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슬럼프 극복기
2022년 가을학기를 다니던 대학생 3학년 시절, 한 현대문학 강의에서 '스크립투리레(scripturire)'라는 개념을 배웠다. 한국어로는 '글쓰기-의지' 정도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말 그대로 글을 쓰고자 하는 의지, 글쓰고 싶은 마음을 의미한다. 글쓰고 싶은 마음을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글쓰기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스크립투리레는 글쓰고 싶은 마음을 글로 쓰고 있는 상황을 나타낼 때 쓰인다고도 한다.
스크립투리레라는 처음 들어보는 외국어 단어는 많이 낯설었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개념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당시 나는 글쓰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글을 블로그에 자주 올렸기 때문이다.
글쓰기 의지를 다지게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내게는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거나 못했을 때였다. 한동안 일상에서 글쓰기가 부재하게 되면, 글쓰기 의지를 새삼스럽게 다지고 글쓰기를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글쓰기를 중단하게 되는 시기가 종종 생겼으니, 그만큼 글쓰기 의지를 다질 일도 많았다.
글쓰기 의지를 다질 때는 그동안 글을 쓰지 않은/못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했다. 그 고민의 결과를, 앞으로는 다시 글을 자주 쓰리라는 다짐, 앞으로 어떤 글을 쓰려고 하는지에 대한 계획 등과 함께 블로그에 자주 올렸었다. 지금껏 블로그에 올린 포스팅들을 돌아보면, 곳곳에 글쓰기 의지를 표현한 내용이 들어가있다. 글쓰기 의지를 다지는 내용으로만 한 편의 포스팅을 완성하기도 했지만, 자질구레한 일상을 기록하는 포스팅 한 켠에 그런 내용을 군데군데 담기도 했다.
스크립투리레를 알게 된 때로부터 1년이 지난 2023년 가을학기, 오랜만에 글쓰기의 슬럼프를 크게 경험했다.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고 좀처럼 글쓰기에 의욕을 느끼지 못했다. 일상에서 글쓰기를 사라진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다가, 또 현대문학 수업을 듣다가 이번 슬럼프가 찾아온 이유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그 수업에선 '서정적 자아'와 '시적 화자' 그리고 '시적 주체'의 개념을 배웠다. 정말 간략하게만 설명하자면 '서정적 자아'는 작가와 동일시되는 개념이고(시에서 말하는 사람을 서정적 자아로 본다면, 시에서의 목소리는 곧 시인의 목소리로 이해되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극에서 무대에 선 중심인물처럼 시 내부의 한 인물로서 이해된다. '시적 주체'는 지속적으로 주체에 개입하는 타자(시의 경우 독자라고 생각하면 쉽다)에 의해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존재이다.
사실 세 개념은 시에서 발화하는 사람을 어떤 존재로 읽어낼 것인지에 대한 개념이며 셋을 매끄럽게 분리하여 적용할 순 없겠지만, 나의 시쓰기를 생각해보니 난 여태껏 '서정적 자아'로서의 '나'만을 내세운 시를 써온 것 같았다. 내 내면에서 재구성된 특정한 경험을 그에 대한 감정과 함께 시로 옮겼다. 난 시를 쓰는 동안 매번 화자를 나와 동일시했고, 특별한 경험이 고갈되면 시를 쓰지 못했다. 특정한 경험과 밀접하게 결부되지 않은 사유를 나와 분리된 다양한 주체를 내세워 표현해본 적은 크게 없는 듯했다. 그래서 본인의 자아나 경험과는 (완전히 무관할 순 없겠지만) 거리감 있는 주체를 내세워 시를 다작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했다.
시가 아닌 산문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어떤 형태의 글이 됐든 내게 중요한 건 글쓰기를 직접적으로 촉발시키는 특정한 경험이다. 다작하는 주변 친구들에 비해 구체적이고 특별한 경험 없이는 진득히 앉아서 글을 쓰지 못했고, 그래서인지 글쓰기의 빈도가 낮은 것 같았다. 게다가 같은 자극이 주어지더라도 그것을 특별한 경험으로 지각해서 적절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또 개인의 상태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결국 예민한 관찰력을 (의식적으로) 갖추(고자 하)느냐가 글쓰기의 양적인 빈도와 질적인 깊이를 결정짓는다는 조금은 뼌한 결론에 도달했다.
