금했다. 학과실에서 이걸 어떻게 구했는지, 이걸 왜 나한테 보낸 건지 그녀의 궁극적인 의도를 알 방법은 전혀 없었다. 곧 뜯어져 나갈 것처럼 낡아 빠진 둘기네집의 첫 장을 조심히 열어 보았다. 둘기네집에 쓰인 각양각색의 손글씨들은 그 시절 그 사람들의 체취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읽어봐서 그런지 마치 십 년 전에 묻어놓은 타임캡슐을 꺼내 보는 것 같았다. 아득한 미소를 머금고 몇 페이지를 넘겨보니 그 당시 스무 살 변수남이 쓴 글이 서서히 드러났다. 국어교육과에 입학해서 맨 처음 쓴 글은 ‘카푸치노에 대한 단상’이라는 글이었다. 그 글 아래엔 그녀의 인상적인 흔적이 묻어 있었다.
‘사랑의 의미에 대한 통찰. 꽤 인상적이야. ^^’
지난한 세월 속 나에게 한 줄기 위로가 되었던 그녀의 꼬리글. 반가움과 쓸쓸함이 어긋나듯 동시에 밀려왔다. 그 시절의 어리숙한 감정들이 닭살처럼 찾아왔다. 그녀와 나의 첫 대면은 그렇게 글과 글로써 시작되었구나. 페이지를 몇 번 더 넘겨보니 둘기네집의 대주주는 나 변수남이었다. 그 시절 무슨 글을 그리 많이도 써댔는지 나도 이유를 모르겠다. 그저 글을 쓰고 싶어서 닥치는 대로 썼던 어슴푸레한 기억밖엔 떠오르지 않았다. 유독 사랑에 대한 글이 많이 보인다. 사랑도 안 해 본 녀석이 무슨 사랑타령을 이리도 유난히 떨었을까, 하는 민망함 감정이 슬며시 찾아왔다. 때로 어떤 글들은 과연 스무 살의 풋내기 변수남이 썼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꽤 수준이 있었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감정과 표현을 끄적였을 뿐인데 고작 스무 살짜리가 이런 글을 썼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확히 어느 시점에 썼는지는 모르겠는데 앞뒤 글의 맥락상으로 볼 때 선주에게 고백했다가 차인 이후로 쓴 글귀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별 앞에 낙담할 필요 없다.
세상이 끝나버렸다는, 너 같은 건 살 가치가 없다는 악마의 속삭임에도 귀 기울일 필요가 전혀 없다.
비록 아프고 죽을 것 같다는 참담함이 찾아올지라도 사랑의 성장통이라 여기며 버티고 또 버텨라.
남이 내게 준 상처, 내가 남에게 준 상처는, 서로가 더욱 단단하고 찬란한 사랑의 꽃을 피우기 위한 천사의 생채기쯤으로 치부해라. 새살은 반드시 피어오른다.
상처 난 곳에 또 다른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너는 삶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테고 내면은 성숙이란 지향점을 향해 한 발짝 더 다가설 테니.’
엄밀히 말해서 연인 간의 정식적인 이별이 아니라 일방적이고 어설픈 고백 후 차인 상황인데 마치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처절한 이별을 한 듯한 모양새로 똥폼을 잡았었나 보다. 부끄러운 열꽃이 확 피어오른다. 당시에 이 글을 선주는 읽어 봤을까. 도대체 무슨 심정으로 이 따위 글을 남들 보란 듯이 끄적거렸을까. 스무 살의 변수남은 정말 어리숙하고 못난 놈이었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 다음 글은 더 가관이다.
