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아무것도 안 한다. 아무것도 안 하고 테레비만 본 지 이십 년이 넘었다. 꼭 늙어서만은 아니다. 돈 버는 일 빼고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탓이 더 크다. 퇴직하기 전까지 내가 한 일은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해서 쉬는 것이었다. 그것뿐이었다. ‘뿐’이라는 단어는 하찮음을 표현할 때 붙이는 것이지만 내 경우에는 개수가 적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약간의 추가 근무가 있었지만 그것도 장모님이 돌아가시면서 끝났다. 어머니를 모시고 아이들 셋을 키우는 건 전적으로 아내의 일이었다. 어머니는 집안일을 덜어가면 덜어갔지 절대로 아내나 나에게 짐을 얹어 주지는 않았다. 심지어 돌아가실 때도 멀쩡히 잠자리에 들었다가 아침에 혼수상태로 발견되었고 고작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성적이나 대학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나로서는 아이들에게도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별 말썽 피우지 않고 어디 아프지 않으면 잘 자라고 있는 것 아닌가. 돈만 벌어 오면 나머지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아내가 알아서 했다. 장을 담그는지, 김장을 하는지 내가 알 필요가 없었다. 재훈이 덕에 먹어 본 피자로 치자면 나는 피자의 커다랗고 둥그런 빵만 만들었고 아내는 그 위에 치즈를 뿌리고 고기, 새우, 피망 같은 자잘한 것들을 다듬고 썰어서 얹은 후 알맞게 익히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서 피자를 완성시켰다. 맨 밑의 빵이 있어야 피자를 만들 수 있긴 하지만 내가 먹어 본 피자들의 맛은 바닥에 깔려 보이지도 않는 빵보다는 빵 위에 얹힌 재료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나는 내가 하던 단 하나의 일을 정년퇴직과 함께 그만두었다. 정년퇴직은 공식적인 선언이었다. 올림픽 폐막식 같은 것이었다. 폐막식을 하고 나면 얼마 간은 재방송을 통해 선수들에 대한 기억을 이어가지만 환호를 받던 선수들은 곧 깨끗이 잊힌다. 메달을 따면 테레비 광고에 등장하여 기억을 연장시킬 수 있지만 그건 소수만이 가능하다. 차이가 있다면 올림픽은 다음이 있지만 퇴직은 다음이 없다는 것이다. 선수들은 다음 올림픽에서 더 나은 성적을 기대하며 사 년간 다시 구슬땀을 흘려야 하지만 퇴직은 다음이 없으니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나도 그렇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내의 일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 아내의 항아리는 전래동화 속의 항아리처럼 아무래도 바닥에 구멍이 나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물을 부어도 채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하루 종일 집에 있게 되자 아내의 일은 늘어난 것 같았다. 당장 밥상을 차리는 횟수만 봐도 엄청 늘었다. 아침 한 끼 정도는 빵으로 때운다 해도 나는 하루 세끼, 새참 세 번을 꼭꼭 챙겨 먹는다. 젊을 때부터 자주 소식하지 않으면 소화를 시키지 못했다. 돈을 벌던 시절 아내는 도시락을 싸줄 때 떡이나 설탕을 뿌려 둥글게 만 말랑한 누룽지를 항상 같이 넣어 줬고 출근 후 점심식사 전, 점심식사 후 퇴근 전에 그것들을 집어 먹어야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퇴직 초기 그 번거로운 습관을 당장 바꾸라고 할 만큼 아내는 야박하지 못했고 나도 당장 아내의 눈치를 볼 만큼 비굴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며 나이를 더 먹다 보니 이제는 때 맞춰 먹던 양을 먹지 않으면 기운이 까부라진다. 팔십이 넘은 지금도 내 위장은 타이머가 맞춰진 시한폭탄처럼 정확한 시간에 먹을 것을 달라며 터진다.
늦은 밤 퇴근해도 꼭 제 엄마가 차려 주는 저녁을 먹는 재현이와 달리 먹고 싶은 온갖 음식을 배달시켜 먹는 재훈이는 제 엄마가 부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안쓰러운지 주말이라도 외식을 하자고, 자기가 사 주겠다고 성화지만 백 원짜리 동전 하나에 벌벌 떠는 아내가 그 말을 들을 리 만무하다. 나가서 칼국수 사 먹을 돈이면 집에서 소고기 먹는다, 사 먹는 놈이 도둑놈이라는 것이 아내의 신념이다. 그렇다면 차선책으로 내가 집안일을 좀 나누면 될 것 같지만 나에게 집안일은 남들이 다 해도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던 주식하고 똑같다. 나는 평생 적금만 들었지 주식 같은 투자를 해 본 적이 없다. 괜히 손댔다가 그나마 있는 돈도 까먹는 마이너스가 될 것만 같았다. 실제로 몇 번이고 집안일 돕기를 시도했지만 어차피 다시 해야 하니 차라리 가만있으라는 아내의 역정만 돋웠다. 그래서 지금은 아내가 주는 대로 먹고 입으며 텔레비전만 본다.
정년퇴직을 할 때 아쉬움보다는 기대가 컸다. 건물주가 되었으니까. 시내에서 좀 비껴 난 위치의 낡은 삼층 건물이었지만 빚 한 푼 없이 알토란 같은 내 퇴직금으로 산 것이었다. 반지하의 맥줏집, 이 층의 미술학원은 일 층보다 세는 적었지만 내가 건물주가 되고도 십 년 이상 자리를 지키면서 쏠쏠한 지갑 노릇을 했다. 특히 이 층 월세 삼십만 원은 내 용돈으로 주겠다고 아내가 약속했기 때문에 미술학원이 잘 되기를 원장 못지않게 바랐다. 학생들이 올 시간이면 삼 층 살림집에서 밖을 내다보며 어수선하고 시끄럽게 횡단보도를 건너는 학생들이 줄지 않는지 살피곤 했다. 어린 학생들이 화장실 변기 커버며 수도꼭지를 자주 망가뜨리고 계단에 군것질 쓰레기며 떡볶이 국물을 늘상 흘리면 얼른얼른 고쳐 주고 치워 주었다. 그런 것도 일이라면 일이겠지만 월급을 받을 때와 달리 일하지 않아도 돈이 나온다는 게 신기하고 신났다.
