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도돌이표에 부딪친 음표처럼 이 집으로 돌아왔다. 재훈이까지 애써 샀던 아파트를 전세로 주고 합류했다. 그 옛날 이 동네에 살던 이웃들은 이제 없지만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바다와 좁은 이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다시 이웃이 되었다. 남편과 결혼해 이곳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림을 시작했고 이십오 년을 살았었다. 재현이, 재영이, 재훈이를 모두 키워냈고 남편과 나의 어머니를 떠나보낸, 우리 부부의 역사박물관 같은 집이다. 한 사람의 목숨도 질긴데 목숨들이 모인 역사는 오죽할까. 이 집의 역사도 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주인공만 바뀌었다. 한때는 주인공이었던 우리 부부, 재현이, 재훈이는 이제 민서에게 주인공 자리를 넘겨주었다.
재현이와 재훈이, 민서를 모두 출근시키고 남편을 휠체어에 앉혀 밖으로 나섰다. 빈 유모차를 밀며 걸어 다니는 할머니들을 보면 딱해하던 나도 이제 휠체어를 미는 것이 걸음이 편한 때가 되었다. 덕분에 자기 다리로는 한 발짝도 밖으로 다니지 못하는 남편도 매일 바깥바람을 쐬게 되어 삶은 행주처럼 하얗던 얼굴에 제법 혈색이 돌게 되었으니 이런 것도 일석이조랄까. 아직 개장하지 않은 해수욕장 입구에 휠체어를 세우고 그 옆의 벤치에 앉았다. 해수욕 철이 아니더라도 이른 아침이 아니면 앉을자리가 없을 만큼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자판기에서 밀크 커피 두 잔을 뽑아 남편에게 한 잔 건넸다. 바닷물을 한 숟갈 얹어 주는 것도 아니면서 바닷가 자판기 커피값은 비싸다. 하지만 이제 커피값 천 원 정도는 선선히 쓴다.
애들 키우며 이곳에 살 때는 바다를 쳐다본 적이 없었다.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바다에서 생계를 잇는 이웃들이 명태 몇 마리를 공짜로 던져 줄 때만 바닷가에 사니 좋다고 잠깐 생각했을 뿐이다. 그랬는데 서울 사람들이 왜 기를 쓰고 바다를 보러 여기까지 오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눈앞을 반짝이는 푸른빛으로 가득 채우고 따뜻한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을 맞으며 멍하고 앉아 있다 보면 슬픔이 비워지고 그 자리에 시간이 채워졌다. 그래서 요즘은 하루 두 번씩 남편을 밀고와 바닷가에 앉아 있곤 한다.
달라진 점은 또 하나 있다. 재영이 자리에 민서가 들어온 것이다. 재영이는..... 이제 없다. 평소에도 말이 없던 재영이는 떠날 때도 그랬다. 민서가 의대 졸업을 코 앞에 뒀을 때였다. ‘잊을 수 없는 기억들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민서 아빠를 만나 살고 헤어지면서 모두에게 너무 미안했다, 나는 이제 편해질 테니 조금만 슬퍼해라, 민서를 부탁한다. 민서가 제 아빠를 미워하지 않게 해 달라’가 끝이었다. 민서에게 남긴 글은 더 짧았다. ‘네 덕분에 지금까지 살 수 있었다. 좋은 의사가 돼라. 아빠를 미워하지 말아라. ’
우리 모두 재영이가 남긴 말 중에 마지막 말은 아직 지키지 못하고 있다. 민서는 제 아빠가 있는 서울에서는 숨을 쉴 수 없다며 이곳으로 왔다. 어쩌면 재영이는 그것까지 예상하고 떠나는 시기를 정한 것 같기도 하다. 우리나라 최고의 의대를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성적으로 졸업한 민서는 그 대학의 병원을 마다하고 사천 바닷가에 있는 아산 병원에서 인턴을 거쳐 레지던트 과정을 밟고 있다. 곧 전문의 시험을 볼 거고 곧 정신과 의사가 될 테다. 그때도 민서는 바다가 보이는, 제 엄마가 나고 자란 집에서 계속 살려고 할까. 이제 그만 서울로 가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대학병원에서 의사로 승승장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저 어린것이 엄마도 없이 혼자 서울살이 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마음이 짠하다. 서울서 혼자 살다가 재영이처럼 될까 봐 불안하기도 해서 저를 위해서라면 심장도 꺼내 줄 외삼촌들 곁에서 그냥 있었으면 싶기도 하다. 불 꺼진 집에 혼자 들어가는 민서를 생각하면 재영이를 태우던 순간처럼 나도 숨을 쉴 수가 없다. 제 엄마가 떠난 지 육 년이 지났는데도 민서는 여전히 쉬는 날이면 하루종일 바다만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다. 민서도 우리처럼 바다에다 슬픔을 퍼다 버리는 것일 게다.
