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트 뿌리듯 가는 비가 세상을 적시는 다음 날 아침, 학교에 출근해 자리에 막 앉으려던 찰나 어느샌가 아연샘이 등뒤에 다가와 있었다. 그녀의 얼굴엔 평소답지 않은 진지함이 묻어있었다. 순순히 그리고 묵묵히 둘기네집을 다시 돌려주는 아연샘의 모습이 사뭇 어색하게 느껴졌다. 평소 밝고 명랑한 성격에 장난을 자주 걸던 아연샘이라 분명 어느 성격이든 어느 방향이든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해 보였다. 남자 친구랑 헤어지기라도 했나? 아니, 남자친구가 있었나? 아무튼 아연샘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대신 내 앞에서 그저 마을 어귀의 장승처럼 머뭇머뭇거리며 서 있었다. 뭐 할 말이라도 있나?
“아연샘, 할 말 있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잘 안 나와?”
“수남샘, 저기 말이야……․”
“계속 뜸만 들이다가 싱거운 밥 나오면 가만 안 있을 거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사과라면 안 해도 돼. 연체료도 안 쌓이고 제때 돌려줬다고 생각할게.”
“그, 그게 아니라. 여기에서는 말하기 조금 그렇고, 이따가 점심시간에 식사하고 1시쯤에 상담실에서 좀 봐. 시간 돼?”
“뭐 점심시간에는 딱히 할 일이 없으니까 시간은 되는데, 무슨 일 있어?”
“아니야, 이따 1시에 봐.”
개운하지 못한 여운을 남기고 아연샘은 자기 자리로 맥없이 돌아갔다. 아연샘의 뒷모습은 뭔가 풀이 죽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알지 말았어야 할 거대한 운명 혹은 비밀을 알아버린 것 같기도 한, 정체 모를 기운이 새어 나오는 듯했다. 무엇인가 일이 터진 것은 확실하다. 어쨌든 둘기네집은 아연샘을 거쳤다가 다시 내게로 무사히 돌아왔다.
점심으로 편의점에 판매하는 인스턴트 카레보다 더 맛없는 급식 카레밥이 나왔다. 아연샘이 남긴 묘한 여운이 식욕을 빼앗아 버렸는지 점심식사를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아연샘과 만나기로 한 상담실에 들어간 시간은 1시가 되기 10분 전이었다. 아연샘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얼마 전에 들어와서 아직 새것 냄새가 안 빠진 베이지 인조가죽 소파에 무겁게 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이 학교에 들어와서 상담실은 주로 윤리 선생님한테 훈계를 받는 목적으로만 들어왔었다. 학생들과의 긴밀한 상담이라는 취지로 만든 상담실은 어느 순간부터는 나이 많으신 선생님들의 사랑방이자 안방으로 용도가 변경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같이 경력이 짧은 교사가 들어오기엔 꽤 진입장벽이 높은 공간이었다. 상담실 한쪽 벽에 높이 걸린 아날로그시계가 1시의 시침을 막 스치려는 순간 상담실 바깥쪽에서 약간의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이내 아연샘이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문을 걸어 잠갔다. 문까지 잠글 필요가 있나? 그녀의 표정은 아침과 별반 차이가 없는 암청색 어두움이었다.
“문 잠가도 되는 거야?”
“걱정 마. 바깥문에다가 <학생 상담 중>이라고 팻말 걸어놨어. 이제부터 여긴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이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문까지 걸어 잠그고 날 가둔 거야? 나 좋아해? 고백이라도 하려고?”
“응, 좋아해.”
“응?”
“좋아한다고. 수남샘.”
심각한 표정 좀 풀어주려고 가벼운 농담을 건넸을 뿐이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던진 가벼운 돌이었는데 던진 쪽에선 무거운 바위가 굴러왔다. 아연샘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실, 수남샘 좋아했었어. 그리고 어젯밤에 수남샘에 대한 모든 마음을 정리했고.”