문제는 일 층, 건물의 노른자위가 말썽이었다. 반지하나 이 층은 페이스메이커 정도고 우승을 노리는 선수는 일 층이었다. 반지하와 이 층의 세를 합쳐도 일 층만 못했다. 신입 건물주였을 때는 그 월세에 어림없다고 큰소리치면 다음 세입자 후보자가 짠하고 나타났다. 농협이 있고 하나로 마트가 있어 제법 상권이 좋았다. 세상에는 세를 들어 장사를 하려는 이들이 무궁무진했고 그렇게 시작한 장사를 금세 말아먹는 이들은 더 무궁무진했다. 애초에 일 층은 식당 시설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항상 식당을 하려는 이들이 세를 들었다. 분식집, 냉면집, 칼국숫집 등 고만고만한 식당들이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하늘의 달이 건재해선지 밀물, 썰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새 식당이 들어오면 한 번은 건물주로서 음식을 사 먹어 주었는데 아내보다도 훨씬 못한 음식 솜씨들이었다. 도대체 뭘 믿고 음식 장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월세가 밀리고 밀리다 애초에 걸었던 보증금을 다 까먹고 세입자가 나가는 경우는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보증금이 있으니 월세가 밀려도 집주인은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냐고 큰소리치는 세입자가 대부분이었다. 밀린 월세가 많아지면 아내는 얼마 되지도 않는 은행 이자를 생각하며 속을 끓이고 끓이다가 보증금을 줄인 셈 치고 월세를 몇만 원 더 받기로 합의를 하곤 했다. 이삿날 짐을 실은 트럭을 앞에 세워 두고 잔금을 며칠만 미뤄 달라고 했다가 이사 나갈 때까지 결국 잔금을 치르지 않고 대신 월세를 더 냈던 임차인도 있었다. 방충망에 구멍이 나거나 물이 새는 건 집주인이니까 당연히 고쳐 줘야 하지만 깨진 변기 커버나 망가진 수도꼭지까지 집주인이 갈아 줘야 한다는 임차인도 꽤 있었다. 관리비라는 것을 따로 받아본 적이 없는데도 반지하부터 이 층까지 계단에 떨어진 쓰레기를 치우거나 겨울에 눈이 왔을 때 건물 앞 눈을 치우는 세입자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 일을 세입자가 하면 벌금을 물리거나 감옥에 보내는 법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 해도 나는 월세를 받는 처지니 월세를 내는 처지와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세를 받아 일 년 살림을 꾸리는 것은 아내 몫이었다. 일 년을 주기로 쌀값, 부식값, 공과금, 재산세, 명절 비용, 장과 김장을 담그는 비용 등을 아내는 꼼꼼하게 계산해서 칼같이 돈을 나눴다. 아내의 계산기는 정확했고 돈통의 칸막이는 견고했다. 정해진 용도가 아니면 돈은 절대 나오지 않았다. 여러 개의 칸에 나누어 담은 돈은 철저히 제 용도에만 쓰였지 절대 다른 용도로 유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농협이 갑자기 이사를 가고 하나로 마트가 문을 닫자 달이 고장 난 것처럼 규칙적이었던 밀물과 썰물의 주기가 엉망진창으로 꼬여 버렸다. 밀물 시간은 짧아지고 썰물 시간이 길어졌다. 반지하와 이 층은 안 그랬는데 식당 자리인 일 층의 세입자가 교체되는 주기가 눈에 띄게 짧아졌다. 나는 하도 갈리는 세입자들 면접에 진이 빠져 건물주 노릇에 흥이 깨져 버렸고 세입자를 들이는 것은 연애와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전 사람과 좀 다르겠거니 기대를 하게 되지만 결국 다 똑같았다.
세입자를 들이는 것도 힘들었지만 내보낸 후에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힘들었다. 세입자가 나가고 나면 어김없이 대청소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업체를 불러서 하면 돈이 드니까 아내는 나를 조수 삼아 직접 청소를 했다. 나는 일 층 뒷정리를 여러 번 하면서 비로소 식당들이 얼마나 지저분한 줄 알게 되었다. 아내가 즐겨 보는 홈쇼핑은 나도 함께 볼 수밖에 없었는데 화장품 광고가 압권이었다. 얼굴의 반쪽은 화장을 지우고 나머지 반쪽은 화장을 해서 비교시키는 광고를 볼 때마다 저게 정말 한 사람 얼굴인가 싶을 때가 많았는데 식당들이 딱 그랬다. 음식을 팔 때는 그럴싸해 보였는데 실제로는 화장실보다도 더러웠다. 아내 말로는 안 되는 식당이라서 그렇다고 했다. 어떤 종류의 음식을 팔았든 주방 전체가 기름때로 자글자글했고 바퀴벌레도 바글바글했다. 청소를 하기 전 며칠 동안은 일단 바퀴벌레 약을 뿌려야 했는데 아무리 마스크를 써도 바퀴벌레보다 내가 먼저 죽을 것 같았다.