따라서 별 생각 없이 살게 되면 글쓰기의 슬럼프로 이어지는데, 그때가 생각을 꺼두고 둔감하게 살아가는 시기였다. 깊은 생각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특별한 사건을 포착하지 못했고, 특별하기 이전에 새롭게 느껴지는 사건조차 없는 무던한 4학년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기억 중 무언가를 새삼 특별하게 인식할 계기 또한 없었으며, 막연한 졸업 후 미래 걱정으로 과거 기억들을 돌아볼 여유나 의지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나마 과제를 위한 글을 쓰며 살아갔었는데 졸업을 앞두고 대학 생활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누군가가 이미 더 정교하고 깊게 생각해서 심지어 더 기깔난 문장으로 표현했을 것 같다는 무력감을 느꼈다.
당시의 내가 글을 수월하게 쓰려면 글감이 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 필요했지만, 특별한 경험은 원한다고 쉽게 생기지 않는다. 그래도 특별한 경험을 대체할 수 있는 걸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건 바로 좋은 문장이다.
좋은 문장을 읽으면 나도 글을 쓰고 싶어진다. 좋은 문장은 과거의 경험을 특별하게 느껴지도록 상기시키기도 하고, 깊은 사유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돕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러 종류의 글 중 가장 작은 호흡의 단위로 이루어져, 각각을 제일 적은 시간을 들여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건 시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글쓰기의 계기를 빠르게 되찾고자 시집을 읽었다.
결국 글쓰기 의지에 불을 지피는 한 편의 시를 곧 발견했다. 읽을 때마다 더욱 좋아지는 그 시는 백은선 시인의 「만나서 시쓰기」이다. 시의 전문을 옮긴다.
딸꾹질이 멈추지 않는다. 아주 오래도록 몇 번이나 한 장면을 돌려봤는데. 함께 소파에 앉아 밤이 새도록 도시의 설계도를 읽어내며 눈물의 집을 만들었는데. 믿을 것이 너무 많잖아. 그치. 각자의 방에서 가장 긴 실을 한 뭉텅이씩 가지고 오자. 너는 빨강 너는 초록 나는 검정. 우리 셋은 각자의 믿음을
각자의 방식으로 포갠다. 더 높아질 수 있을까? 더 두꺼워질 수 있을까? 건너편 산 위에 올라가서 봐야 할 정도로! 우리가 강을 건널 수 있는 배가 되면 좋겠어. 서로의 실을 섞어 바느질하고 매듭을 묶는다. 때론 엉켜버린 더미를 무릎에 올려놓고, 골몰하고 안도하며 아침이 올 때까지 거꾸로 된 책을 읽었다. 동시에 소리내어. 그럼 우린 시작으로 가득차고.
멈추지 마. 각자의 손에는 가위를 들고. 오후엔 바깥에 나가 거리, 사람, 나무, 구름 들을 오려가지고 돌아왔다. 봐! 구름에 나무가 심겨 있네. 사람의 눈에서부터 거리가 쏟아진다! 나는 입술을 오려 하얀 케이크 위에 붙였다. 무지개를 향해 촛불을 대신하는 건 중단된 피. 남은 몸은 바닥으로 쓸어버리고 뒤집힌 칼을 달 속에 심는다. 너는 빨강 너는 초록 나는 검정.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장면을 따로 또 같이. 늘 파도에게 팔다리를 달아주고 싶었어. 회전문 속엔 돌고 있는 프렌치프라이. 뒤집은 건 결국 뒤집지 않은 것과 같으니까 이건 아무 변형도 아닐걸? 너는 말한다. 괜찮아. 무언가를 바꾸려고 시작한 거 아니니까.
