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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필 Apr 23. 2024

약속은 칼같이

   여자가 왜 화를 내는지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오전 열한시에서 십오분이나 지났다. 여자는 열한시부터 저렇게 화를 내고 있다. 얼마 후면  빈 위장을 부여잡고 오전을 버틴 직장인들이 뛰어들 것이다. 분식집은 속도가 생명이다. 음식의 퀄리티가 중요한 사람들은 기다림에 관대하다. 그러나 그의 가게 손님들은 퀄리티보다 스피드에 가치를 두는 분들이다. 산더미처럼 쌓인 달걀지단이 썰기에 맞춤하게 식었는데 여자의 화는 식을 기미가 없다.


   준비성이 철두철미한 그이길래 망정이지 오늘 점심 장사를 망칠 뻔했다. 다행히 점심 장사 준비는 거의 끝났다. 달걀지단을 썰고 라면과 우동면만 끓는 물에 바로 넣을 수 있도록 봉지를 뜯어 놓으면 된다. 그래도 최소한 이십 분은 확보해야 하는데 그의 소중한 시간이 째깍째깍 흘러간다. 명백한 영업 방해다. 경찰을 불러야 하나. 그러면 정말 점심 장사는 끝나는 건데.


   여자의 김밥은 열시 반에 완성해 계산대 옆에 두었다. 그는 약속을 칼같이 지킨다. 많지는 않지만 남은 할 일이 볼링핀처럼 줄맞춰 저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때맞춰 모조리 쓰러뜨려야 한다. 장사를 시작하고 한 번의 예외 없이 스트라이크를 기록했다. 열한시 반까지 점심 장사 준비를 마치고 믹스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스트라이크의 뿌듯함을 즐겨야 하는데 오늘은 어째 불안하다.   


   시간이 아까워 화가 났다면 지금이라도 얼른 김밥을 들고 가게를 떠나는 게 낫지 않나? 김밥을 여러 줄 주문한 것으로 보아 여자를 기다리는  배고픈 사람들도 있을 것 같은데. 배려심이 없는 여자군.


   여자는 어제 오후 가게에 들러서 김밥 여덟 줄을 주문하며 다음 날 찾으러 오겠다고 했다. 현금으로 시원하게 선결제도 했다. 요즘은 현금으로 계산하는 손님이 거의 없는 터라 그는 공돈이 생긴 것처럼 반가웠다. 단골이 되면 좋겠군. 특별히 요구하는 옵션이 없으면 은박지에 여러 줄의 김밥을 함께 포장하지만 여자 것은 특별히 한 줄씩 각각 포장을 해 뒀다. 나무젓가락도 몇 개 필요하시냐고 묻지 않을 셈으로 여덟 개를 가지런히 넣어 두었다.


  차림새를 보니 이 동네 주민이 분명하다. 여덟 줄이나 주문한 것으로 보아 분명 점심 약속이 있지만 엄청 중요한 약속은 아닐 것이다. 십오분이 지나도록 화를 내느라 약속 따위는 잊은 듯 하니 말이다. 옷차림을 보아도 그렇다. 스키니 청바지에 위에 받쳐 입은 니트의 소매 끝에 커피 방울이 찍혀 있고 손에 휴대전화와 지갑을 포개 쥐었다. 아마도 여럿이 모여 각자 준비해 온 음식들을 나눠 먹으며 수다를 떠는 약속일 것이다. 여자가 맡은 음식은 김밥이겠지. 다른 멤머들은 샌드위치나 커피, 음료수를 나누어 맡았을 테고.


 그러나 저러나 여자는 왜 자신을 십오분이나 기다리게 했냐며 계속 앙칼지게 외치고 있다. 왜 김밥을 먼저 주지 않았느냐.... 미리 주지 않았다고 화를 내다니, 화를 내야 할 사람이 누군지 그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진상도 이런 진상 손님이 없다.


 여자가 열시 사십오분에 김밥을 찾으러 왔을 때 그는 주방에서 달걀 지단을 부치고 있었다. 주방에서 내다보니 여자는 계산대 옆에 놓인 김밥 봉지를 집으려다 확인이 필요한지 주방을 쳐다보며 사장님, 김밥 찾으러 왔어요, 했다. 그는 조금만 기다리세요, 했다. 여자가 멈칫 하더니 손을 거두어 들이는 게 보였다.


   마지막 지단을 쟁반 위에 포개어 그의 일을 마무리한 후 그는 시곗바늘이 정확히 열시 오십구분을 가리키자 주방에서 나와 십오분 간 여자 앞에 놓여 있던 김밥 봉지를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여자의 눈이 커지더니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자는 화를 내고 있다.


 그가 김밥을 완성하여 계산대 옆에 놓아둔 시간은 오전 열시 반. 여자가 김밥을 찾으러 온 시간은 오전 열시 사십오 분. 그가 여자에게 김밥을 건네 준 시간은 약속했던 오전 열한시. 여자는 왜 화를 내는 걸까.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약속을 칼같이 지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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