일 층에 더 이상 식당이 아닌 공부방이 들어오기로 결정되자 나가는 세입자는 늙은이들이 죽기 위해 돈을 쓰듯 그만두기 위해 돈을 써야 했다. 원상복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들어올 때 권리금을 낸 것은 아니니 손해는 아니라고 해야 할까. 한 명의 세입자가 나가고 곧바로 다음 세입자가 들어와 계주에서처럼 매끄럽게 바통 터치가 되었다면 권리금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달되었겠지만 대부분 세입자들 사이에는 텀이 있었다. 권리금을 주지 않고 들어올 때는 좋았을 테지만 후임 세입자가 업종을 달리 하는 바람에 마지막 식당 세입자는 제 돈을 들여 주방 시설을 때려 부수고 쓰레기를 한 트럭 치웠다. 그렇게 했어도 아내와 나는 거의 열흘 동안 남은 쓰레기를 정리했다. 보증금 한 푼 남기지 못하고 나가는 세입자에게 부스러기 잔해물들까지 알뜰히 치우고 가라고 할 순 없었다.
그땐 몰랐는데 코로나 덕분에 마스크 박사가 되면서 먼지 구덩이 속에서 청소를 할 때 아내가 KF94가 아닌 일회용 얇은 마스크만 사 준 것이 허리띠 졸라매기 운동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일 층이 비어 있는 시간이 길어져 아내가 발을 동동 굴러도 나는 대청소 횟수가 줄어든다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 제 음식 솜씨를 모르고 망할 가게를 벌이는 세입자들처럼 나 역시 건물이 비면 내 용돈이 깎일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했다. 일 층이 비는 시간이 길어지자 아내는 내 용돈을 오만 원 깎았다. 다 같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고 했다. 제일 만만한 내 용돈을 깎는 것이 신호탄이었다. 아내의 허리띠 졸라매기는 천리마 운동인가를 했었다는 북한이 벤치마킹해도 될 정도였다. 박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의 강도 높은 운동이었다. IMF가 터졌을 때 대기업들이 줄줄이 사업을 정리하고 매각했듯 아내도 집안의 일 년 지출 내역을 샅샅이 살펴 줄일 수 있는 항목들은 가차 없이 줄여 나갔다. 겨울에는 영하 십 도 아래로 내려가야 아침과 저녁으로 딱 삼십 분씩만 보일러를 틀었고 여름에는 삽십삼 도가 넘어야 설정 온도를 이십구 도에 맞추고 에어컨을 트는 식이었다. 그 이후로도 뭐를 줄이고 뭐를 없애는 아내의 선언이 정치인들의 선언처럼 줄을 이었는데 정치인들의 선언은 보여주기식 허풍이라면 아내의 선언은 철저히 실천적이었다. 재현이, 재훈이와 관련된 항목은 거의 없었고 아내와 내가 관련된 항목은 가차 없이 모가지를 내놓고 아내의 칼을 맞았다. 내 월급으로 장모님까지 포함해 여덟 식구가 먹고 살 때보다 더 궁핍해졌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모아 놓은 돈을 까먹을 수는 없다는 아내의 말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타당함이 있었다.
결국 일 층 월세를 내렸고 공부방이 들어오면서 연이은 대청소의 막은 내렸지만 한 번 졸라맨 허리띠는 풀리지 않았고 한 번 깎인 내 용돈은 원상복구 되지 않았다. 원상복구는 세입자들의 몫이지 집주인인 아내에게는 없는 일이었다. 다른 지출은 대부분 가족 모두를 위한 것인데 반해 내가 술, 담배에 쓰는 돈은 나를 위해서만 쓰는 돈이면서 심지어 건강에도 해롭다는 거부할 수 없는 근거가 있었다. 깎인 용돈만큼 담배와 술을 줄인 덕분에 조금 더 건강해질 테지만 그 건강으로 테레비를 보는 일 외에 할 일은 없었다.
다행히 안방의 테레비는 참 좋은 것이다.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작은 침대 사이즈 정도는 된다. 가 본 지 오십 년도 더 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한 극장 화면만큼 크다. 아내의 뒤를 이은 내 반려자인 이 테레비는 재훈이가 사 줬다. 지나가는 말처럼 테레비가 좀 작다고 했더니 득달같이 사 왔다. 너무 커서 안방의 작은 장식장 하나가 옥탑방으로 쫓겨났다. 침대 위에 앉으면 딱 내 눈높이와 수평을 이루도록 설치된 테레비는 잠자는 시간 빼고는 절대로 꺼지지 않는다. 크기만 큰 것이 아니라 소리도 이전 것보다 훨씬 커서 귀가 어두운 아내와 나에게 딱이다. 얼마나 볼륨을 크게 하고 보는지 재현이나 재훈이는 안방에 들어오면 무조건 테레비 소리부터 줄여야 무슨 말을 할 수 있다.
귀는 나보다 아내가 더 먹었다. 미처 몰랐을 때는 오해가 심각했었다. 같이 뉴스나 시사프로를 보다가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주로 화내는 말을 하면 때맞춰 나오던 옹호나 타박의 추임새가 사라졌다. 저 놈들은 매번 저러네 하면 맨날 화내면서 뭐 하러 보냐고 대꾸하던 아내가 잠잠하게 화면만 쳐다보자 이제는 내 말을 무시하는구나 싶었다. 밥과 새참은 꼬박꼬박 차려 주었고 먹을 때는 멀쩡히 대화를 잘하는데 테레비 볼 때만 노골적으로 무시를 하는 게 이상하다 싶었지만 원래 아내는 내가 남 욕 하는 걸 싫어했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했다. 밥을 먹을 때마다 남 욕을 하는 사람은 없지만 우리나라 뉴스나 시사프로를 보면서 남 욕을 안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아내의 눈치를 보다 보니 테레비를 볼 때 나도 아무 말을 하지 않게 되었고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내를 힐끔힐끔 관찰하게 되었다. 아내는 내 추임새는 무시하면서도 자신의 추임새는 곧잘 넣고 있었다. 아내도 테레비를 보면서 추임새를 넣는구나, 나는 그동안 아내의 추임새에 어떤 반응을 했었지? 안 했던 것 같았다.
“아이고, 불쌍해라. 저 부인하고 애들은 이제 어떻게 사나.”