재영이가 죽어야 할 만큼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제는 말할 기력도 없는 남편에게 이 질문을 혼잣말하듯 던졌을 때 남편의 눈동자가 일순간 번쩍 커졌다. 입술을 달싹달싹하며 뭔가 말을 하려는 기색이 있었지만 비에 섞여 녹아버리는 눈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남편 입에 귀를 갖다 댔지만 압력밥솥에서 배출되는 증기처럼 식식거리던 호흡도 이내 잦아들었다. 남편은 지금도 가끔 재영이 이야기만 나오면 눈동자에 벼락이 일고 목구멍에 힘이 들어간다. 뭔가를 말하고 싶어선지 그냥 마음이 괴로워선지 알 수 없는 반응이다.
민서는 확실히 그 기억들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 같다. 민서가 그랬다. 재영이는 암 수술을 받은 날 밤 정신이 오락가락할 만큼 고통에 시달릴 때는 물론이고 수술보다 더 괴롭다는 항암 치료를 받을 때도 단 한 번도 아프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고. 그래서 제 엄마가 암이란 걸 처음 들었을 때만 찔끔 울었고 그 이후로는 일까지 계속하는 엄마였기 때문에 암이라는 병의 무게를 몰랐다고. 그것이 두고두고 미안했다고. 그런데 고통 흡수 능력이 그토록 탁월했던 엄마가 밤이면 샤워기를 틀어 놓고 자주 울었다고. 물소리에 섞여서 하수구로 떠내려간 울음이 누구 때문인지는 뻔했기 때문에 궁금하지 않았다. 민서가 제 아빠를 장례식에서 보았을 때 엄마는 아빠 때문에 죽었다고, 절대로 아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악을 쓰지 않았더라도 알 만한 일이었다. 굳이 확실한 증거까지 들이밀자면 민서에게 아빠를 미워하지 말라고 재영이가 죽는 순간까지 당부했다는 것은 미워할 만한 일이 있었다는 뜻 아니겠는가. 내가 궁금했던 것은 바로 그 무엇 때문인지였다. 내가 모르는 놈팽이의 무엇이 더 있는가였다. 그러나 어미를 잃고 아비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민서에게 꼬치꼬치 물을 수는 없었다. 또 슬픔만으로도 쓰러질 지경인데 대답을 듣고 재영이를 방치한 죄책감까지 얹히면 버티지 못할까 봐 두렵기도 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우선 민서를 살려야 했다. 의대 졸업식에도 가지 않고 외갓집에 와서 재현이 옥탑방에 죽은 듯이 엎뎌 있던 민서에게 사천 아산 병원 이야기를 꺼낸 것은 재훈이었다.
“좋은 의사가 되랬잖아.”
말하는 법을 아주 잊지는 않았는지 민서가 말했다.
“외삼촌, 바닷가 집에 가보고 싶어.”
“밥 한 공기 다 먹으면 데려가 줄게.”
가끔 재영이가 민서를 데리고 외갓집에 오면 어느 외삼촌이든 둘을 차에 태우고 바닷가 도로를 달리곤 했다. 그러면 항상 바닷가의 낡은 집을 지나쳤고 민서더러 저기가 늬엄마 살던 집이라고 일러 주곤 했는데 민서가 살아날 기미를 보이며 처음 꺼낸 말이 바닷가 집이었다. 두 외삼촌은 민서가 바닷가 집 이야기를 꺼낸 지 반년 만에 이 집을 다시 샀다. 그리고 재훈이까지 온 식구가 모였다. 우리는 모두 손에 손을 잡고 민서를 에워쌌다. 재영이가 평생의 미션으로 삼고 혼자 하던 일을, 부족하더라도 우리 넷이 해보기로 했다.
제 엄마가 나고 자란 바닷가 집에서 가을과 겨울을 지내고 이듬해 봄 민서는 아산 병원에 들어갔다. 민서야 제가 졸업한 대학의 병원에 들어가는 것도 누워서 떡 먹기랬으니 이런 촌구석 병원쯤이야 쉬워도 아주 쉽다고 했다. 원래도 말랐던 아이가 가끔 코피도 흘리고 더 비썩 말라 갔지만 눈에는 점차 총기와 생기가 돌아오고 병원 갈 때마다 우러러보던 의사 선생님 꼴이 잡혀 갔다. 이 집과 바다가 민서를 쓰다듬어 일으켜 세워준 걸까. 그것보다는 시간의 힘이겠지. 시간을 이기는 기억은 없는 법이다. 재영이의 기억만 예외였던 걸까. 아니면 재영이도 더 살았다면 그랬을 텐데 그걸 몰랐던 걸까. 바보 같은 것, 바보 같은 것.
“외할머니, 저요, 원래 성형외과나 안과 전공하려고 했었어요.”
“그래? 근데 왜 정신과야? 외할미도 정신과는 좀 무서운데. 이상한 사람들만 치료해야 되는 거 아니나? 너는 대학도 좋은 데 나왔지, 성적도 좋았지, 아무 과나 다 갈 수 있지 않았나?”