우린 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지. 사랑이 아닌 것도. 손이 바빠 머리가 멍해질 때까지. 우물거리며 고기와 와인을 먹고 커피를 마셨지. 나는 너희와 함께 있을 때 가장 똑똑해진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장면들을 돌려보며 팝콘처럼 터지는 웃음, 열매처럼 뚝 떨어지는 눈물. 계속해봐! 더 해봐! 서로의 등을 밀며 기차는 달린다. 너는 빨강 너는 초록 나는 검정. 모든 게 멋지고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하나의 옷을 돌려 입으며, 나는 가끔 무한히 길어질 수 있을 것 같아. 말하려는 순간 딸꾹질이 시작된다.
* 딸꾹질은 심장의 소리다. 입으로 쏟아지는 두근거림이다. 가끔은 모든 것을 능가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맞아 맞아, 가장 커다란 동의의 환호를 가득 매달고서.
「만나서 시쓰기」, 백은선
시 속 '너'와 같은 사람들이 내게도 있다. 어떤 장면을 나와 몇 번이고 돌려볼 수 있는 너희들이, 홀로 반복해서 봤던 장면들을 입 밖으로 꺼낸다면 다른 방식의 회상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준 너희들이, 함께 혹은 나 대신 웃음을 터뜨리거나 눈물을 흘려주는 너희들이 시를 읽는 동안 떠올랐다.
장면을 함께 돌려 본 너희들은 각자의 말들을 덧붙임으로써, 혹은 이어서 너희들도 비슷한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내가 간직했던 장면은 함께 돌려보는 도중 재구성되고 섞이고 뒤집힌다. 그런데 그게 현실에서 어떤 변화로도 실감되지 않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현실을 바꾸는 것은 목적이 아니고 불가능할 뿐더러 장면이 타인 앞에서 장면이 재상영되는 순간이 중요한 걸 테니까.
이제는 어떤 경험이 내게 새로운 장면으로 자리잡게 되면 너희들을 만나 그 장면을 같이 돌려볼 생각을 먼저 하게 되고, 너희들과 대화 나눌 시간을 상상하면 내 입에서도 딸꾹질이 시작된다. 시를 읽었다고 당장 딸꾹질이 시작된 건 아니지만 딸꾹질을 하던 그때의 두근거림이 떠올랐다. 뭐라도 돌려보고 싶고 말하고 싶고 우선 너희들을 만나고 싶어졌다.
이런 감상들을 일기장에 적어내며 오랜만에 글을 쓰는데, 신기하게도 마침 연락이 먼저 와서 오랜만에 ‘너희들’ 중 한 명을 만났다. 산책을 하고 대화를 했다. 많은 말을 했다. 한 번 말의 물꼬를 트고 나니까 이어서 말하고 싶은 것, 글쓰고 싶은 것이 꽤나 많이 발견됐다.
그날 밤엔 오랜만에 독서등을 켜고 늦게까지 일기장을 마저 글을 썼다. 나중에 더 완성된 글로 쓰고 싶은 소재들을 일기장에 몇 십 분이고 적어냈다. '너'와 산책 중에 대화 나누었던 주제, '너'와 대화 나누며 떠오른 과거의 기억들, '너'가 글쓰기의 의욕을 잃어버린 나에게 해주었던 위로, 이런 것들이 모두 글감이 되었다. 물론 글쓰기 슬럼프를 경험하고 극복한 이 경험 자체가 또 한 편의 글이 되어 블로그에 올라가기도 했다. (그 글을 조금 수정해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이제는 글쓰기 슬럼프를 맞게 되면, 초조함을 갖는 대신 그저 좋은 문장을 찾는다. 좋은 문장을 찾는 특별한 방법은 따로 없다. 평소 하던 대로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보고 싶은 영화를 본다. 와닿는 문장을 보면 그 문장이 좋은 이유를 생각하며 일기장을 펼친다. 그 생각들은 대체로 나중에 더 좋은 글로 거듭나는 훌륭한 소재가 되어준다. 물론 그 생각들을 일기장에 기록하는 것 자체로 글쓰기 의지를 실현하게 되는 셈이기도 하다.
(마침 브런치북 연재일을 놓치고 글쓰기에 소홀해진 차에 ‘글쓰기 의지 다지기’를 쓰며 글쓰기 의지를 다시 다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