사랑의 젬병인 나로선,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아보지 못한 나로선 어색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누군가가 날 좋아해 준다는 건 더없이 영광이고 고마움이었지만 이건 너무 맥락도 없고 뜬금없지 않은가. 그렇다. 분명 이 상황은 아연샘의 연기일 것이다. 아마 내가 고백을 받아 주냐 마냐로 여선생님들끼리 내기를 했음이 틀림없다. 이곳에서 아연샘의 고백을 받아주는 함정에 걸리는 순간 난 평생 아연샘 일당들에게 놀림거리가 되겠지. 나 이래 봬도 대학교 때 부전공으로 상담심리학을 배운 심리 전문가라구. 암, 여자들의 심리엔 내가 전문가지.
“에이, 장난하지 마. 이거 몰래카메라지? 선생님들하고 술자리에서 내기라도 했어?”
“나 사실 수남샘 좋아했어.”
연기라고 하기엔 얼굴 표정이나 말투에 거짓을 입증할 수 있는 요소가 전혀 없어 어찌 보면 너무 자연스러운 무혐의 감정같이 보였다. 진짜 이게 연기라면 아연샘은 교직 현장이 아닌 드라마 촬영 현장에 있어야 한다. 슬슬 마음속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살면서 정선주 이외엔 다른 여자는 맘 속에 생각하지도, 품어본 적도 없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상담심리학 시간에 뭐라고 배웠더라? 내담자에게 무조건적인 공감 및 수용을 해주라고 했던가? 근데 고백 상황에서 쓸 수 있는 기법은 아닌 것 같은데. 아, 어떡해야 하지?
“그런데, 어젯밤에 수남샘에 대한 모든 감정 정리했어.”
갈수록 태산이다. 이건 뭐 병 주고 약 주고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게 영 불편했다. 그래서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일단 내가 중간에 말을 끊으면 안 될 , 심각한 상황인 건 분명해 보였다.
“혹시 내가 어제 가져갔던 둘기네집 말이야. 그 안에 담긴 글들 다 읽어 보긴 했어?”
“예전엔 다 읽었던 것 같은데, 잘은 기억이 나질 않아. 보통 내가 글을 많이 썼었고 남이 썼던 글들 중에선 뭐 웃겼던 이야기 정도가 기억에 남네. 시험 기간에 술 마시면 혼낸다는 선배들 이야기 정도?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제 빼앗아 가서 그걸 다 읽어 본 거야?”
아연샘이 풍기는 미스테리한 비밀의 근원은 아마도 둘기네집인 것이 거의 확실해졌다. 같은 학과 출신도 아닌데 왜 아연샘은 둘기네집을 화두로 꺼내는 것일까? 둘기네집과 아연샘은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건 머리를 수백, 수천 번 굴려봐도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아연샘의 다음 말은 무거운 납탄이 되어 내 심장에 차갑게 박혔다.
“혹시 예전에 대학 다닐 때, 국어교육과에 정선주라는 사람 있었어?”
아연샘의 입에서 정선주라는 이름이 나올 줄은 아마도 세상을 주관하는 신만이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천천히 시동을 걸던 심장은 더 요란하게 악셀을 밟고 있었다. 시끄럽게 요동치는 심장 소리를 애써 억누를 방법은 없었다.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손과 발은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지금 내 앞에 무언가 거대한 운명의 굴레가 굴러온 것이다.
“대답해 봐. 정선주라는 사람 있었어?”
“아연샘이 그 사람을 어떻게 알고 있어?”
“예쁘장하게 생긴 정선주, 키는 165~167센티 정도 되는 정선주, 열심히 교회 다니는 정선주, 공부도 꽤 잘하는 정선주. 맞지 않아?”
“……․”
아연샘이 생각하는 그 사람은 내 기억 속에 소중히 묻혀 있던 그 사람이 분명할 것이라고 상담실의 미세한 공기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아연샘은 그녀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 더구나 둘기네집은 익명성이 강한 방명록이라서 대부분의 글들은 가까운 사람들만이 알 수 있다는 필체가 아니고선 글 쓴 사람의 신원을 알 수 없었을 텐데. 갑자기 원인 모를 두통이 밀려왔다.