“세상에, 저런 자식들도 있네. 부모가 지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먹고사는 일이 참 힘들지. 저 사람도 좋은 날이 와야 할 텐데.”
아내의 추임새는 주로 연민과 동정의 멘트였다. 여태까지 뉴스의 전반부 정치 내용이 나올 때는 주로 내가 추임새를 넣었고 후반부 잡다한 내용이 나올 때는 주로 아내가 추임새를 넣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내는 주로 가엾고 불쌍한 것에 기민하게 반응했다. 그러면서도 내 말은 무시하니 일면식도 없는 뉴스에 나오는 남 걱정은 하면서 나에 대한 배려는 없나 싶어 서운했다.
“아버지, 엄마 보청기 사 드려야겠어요. 엄마가 말을 잘 못 듣는 것 같아요. 입 모양을 보고 대충 이해하는 것 같던데. 마주 보지 않을 때는 엄청 크게 말해야 돼요. 저러다가 아예 안 들리게 되기 전에 보청기를 사 드려야겠어요.”
재훈이의 말을 듣고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그거였구나. 그래서 밥을 먹을 때는 종알종알 말을 잘하면서도 테레비를 보고 있을 때는 내 말에 반응이 없었던 거였구나. 하루종일 같이 있으면서 그것도 눈치채지 못했다니 이렇게 멍충할 수가. 좀 안 들리면 어떻냐고, 좀 안 들려도 멀쩡히 잘 산다고, 늙으면 다들 그렇다고, 뭐 하러 쓸데없이 돈을 쓰느냐고 아내가 강력하게 주장해서 보청기 구입은 유야무야 되었다. 어쩌면 아내는 짧은 파마머리 아래 남들에게 보청기를 보이느니 눈치껏 귀가 어두운 걸 감추고 사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아내가 정말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이 실감되면서 어릴 때 일부러 손목을 한참 꽉 잡았다 놓으면 정전기가 짜르르 통하는 놀이를 할 때처럼 마음이 짜르르 감전되었다.
아내는 테레비 볼륨을 한껏 올리며 새 테레비는 소리가 커서 좋다고 했다. 나는 테레비 자체도 좋았지만 막둥이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 좋았다. 재훈이는 재영이를 낳고 7년 만에 실수로 낳은 아들이다. 임신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하면서도 병원에 가서 검사할 생각은 않고 밍기적거리던 아내가 드디어 산부인과에 갔을 때 이미 16주라고 했다. 중절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꽤 위험하다고 했다. 5대에서 독자의 고리를 끊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성화도 있었고 나도 아들이 하나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은 하던 터라 낳자고 했지만 아내는 나의 정년퇴직 때 아기가 몇 살인지 아느냐고 근심했다. 나도 알았다. 고등학교 졸업도 못할 터였다. 그래도 낳고 싶었다. 외아들로 누나 둘, 여동생 하나와 자라고 살아오면서 졌던 짐을 재현이가 혼자 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누나들과 여동생은 내가 외아들이라 독차지한 것이 많다고 여길지 모르나 외아들이기 때문에 감당해야 할 것들도 많았다. 딸일지도 모르지만 아들일 확률을 믿고 싶었다. 재현이와 재영이가 온순하게 컸고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에 하나 더 키우는 게 많이 힘들 것 같진 않았고 공부에 신경 안 쓰면 숟가락만 하나 더 얹어 밥은 먹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고민하다 낳은 아들이 재훈이었다. 어릴 때는 우량아 대회에 나갈 정도로 뚱뚱하고 못생긴 것이 재현이나 재영이와 사뭇 달랐다. 그래도 제 복은 제가 타고난다는 말처럼 늦게 태어난 덕에 제일 여유롭게 자랐다. 메이커 옷, 새 자전거는 재현이와 재영이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애들 중 유일하게 학원도 보내줬는데 유일하게 공고를 갔다. 학원에서 유일한 재미는 컵라면을 먹는 거였다는데 그것도 모르고 거진 일 년을 학원에 보냈다. 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이 진학 상담을 할 때 고개를 갸웃하며 그랬단다. 너는 형, 누나와 다르구나. 공고에서도 상위권이 아니었던 재훈이가 집 근처의 대학을 갈 것이 명확해 보였기 때문에 나는 자가용을 살 수 있었고 공부를 못했어도 재훈이는 형과 누나와 달리 자가용을 타고 공고를 다녔다.
재훈이는 공고를 나와 집 근처에 있는, 멀쩡한 이름을 두고도 똥통이라 불리는 전문대를 갔다. 확실히 공부를 못하는 게 어설프게 못하는 것보다 나았다. 애매한 사 년제 지방대학을 갈 성적이 아니라 명명백백 이 년제 똥통 전문대를 갈 성적인 것이 다행이었다. 대학을 다녔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몇 번의 등록금을 내줬더니 졸업장을 받아 왔고 이내 취직을 했다. 인터넷 선을 깔거나 수리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회사 소속이지만 개인 사업처럼 일한 만큼 월급을 받는다고 했다. 남들은 주말을 쉰다는데 재훈이는 일요일만 쉬었고 일이 많을 때는 일요일까지 일했다. 공부 재미는 못 느끼던 애가 돈 버는 재미에 빠진 것 같았다. 사 년제 대학을 졸업하고도 부모에게 빌붙어 손 벌리는 자식들이 천지인데 이 년제를 나온 재훈이는 과거의 공부량이 아니라 놀았던 양만큼 빠르게 은행 잔고를 늘려 갔다.