‘비 갠 뒤에 무지개 오듯, 이별에 젖은 몸을 더 위대한 사랑에 대한 확신으로 말리리라. 드라이플라워마냥 영원히 시들지 않는 염원을 담아’
하, 모자란 녀석. 글을 통해 그녀를 향한 고백에 실패한 걸 합리화, 정당화라도 시키겠다는 거야? 무의식 중에 글이라는 도구를 통해 방어기제를 발동시켰었나 보다. 난 더 이상 내 글들을 자세히 훑어볼 수 없었다. 옛 추억이나 소환하자는 심정으로 남들이 써 놓은 글들을 살펴보고 있었는데 익숙한 필체의 글귀에서 횡단보도 앞 파란불을 기다리는 보행자처럼 내 시선이 멈추었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딱 한 문장이었다. 문장의 주인이 누구인지 짐작이 가는 듯한 필체. 내 머릿속에서 자꾸 재생되던 그 필체. ‘사랑의 의미에 대한 통찰. 꽤 인상적이야. ^^’를 쓴 사람과 같은 필체. 다름 아닌 선주였다. 그땐 내가 왜 이 문장을 놓쳤던 거지? 나만의 어두운 감정에 종속되어 버려서 오직 내 감정에만 관심을 기울이느라 주변을 살피지 못했던 걸까? 이후 그녀가 쓴 문장이 혹시 더 있을까 봐 방명록을 쥐 잡듯 뒤져보았지만 더 이상 그녀가 남긴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당신은 누구일까. 정체 모를 당신이 저지른 잘못은 무엇일까. 머릿속이 복잡하다. 아무리 추리를 해봐도 단서불충분으로 인해 사건의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의문투성이로 가득한 상념 탓에 머리가 두통의 전조증세처럼 지끈거리며 무거웠다. 지난 과거를 소환하느라, 그녀의 흔적에 집중하느라 골몰하고 있는 사이 내 등뒤에선 사람의 손 감촉이 전해져 왔다. 입사 동기 윤아연샘이었다.
“뭘 그리 열심히 보고 있어? 일기장이야?”
보고 있던 둘기네집을 서둘러 덮고자 했다. 하지만 나의 둔한 손놀림보다 아연샘의 낚아채는 손놀림이 더 빠르고 가벼웠다. 이 사람 복싱이라도 배웠나? 손이 왜 이리 빨라.
“이게 뭐야? 둘기네집? 뭐 이런 노트가 다 있어?”
“대학교 1학년 때 과 사람들이 쓴 일기장 같은 거야. 이리 내.”
“오호, 그런 게 있었어? 그럼 수남샘 일기도 있겠네. 어디 보자.”
아연샘은 둘기네집을 펼쳐 들고 영어 사전에서 모르는 영단어 찾듯 훑기 시작했다.
“이거, 이거 수남샘이 쓴 글 맞지? 글씨체가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 카푸치노에 대한 단상?”
“응, 내가 쓴 거 맞아.”
“이야, 대학교 1학년 주제에 사랑에 대해 뭘 안다고 이렇게 거창한 글을 써 놨을까?”
“그냥 잡글이야. 노트 이리 내.”
아연샘에게서 노트를 가로채려고 시도해 봤으나 여전히 나의 손놀림은 복싱을 배운 것 같은 아연샘보다 무겁고 둔했다. 나의 인터셉트를 가볍게 피한 아연샘은 유유히 노트를 들고 놀리듯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대학생 변수남의 추억 좀 더 읽어 보고 돌려줄게.”
“아연샘, 당장 이리…….”
“변수남 선생님, 학급 학생이 체육 시간에 다쳤어요. 얼른 체육관으로 가 보세요.”
아연샘을 붙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덤벼들어 봤지만 '공인 변수남 관찰카메라'인 오대준 선생님이 야속하게 날 불러 세웠다. 학생이 다쳤다니 지금은 아연샘을 잡을 게 아니라 체육관으로 가보는 게 급선무다. 아연샘은 제 물건도 아닌 걸 왜 뺏어가서 사람 속을 이리도 뒤집어 놓을까. 후, 어쨌든 갔다 와서 보자. 체육관으로 발걸음을 바쁘게 옮겼다. 장난스러운 얼굴로 둘기네집을 읽다가 점차 심각해지는 표정으로 얼굴이 일그러지는 아연샘을 뒤로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