“나, 일 년 전부터 수남샘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어. 예전에 만났던 남자들은 가진 것도 쥐뿔도 없는 주제에 근거 없이 자기 고집들은 세서 본인의 삶에 거만했고, 세상은 자기 것이라는 허풍기가 있었지. 그리고 늘 나를 자기 아랫사람인양 깔봤거든. 그런데 이 학교에서 만난 변수남이란 사람은 뭐라고 해야 되나, 그냥 채움이 필요한 사람 같았어. 뭔가를 갈급하고 있지만 허전해 보이는 사람, 누가 곁에서 그 갈급함을 채워주면 행복해질 것 같은 사람 말이야. 삶이 위태로워 보이는데도 오뚝이처럼 넘어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막 뛰는 것 같지만은 않아 보이는데 마치 육상 트랙 위에서 출발 신호탄을 기다리는 사람 같기도 하고. 어쨌든 수남샘은 나에게 그런 사람으로 비쳤어. 그런데 수남샘의 그 허전함과 갈급함과 비어 보임이 계속 나를 마력처럼 끌어당기는 거야. 나도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어. 그냥 수남샘의 그런 부분들을 나라면 채워줄 수 있진 않을까,라는 그런 막연한 기대감이 찾아오는 거야. 같은 기간제 교사라서 가지는 일종의 동지 의식도 아니고 연민의 마음은 절대 아니야. 수남샘은 분명 상대방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외모도 출중하고 조건 좋다는 남자 꽤나 만나봤다는 내가, 내 마음이, 수남샘에게 향할 리가 없지. 이상하게끔 내 마음이 자꾸 수남샘을 향해. 처음엔 호감에서 다음은 설렘으로 그 다음은……․ ”
“아연샘, 그만.”
난 아연샘의 말을 끊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녀는 조금씩 울먹거리고 있었고 곧 눈물샘이 터지기 직전이었으니까. 그녀의 말은 대강 이해했다. 자세한 마음이야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 날 좋아한다는 것이 아닌가. 일단 그녀를 진정시켜야 했다.
“고마워, 아연샘. 나 같은 사람 좋아해 줘서.”
“수남샘, 난……”
“그런데 나 아직도 내 마음속에 한 여자가 안 지워져. 미안해.”
“선주구나.”
“그걸 어떻게 알아?”
“잘 알지. 수남샘에 대한 내 마음을 접게 만든 장본인이 선주니까.”
아연샘은 그새 촉촉해진 눈가를 손가락으로 훔치고 있었다. 소파 앞 탁상에 놓여 있던 각티슈를 한 장 뽑아 아연샘에게 건넸다. 아연샘은 눈화장이 더 번지기 전에 내가 건넨 티슈로 눈가 주변을 조심스레 닦았다. 궁금한 건 많았지만 일단 기다려주기로 했다. 아연샘의 호흡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지금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상담실 한쪽 벽에 걸려 있는 화이트 톤의 모던하고 심플한 아날로그 벽시계는 이제 10분 후면 점심시간이 끝나리란 걸 알려주고 있었다. 아연샘의 호흡과 숨결이 진정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자 내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아연샘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정선주라는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나온 순간부터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도대체 정선주라는 사람과 무슨 관계인 거야?”
아연샘은 차분히 숨을 고르고 내 눈망울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선 어떤 말과 이야기가 쏟아질까.
“수남샘, 이제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 잘 들어. 수남샘이 꼭 들어야 하고 알아야 할 이야기니까.”
아연샘은 실타래처럼 얽혀 있던 과거 이야기를, 그녀와 선주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아침에 내리던 가는 빗방울은 거센 바람을 동반한 굵은 빗줄기로 옷을 갈아입고 바깥창문을 세차게 두들겨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