좀 평탄하게 흘러가나 했더니 재훈이가 회사에서 독립을 하겠다고 했다. 평생 공무원이었던 나는 일단 말렸다. 좀 적게 벌더라도 안정적인 게 나았다. 괜히 독립했다가 생각처럼 일이 안 풀리면 우리 집 건물 일 층을 스쳐 간 식당들 꼴이 날 것 아닌가. 다들 자기는 다를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다. 남들과 다를 거라는 막연한 희망 속에는 실패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비 오는데 등산 갔다가 죽고 남들이 망해 나간 자리에 식당을 열였다가 원상 복구하는 것이다. 회사에 속해 있는 것과 사장이 되는 것은 아주 다른 일이라고 말렸지만 재훈이는 자신 있다고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일은 자기가 하는데 회사와 비율제로 나누는 돈이 아깝다고 했다. 그 돈 덕분에 안정적으로 오더가 떨어지는 거라고 타일러도 듣질 않았다. 스스로 오더를 딸만큼 밑밥을 깔아 놨고 독립해도 일정량의 오더는 여전히 회사에서 할당해 주는 시스템이란다. 말렸다가 평생 무슨 원망을 들으려고 하냐고, 자식한테는 져야 한다고, 그리고 어차피 말려 봤자 제 하고 싶은 대로 할 건데 괜히 부모 자식 사이만 나빠진다는 아내 말이 옳았다. 아내 말이 항상 옳았다.
실질적 필요조건은 아니었지만 나는 독립을 승인했다. 독립을 하려면 장비와 차를 마련해야 하는데 그것만 해도 일억 가까이 든다고 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일이 잘 안 풀려도 차는 팔면 절반은 건진다고 했다. 나를 안심시키려고 한 말이겠지만 전혀 효과는 없었다. 절반을 건진다는 말은 귀에 안 들어오고 만에 하나 일이 잘 안 풀리면만 귀에 쏙쏙 박혔다. 일억이라. 더 말렸어야 했나 싶었다. 일억을 날리고 후회하는 장면이 휙휙 지나갔다. 집에서 사천만 원을 가져갔고 일 년도 안 되어 가져왔다. 독립은 대성공이었다.
독립한 초기에 재훈이는 한 달에 이틀 정도만 쉬면서 정말 열심히 일했다. 아내와 내가 그러다 몸 망가진다고 말려도 악착같았다. 저런 정신으로 공부를 했으면 책상 앞에 앉아 펜대 굴리며 좀 편하게 살았을 것을 싶었다. 돈은 많이 번다지만 차를 타고 계속 이동하며 전봇대 같은 데 매달려서 하는 일은 여름과 겨울이면 특히 고돼 보였다. 여름에는 애가 새까매졌다. 땀을 얼마나 흘리는지 땀띠 때문에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게다가 일하면서 모기에 얼마나 물렸는지 밤새 박박 긁는 바람에 팔과 다리에 피딱지가 다닥다닥했다. 겨울이면 손가락이 동상 걸린 것처럼 붉게 부풀어 올랐다. 손으로 전선을 만져야 하기 때문에 다른 데는 다 가려도 손만은 찬바람을 그대로 맞아야 했다. 또 전봇대에 오르고 내릴 때 둔하면 위험하기 때문에 두꺼운 잠바도 맘껏 입지 못했다. 하필이면 봄가을은 짧았고 여름겨울은 길었다. 그렇게 몇 년간 정신없이 고생하더니 재훈이는 일억을 금세 벌충하고 돈을 꽤 모았다.
그런데 재훈이가 아니라 재훈이를 따라다니며 재훈이에게서 월급을 받는 형이 초인적인 노동량을 견디지 못했다. 그이도 사연이 많은 이라 여간 독하지 않았는데도 한 달에 하루 이틀 쉬면서 노가다를 뛰니 배겨 내질 못했다. 게다가 처음에는 돈을 많이 벌어 온다고 좋아하던 아내가 계속 이러면 같이 살 수가 없다고 화를 냈단다. 한 달에 하루 이틀 쉬면서 잠만 자는 남편에게 애가 아빠 얼굴 잊어버리겠다고, 아빠 없는 애 같다고 화를 냈단다. 그이의 하소연 덕분에 재훈이도 일주일에 하루는 꼬박 쉬게 되었지만 여전히 돈은 쏠쏠히 잘 벌었다.
학교 다닐 때까지는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 빼고는 하나도 기특할 게 없었는데 일을 하면서는 재훈이가 점점 기특해졌다. 게다가 아내 말처럼 재훈이는 나를 닮았다. 소식을 하는 대신 밥때를 거르지 않고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먹었다. 하고 싶은 말은 참지 않았고 마음먹은 것은 누가 뭐래도 했다. 재현이의 옥탑방과 달리 안방 바로 옆의 재훈이 방은 군대 내무반처럼 정돈돼 있었다. 나는 재훈이가 맘에 쏙 들었지만 아내는 재훈이를 어려워했다. 노래 교실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내가 또 같은 이야기를 한다.
“재훈이가 주는 생활비는 안 받고 싶은데 자꾸 주네.”
“왜? 그냥 받어.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뭘 그래.”
“아니, 재현이가 주는 돈은 맏아들이라 그런가 하나도 안 부담스러운데 재훈이가 주는 돈은 너무 부담스러워요. 생활비만 주나? 빵이며 과자며 재훈이는 비싼 것만 사 와요. 내가 사면 시장 가서 싼 거 살 텐데 재훈이는 메이커만 사니 비쌀 건데. 자꾸 사 오지 말라고 얘기하는 것도 그렇고. 오늘도 주문진에서 일 마친다고 올 때 회 사 온다고 카톡 왔어요. 엄마 밥하지 말라고.”
“그럼 오늘 저녁은 재훈이랑 같이 먹겠네. 재현이도 일찍 오라고 하지?”
“카톡 보냈어요. 일찍 온대요. 당신 막걸리랑 청하 남은 거 있냐고 있냐고 묻던데요.”
토요일도 아닌데 재훈이가 밥을 먹으러 집에 온다니 기분이 좋아졌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댔나. 낳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낳았고 공부도 지지리 못해 공고를 간 막둥이가 우리 부부를 얼마나 위하는지 기특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재훈이가 아파트를 사서 나가겠다고 두 번째 독립 선언을 했을 때, 첫 번째 독립 선언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오래 말렸다.