“응, 맞아요. 그런데 엄마가 정신과를 권했어요. 엄마는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안 그러는 편이었는데 꼭 정신과 의사가 됐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내가 살아가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했어요. 엄마 없이 살아갈 때를 준비시킨 것 같아요. 엄마가 죽고 나서 제가 배운 지식을 총동원해서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했거든요. 제 첫 번째 환자는 엄마하고 저예요. 엄마는 어쩌면 그때 이미 다 결심하고 저한테 정신과를 권했던 것 같아요.”
모처럼 쉬는 날 우리 부부를 따라 바닷가 벤치에 앉아 자판기 밀크커피를 홀짝이던 민서가 웬일로 지 엄마 얘기를 꺼냈다. 바람이 불자 외할아버지 무릎의 담요를 어깨까지 끌어올려 주고 다시 커피잔을 드는 민서를 바라보는 내 눈이 흐릿해졌다. 재영이를 하나도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는데 민서의 옆모습에서 재영이가 보였다. 뿌연 시야 사이로 남편의 볼로 흐르는 눈물이 보였다. 나는 남편의 입을 닦아 주는 척하며 눈물을 슬쩍 닦아 주었다.
“외할머니.”
“응, 왜?”
“저 올해 레지던트 끝나잖아요.”
“그렇지.”
“저, 여기서 더 살고 싶어요. 외삼촌들은 그만 서울 가라고 하는데 좀 더 있고 싶어요.”
“외삼촌들 말로는 시작을 서울 병원에서 해야 쭉 서울서 있기 좋다고 하던데. 시골 의사 되믄 서울로 올라가기 힘들다고. 너 나온 대학병원이 젤로 좋다는데.”
“안 그래요. 아산 병원도 젤 좋은 병원이고 서울에도 아산 병원 있잖아요. 큰외삼촌 옛날에 눈 수술받은 병원요. 그리로는 가기 쉬워요. 여기 병원이랑 다 연결돼 있어요.”
“우리야 니가 여 있으면 걱정도 덜 되고 좋지만 한창 젊은 니가 이런 데 있긴 아깝지, 아까워.”
“여기 있으면 엄마랑 같이 있는 기분이 들어요. 아직은 서울 가서 혼자 못 살 거 같아요. 제가 진짜 의사 돼서 돈 많이 벌면 집에 일하는 아줌마 오게 할게요. 엄마가 외할머니 아직까지 밥 하는 거 보면 엄청 안타까워할 거예요.”
“별소릴 다한다. 그까짓 밥 하는 게 뭐 힘들다고. 의사 선생님 되는 공부에 비하면 암것도 아니지. 그래, 그래. 너 하고픈 대로 해라. 여기선 서울대 나온 의사 선생님이라고 하믄 깜빡 죽으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지 뭐.”
재영이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알았다. 가족은 살아서 내 곁에 있기만 해도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온전해진 민서를 세상에 심을 때까지는 외할아버지도, 외할머니도, 외삼촌들도 모두 제 역할을 해야 한다. 그 군단을 위해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내가 돼 줄 수 있다.
남편은 이제 밥상에 앉아 숟가락을 들고 화장실 출입만 할 수 있을 뿐 아무리 뿌리를 살려도 축 가라앉는 머리카락처럼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재영이가 가고 나서는 곧 남편도 죽지 않나 싶을 만큼 곡기를 넘기지 못하더니 민서가 옥탑방에 와 쓰러지자 남편은 기운을 내려고 애썼다. 애써 찾은 기운으로 겨우 한다는 일이 담배를 피우러 옥상에 뻔질나게 올라가는 거였다. 계단 한 칸 디디면 잠깐씩 쉬어야 되는 양반이 저렇게 계단을 오르내리다 큰일 나지 싶어 슬그머니 따라 올라가 보니 남편의 등이 보였다. 최소한의 부피로 줄어든 남편은 옥탑방 벽에 붙어 쪼그리고 앉아 민서의 기척을 살피고 있었다.
남편은 내가 그러하듯 재영이 죽음에 놈팽이 다음으로는 자신의 탓이 크다고 생각할 터였다. 그럼 우리는 함께 벌 받고 있는 공범인 건가. 뭐 크게 잘 사는 걸 바란 적도 없고 뭐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삶이 이렇게 기구해도 되는 건가 억울하다가도 두 아들은 장가를 안 갔고 딸 하나는 스스로 세상을 뜬 걸 보면 내가 죄 많은 부모지 싶다. 최선을 다해 부모 노릇을 했다는 건 내 착각일 뿐인가 보다.
재영이가 떠난 후로 악착같이 가둬 둔 탓에 통장 속에서 탈출할 날만 기다리는 노후 자금보다 남편이 더 믿음직스러워졌다. 아흔이 넘어 그야말로 죽을 날만 기다리는 남편이지만 같은 때 같은 바다를 보며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눈물을 흘리는 남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의지가 되는지 모른다. 아마도 얼마 후면 그 모든 것을 나 혼자 해야 할 게다. 그런 날들은 부디 짧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