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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fessor Sunny Sep 09. 2021

부모됨

어린 시절 이야기

나는 2015년에 아이를 낳으면서 엄마가 되었다. 이 아이의 예정일은 내가 박사과정을 마치고 졸업식을 하는 날이었는데, 다행인지 이 아이는 그 이후로도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임신 중 40키로가 넘도록 살이 쪘는데, 그 남산만 한 배를 이끌고 졸업 단상에 올라가서 학위를 받았다.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살이 쪘는데도, 아무런 검사도 안 해줬냐며 미국 병원이 신기하다고 했었다.


아이란 존재는 참 신기하다. 옛날 어른들이 애를 낳아봐야 진짜 어른이다라고 했는데, 글쎄… 그 말까지는 아직 크게 느껴지지 않지만, 적어도 아이를 낳기 전과 후의 생각의 틀이 바뀐 건 확실하다. 아직 신생아이던 이 아이의 존재를 물끄러미 쳐다볼 때, 나는 이상하게 내 부모의 부모됨과 태도를 가만 반추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그런 시간은 불현듯 나의 부모님을 그리워했다가, 또 갑자기 불현듯 우리 부모님이 그때 나한테 왜 그렇게 했을까, 혼자 이랬다 저랬다를 반복하는 일이 많았었다. 아마도 아직 호르몬이 정상이 아니었던 듯싶다.  


내가 아이에게 하는 태도도 부모님이 나에게 했던 영향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보고 자란 건 무시 못한다..라는 말이 맞긴 하겠지. 나 스스로 부모됨을 준비할 때  ‘부모’라 하는 가장 가까운 모델이 내 부모님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아이가 자람에 따라, 내가 기억하는 내가 3살 때의 내 부모, 4살 때의 부모 그때는 어땠나… 생각해본다.  


내 아이가 이제 한국 나이로 7살이 되었다. 나는 7살 즈음 기억이 꽤 난다. 그즈음에는 아마도 동생이 태어났기도 했고, 올림픽도 크게 했고 즐거운 일이 많았었던 거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버지에게 정이 굉장히 많다. 나는 외형적으로도 성격적으로 아버지를 참 많이 닮았다. 나의 김 씨 아버지는 굉장히 부지런한 사람이다. 나는 그 부지런함을 그대로 받았다. 태어난 사람의 습성은 잘 안 바뀌는데, 이런 성실한 삶에 대한 습성이 내게 유전자로 장착되어 있는 것은 굉장히 감사한 일이다. 동생은 나에게 노예근성이 다분하다고 말했었지.


26살에 유학을 떠나, 혼자 지낸 시간이 많은 나에게 종종 그리웠던 존재는 아버지였다. 남편이 아직도 가끔 이야기하는 일화가 있는데, 우리 연애시절 뉴저지의 한 분식집에 앉아 떡볶이를 먹다가 나는 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사람을 구경했나 보다. 한 아저씨가 굉장히 나의 아버지를 연상하게 만드는 외형이셨는데, 저 멀리 앉아서 혼자서 순대를 열심히 드시고 계셨다. 나의 아버지는 드실 때도 츤데레 (?) 느낌이 나는데, 그 터프하게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까지도 우리 아버지와 똑 닮아있었다. 나는 ‘준비 땅’ 할 시간도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남편은 ‘무슨 일이야, 여기서 왜 이래’ 라며 황당해했더랬지. 나는 ‘저 아저씨가 순대를 우리 아빠처럼 먹어’ 하면서 울어댔다. 황당해하며 눈물이 잦아들기 기다리던 남편도 나와 똑같이 유학 중이던 시절이라 결국에는  ‘나도 엄마가 보고 싶다’라고 말했던 거 같기도 하다.   


7살쯤 우리 집에는 차가 없었다. 아빠랑 언니랑 나는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다시 버스를 타고, 서울 후암동에 있던 친가에 자주 갔었는데, 지금 내가 엄마가 되어서 생각해보니, 아빠 혼자 자녀 둘을 데리고 대중교통을 그렇게 갈아타며 가는 게 굉장히 피곤한 일이었을 거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깜깜한 밤에 아빠는 서울역에서 기차 시간이 촉박하다고 하는데, 나는 너무 화장실이 급했다. 후암동에서 서울역으로 가는 버스 안이었는데, 나는 ‘아빠 쉬 마려워’를 계속 반복했고, 아빠는 버스를 내리자마자 나와 언니의 한 손씩 붙잡고, 그 동네 가게들에 화장실이 있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불이 정말 어두침침한 어떤 오락실 맨 안쪽에 수세식 화장실을 찾았는데, 아빠가 ‘찾았다’하며 좋아하셨다. 나는 그 깜깜한 화장실 안에 들어가는 게 너무 무서웠는데, 결국 들어가 쉬를 싸면서도 “아빠, 거기 있지? 가지 마”라고 끊임없이 외쳤다. 아빠는 계속해서 “응” 하고 대답을 해줬다. 그 “응” 하는 아빠의 목소리가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내가 6살쯤 되는 해에, 집이 좀 어수선했었다. 우리 네 가족은 서울에서 지금의 일산과 가까운 능곡 쪽으로 이사를 고려하고 있었다. 그때의 능곡은 일산이 생기기 전 나름 그 지역 교통의 허브였다. 아빠는 한 날은 나를 본인이 가는 목욕탕 남탕에 데려가서 때를 박박 벗기더니, 또 한 날은 나와 버스에 버스를 갈아타고 새로 이사 가는 동네 탐방을 떠났다. 아빠는 그때 별로 말을 안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렸던 그때의 아빠도 머릿속이 참 복잡했겠지 싶다. 서울에서 촌으로 이사를 가려니 머리가 아팠겠지. 아빠는 능곡역 앞에 있는, 바람에 발이 예쁘게 흔들리던 중국집에 들어가서 짜장면을 하나 시켜놓고는 그 사장님께 이것저것 물었다. “사장님, 여기서는 신평리로 가는 버스 어떤 게 있나요? “그 버스는 얼마나 자주 오나요?”  나는 조용히 짜장면을 먹고 있었다.


내가 성장하고 보니, 아빠가 우리를 키우면서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를 곰곰이 돌아보기도 한다. 지금은 나와 남편과의 대화에서 ‘우리 아이는 잘 크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라는 주제가 메인이다.  우리 부부는 그 아이가 머릿속에 꽉 차있다. 특히 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 부부가 이민 1세대로, 주변에 다른 가족이 없이 아이를 키우고 있어서 ‘우리가 제대로 이 이민 2세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심은 필수로 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내 어릴 적 기억을 돌아볼 때, 또 남편도 나름 본인의 부모님과 겪은 경험을 토대로, 우리 아이가 자신의 7살 때의 부모의 모습을 어떻게 기억할지, 나의 어떤 태도, 어떤 모습이 그 많은 날들과 모습 중에 기억에 남을지 생각하면… 나와 남편은 솔직히… 무섭다. 내가 아이에게 하는 많은 행동에 백 번 생각하고 할 때가 많겠지만, 화냈던 한 번의 모습이 그가 인지한 엄마로 기억되는 것은 아닐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나 나름대로 괜찮은 ‘엄마’상으로 기억되고 싶은 욕심이 있나 보다.                


(그때 먹던  순대 by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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