일단 대출을 끼고 아파트를 산다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빚이라면 평생 져 본 일이 없는 우리 부부다. 재영이가 서울서 학교 다닐 때 방 때문에 그렇게 고생고생해도 돈을 빌려서 살 만한 방을 얻어줄 생각은 안 했었다. 그런 마당에 멀쩡히 살 집이 있는데 빚을 내서 아파트를 사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 저는 아파트 꼭 사고 싶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고 싶었어요. 살다가 나중에 주택 연금으로 돌릴 거니 노후 대비도 되고 좋잖아요. 대출한 거 일 년이면 갚을 수 있으니 걱정 마세요.”
“야, 일이란 게 항상 잘 되는 게 아니야. 지금은 니 일이 잘 되니까 이자며 원금이며 다 쉽게 갚을 수 있을 것 같지만 혹시라도 일이 줄어 봐라. 빚처럼 무서운 게 없는 법이야.”
재훈이의 아파트 독립을 반대하며 내가 주력으로 내세운 이유는 쓸데없이 빚을 진다는 것이었지만 사실 더 큰 이유는 재훈이를 곁에 두고 싶어서였다. 내가 살아 있는 한은 재현이와 재훈이를 곁에 두고 싶었다. 장가를 간다면야 아무리 곁에 두고 싶어도 춤을 추며 보내주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같이 살고 싶었다.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냐는 말이 노인네들이 겸연쩍게 뭘 바랄 때마다 쓰는 입에 발린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장가도 안 간 아들들을 보고 싶을 때 못 보고 산단 말인가.
물론 보고 싶다는 이유도 거짓은 아니지만 실상 더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같이 사는 아들들은 내 방패였다. 나를 향해 뾰족해진 아내가 나를 찌르지 못하도록 아들들이 막아 주었다. 아들들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아내는 굉장히 달랐다. 반찬이 달라지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지만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냉동실에 얼렸던 딱딱한 떡을 렌지에 돌리면 말랑말랑해지듯 아들들이 없을 때는 얼린 떡 같은 아내가 아들들이 있으면 말랑말랑해졌다. 이를 테면 아들들이 없을 때는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자꾸 아프다고만 하면 나더러 어떡하라는 거냐, 나도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다고 짜증을 내다가도 아들들이 있을 때는 아프면 병원에 가 보자고 점잖게 한 마디 했다. 또 자기는 답답해 죽겠는데 왜 자꾸 창문을 닫느냐고, 정말 온도가 안 맞아서 못 살겠다고 짜증을 내다가도 아들들이 좀 썰렁한 것 같다고 하면 환기 다 됐다면서 얼른 창문을 닫았다. 아들들도 제 엄마가 그런다는 것을 아는 건지 슬쩍슬쩍 나에게 묻기도 했다. 아버지, 뭐 드시고 싶은 거 없어요? 제가 엄마한테 해 달라고 할게요.
회사 독립처럼 아파트 독립도 결국 재훈이 뜻대로 되었다. 재훈이는 대출을 내서 아파트를 사면서도 천만 원 넘게 들여 리모델링을 싹 했다. 나와 아내는 물론 재현이도 못마땅했으나 돈을 대 주는 것도 아니면서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라는 아내의 엄명에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말은 바로 해야지 돈을 안 대 주는 게 아니라 못 대 주는 것이었다. 은행에 이자 주는 게 아까우니 집의 돈 가져가 쓰라 해도 부담스럽다고 싫다지, 그럼 은행 이자만큼 주고 가져가라니 그것도 싫다는데 내가 뭘 어쩌겠는가. 재현이도 똑같은 제안을 했었는데 은행 돈을 빌려야 하루라도 빨리 갚겠다는 경각심이 생긴다며 재훈이가 거절했단다.
나는 인테리어 공사가 끝나고 가구들까지 다 들였을 때 딱 한 번 재훈이의 아파트에 가 봤다. 스물네 평짜리 지은 지 좀 된 주공아파트인데도 안은 테레비에 나오는 부잣집 못지않았다. 벽이며 바닥이며 웬만한 가구들까지 모조리 흰색이나 밝은 색이어서 그런지 스물네 평짜리 치고는 아주 넓어 보였다. 삼 단계로 밝기 조절이 된다는 거실 천장의 등은 외관도 고급스러웠고 우리 집 안방에 있는 침대만 한 테레비가 재훈이네 거실에도 쌍둥이처럼 있었다. 겨울에 이사를 했는데도 비싸 보이는 에어컨이 미리 거실 구석에 서 있었는데 무풍이라 바람 느낌이 없고 인공지능인가로 사람의 움직임을 추적해 가장 시원하게 해 주는 거라고 했다. 때가 잘 탈 것 같은 연한 베이지색 소파가 있었고 세트로 놓인 테이블 위에는 새로 산 듯한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필요한 것만 딱딱 있는, 제 성격처럼 깔끔하고 해가 잘 드는 좋은 거실이었다. 거실에서 부엌으로 이어지는 사이 공간에는 필요가 의심스러운 이상스럽게 생긴 조명이 천정에서 길게 내려와 있었다. 지나가면서 머리를 부딪칠까 봐 걱정을 했으나 인테리어 업자가 바보일 리는 없었다. 부엌에 들어서자 찌개 국물이라도 흘리면 큰일 날 것 같은 새하얀 식탁이 눈에 띄었고 안쪽에는 우리 집 냉장고 만한 역시 새하얀 냉장고가 있었다. 보통 가스레인지가 아니라 바닥에서 열기가 올라온다는 평평하고 희한한 가스레인지가 있었고 재영이가 백화점에서 사서 보내줬다는 냄비며 그릇들이 싱크대 안팎으로 정돈돼 있었다. 모든 게 새것이라 반짝반짝했다. 이런 집에서 살고 싶었는데 그동안 낡은 삼 층 건물의 방 한 칸에서 살았던 거구나 싶었다.
재훈이 혼자 살 집인데도 방은 세 개나 있었다. 제일 작은 방은 옷방이었다. 노총각 아들인 연예인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에서 흔히 보던 방이었다. 옷방이 따로 있어야 될 만큼 옷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었는데 연예인만 그런 게 아닌 모양이었다. 천정까지 봉이 닿은 옷걸이와 문 없이 칸막이만 있는 옷장이 각각 한쪽씩 벽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봉 옷걸이에는 종류별로 옷이 죽 걸려 있었다. 반팔티며 긴팔티, 바지들이 새로 산 크레파스처럼 위아래 선이 일직선으로 맞춰져 걸려 있었는데 똑같은 옷을 왜 저렇게 여러 개씩 샀을까 궁금했다. 아내 말로는 그게 다 조금씩 다른 거라고 했는데 내 눈에는 똑같아 보였다. 옷장에 문이 없으니 먼지가 다 묻을 것 같았지만 뭐가 어디 있는지 한눈에 보여서 요즘에는 다 그런 옷장을 붙박이로 설치한단다. 제일 큰 칸에는 이불이 가득 있었는데 친구들이 놀러 올 때를 대비하여 손님용 이불을 구비해 둔 것이었다. 아내는 안 쓰게 된 이불들을 버리지 않고 깨끗이 빨아 모아 놨다가 재영이나 손님들이 오면 내어 주는데 재훈이는 손님용 이불도 아예 새것으로 장만한 것이었다.
“와, 재훈아, 우리도 언제 한 번 여기 와서 자 봐도 되나? 다음에 재영이랑 민서 오면 여기 와서 다 같이 한 번 자도 되나?”
와와 감탄사를 연발해서 속이 없어 보이는 재현이가 물었다. 재현이도 이런 아파트를 사서 독립을 하고 싶은데 우리 때문에 꾹꾹 참고 사는 것인가 문득 불안해졌지만 재현이 같은 짠돌이가 멀쩡한 옥탑방을 놔두고 그럴 리가 없었다. 옥탑방에 있는 문짝이 덜렁덜렁하는 옷장 하나를 안 바꾸는 재현이가 갑자기 기특해졌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젊었을 때 산 옷장을 손자인 재현이가 여태 쓰고 있었다. 아내 말로는 밖에 내놔도 아무도 안 가져갈 옷장이랬다.
다음 방은 컴퓨터 방이었다. 마흔이 넘었어도 게임을 좋아하는 재훈이는 새 집에 걸맞은 새 컴퓨터와 불빛이 번쩍번쩍하는 요란한 자판을 새로 샀다. 기역 자 책상 위에 기계들이 죽 늘어서 있었는데 그게 다 컴퓨터인지 다른 기계들이 섞인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제 방에 있던 컴퓨터는 엄마 유튜브 볼 때 쓰라고 두고 간다고 했다. 컴퓨터 방에는 딱 컴퓨터만 있었다. 옷방, 컴퓨터방이라니. 재현이방, 재훈이방처럼 방 이름은 사람의 이름으로 지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제일 큰 방이 비로소 재훈이방이었다. 세 명이 자도 넉넉할 것 같은 엄청나게 큰 침대가 진한 남색에 줄무늬가 있는 이불로 각 잡혀 덮여 있었다. 침대 옆 작은 테이블에는 스탠드와 막대기가 꽂힌 방향제가 있었고 작은 장식장 위에는 스킨이며 로션 그 밖의 작은 병들이 몇 개 놓여 있었다. 옷방이나 컴퓨터방보다 놓여 있는 가짓수가 적어선지 사람이 사는 방 같이 않게 비현실적인 방이었다. 그냥 장식용, 보여주기용 방이랄까. 실제로 가 보지는 않았지만 뉴스에서 본 아파트 모델하우스 같았다. 리모델링에만 천만 원 정도 들었다고 했는데 침대며 에어컨이며 냉장고며 다 새로 사는 데도 그 정도 돈이 들지 않았을까 싶었다. 살면서 돈을 벌어 하나하나 사면 될 것을 빚을 내서 꼭 이렇게 새것들을 한꺼번에 사야 했는지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나 대신 아내가 한 마디 했는지 부엌 쪽에서 재훈이의 말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살 거 한꺼번에 사야 딱딱 어울리게 살 수 있어. 그리고 이사한 다음에 하나씩 하나씩 사면 매번 청소하고 치우고 번거롭잖아. 내가 열심히 벌어서 대출 낸 거 빨리빨리 갚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마지막으로 화장실을 보았다. 샤워기에는 투명 유리 칸막이가 쳐져 있었다. 재훈이가 샤워기를 틀어 보였는데 물은 유리칸막이 밖으로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화장실 바닥에 물이 튀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칫솔 소독기라는 처음 보는 물건과 병원에서 본 비데가 설치되어 각종 스위치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고 드라이기와 샴푸 린스 등이 음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방 같은 화장실을 보니 옛날 바닷가 집에 살 때의 푸세식 변소가 생각났다. 물장수가 썼다는 양팔저울 같은 똥지게를 내가 직접 지고 똥을 퍼서 밭으로 날랐던 변소였다. 소도시의 변두리에 살면 산골 마을과 별 차이가 없어서 웬만한 구식에는 이골이 난 나도 똥을 퍼서 나르는 일만큼은 고역이었다. 양쪽 양동이에 똑같은 양의 분뇨를 담고 지게의 정중앙이 딱 뒷목에 오게 비율을 정확히 맞춰야 했다. 아무리 애써도 내가 지나간 길에는 분뇨가 질질 흘렀다. 똥과 오줌 중 똥이 더 많아야 되직해서 줄줄 흐르지 않을 텐데 오줌은 변소 말고 마당의 텃밭에서 누라는 훈시를 아이들은 자꾸 잊었다. 그러다 보니 변소에서 퍼낸 분뇨가 너무 묽었고 지게가 조금만 흔들려도 찰랑찰랑하던 것이 넘치곤 했다. 여름에 변소에 앉아 땀을 줄줄 흘리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구더기들이 꼬물꼬물 기어 다녔고 몇 놈은 탈출하여 변소 바닥을 기어 다녀서 아이들을 질겁하게 했다. 재영이는 생리를 시작하자 화장실을 잘 못 가서 애를 먹었다. 아무리 가족이지만 다음 사람이 변소에 갔을 때 제가 흘린 피를 보는 걸 못 견뎌했다. 아내가 요강을 놔주고 치워주겠다고 해도 재영이는 많이 울었다. 아이 셋이 한겨울에도 수돗가에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던 때였다. 막내 재훈이는 얼굴과 머리통이 얼얼해서 그런지 비누를 제대로 헹구지도 않는다고 아내는 노상 타박이었다. 온수를 연탄불로 뎁히느라 겨울 내내 분주하고 불편했던 아내는 언젠가 한 번은 이놈의 집을 뜯어고치리라 벼르고 있었다. 재영이 덕분에 어느 날 화장실이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학교도 물은 내려지지만 아직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볼일을 보던 반수세식 화장실일 때라 의자처럼 앉아서 똥오줌을 누는 좌변기는 센세이셔널한 물건이었다. 그랬던 기억이 생생한데 재훈이 집 화장실은 또 차원이 달랐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신혼여행 때 딱 한 번 가 본 호텔 화장실 같았다. 옷과 컴퓨터가 방을 한 칸씩 차지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슬리퍼가 없어도 될 것 같은, 방이나 거실과 똑같이, 어쩌면 더 깨끗한 화장실이 가장 놀라웠다.
그 후로 나는 재훈이 집에 다시 가 보지 않았다. 재훈이가 주말마다 오는데 우리가 가서 불편하게 할 필요가 없다는 아내의 말을 모두 고분고분 들었다. 다만 재현이는 재영이와 민서가 오면 곧장 재훈이 집으로 쌩하고 데려가는 걸 보면 동생의 새 집에 많이 가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재훈이는 주로 토요일 저녁을 집에 와서 먹었다. 우리 부부와 재현이, 재훈이가 다 모이는 시간이니만큼 상차림이 가장 푸짐했다. 재훈이가 회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종류든 고기가 상에 올라왔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고기를 씹는 게 불편해졌다. 유독 이가 속을 썩였던 아내는 마흔 줄에 벌써 전체 틀니를 했다. 속상할 법도 했지만 치통에 얼마나 시달렸던지 아내는 속이 다 후련하고 편하기만 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내는 지금도 고기를 잘근잘근 잘 씹는다. 유독 이가 튼튼했던 나는 이제 겨우 임플란트를 두 개 했다. 내 이가 많긴 하지만 임플란트에게 자리를 내줄 날만 기다리는 허약한 것들이라 고기를 씹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두 아들들이 고기를 좋아하니 토요일 저녁은 항상 고기였고 아내는 어린애에게 하듯 내가 먹을 고기를 가위로 잘게 썰어 앞접시에 놓아주며 세월아 네월아 하며 내가 너무 많이 씹어서 고기가 더 질겨진다는 희한한 논리를 펼치곤 했다. 어쨌든 나로서는 고기가 별로 달갑지 않지만 아내가 뭐라 하지 않을 만큼은 눈치껏 씹어 삼켰다.
그런데 오늘 저녁은 토요일도 아닌데 재현이와 재훈이가 집에서 밥을 먹는다니 좋다. 월급쟁이가 예상치 못한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다. 게다가 오늘은 재훈이가 회를 사 온다니 더 좋다. 주문진에서 갓 떠오는 싱싱한 회에는 막걸리보다 청하지.
“재현 엄마, 청하 남았나?”
“딱 한 병 있던데요. 한 병 남았다고 했으니 아마 재현이가 더 사 올 걸요. 술 사 오는 건 효자 아니래도 말을 안 들어요.”
기분이 더 좋아져서 아내가 좋아할 법한 말을 해 본다.
“재훈이는 회도 안 먹으면서 뭐 하러 회를 사 온대? 재훈이는 뭐 먹나?”
“아버지 좋아한다고 사 오는 거지 뭐. 자기는 괜찮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던데요. 그래도 불고기 재워 둔 거 있으니 좀 볶으면 돼요. 걘 뭐 얼마 안 먹어서.”
“내가 마트 가서 상추랑 깻잎 사 올까?”
“무릎 아파서 한 발짝도 못 걷는 양반이 무슨. 내가 이따가 사 올 테니 신경 쓰지 마요. 오늘 새참은 재영이가 보내준 과자 먹어요. 지난번에 당신이 맛있다고 한 과자 택배로 네 박스나 더 보냈어요. 뭐 맛있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지. 카스테라도 맨날 보내고 민서한테 돈이 많이 들 텐데....”
키울 때는 힘들었는데 다 키우고 나니 다들 효도를 한다. 클 때는 서로 하나 더 먹겠다고, 서로 아랫목에서 자겠다고 그렇게 아웅다웅하더니 이제는 서로 다투어 효도를 한다. 아내 말마따나 자식들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닐 게다. 내가 도와주지도 못했는데 아내가 자식 농사를 잘 지었다. 재현이와 재훈이가 장가를 안 간 거나 재영이가 저렇게 혼자 민서를 키우는 게 맘이 짠하지만 우리 내외가 죽고 나서도 셋이 올망졸망 우애 있게 살아나가면 되겠다 싶다. 마트 가는 김에 애들 좋아하는 콜라라도 사 오라고 아내에게 만 원이라도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