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콰도르- 바뇨스
바뇨스로 가는 길에 본 풍경은 안데스 산맥의 줄기를 따라 여행하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해주었다. 구름과 맞닿은 숲, 산비탈에 지어진 집들, 까마득한 봉우리를 뒤덮은 눈이 버스 창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바뇨스에 도착하자마자 숙소에 짐만 두고 '악마의 폭포'로 가기 위한 마을 버스를 탔다. 키토에서 취한 휴식 덕에 남편은 눈에 띄게 회복한 상태였다.
우리는 악마의 폭포를 보기 위해 바뇨스에 딱 하루만 머물 예정으로 온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폭포 뿐 아니라 마을 자체가 우리 맘에 쏙 들었다. 사방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아름다운 산이 보이는, 깨끗하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시간만 더 있었으면 한 며칠 더 지내고 싶다, 그렇지?"
"그러네. 기대 이상인걸?"
남미는 워낙 크고 볼거리도 많다 보니 우리가 계획한 세달은 실로 굉장히 빡빡한 일정이었다. 때문에 바뇨스처럼 좀더 오래 지내 보고 싶은 도시를 만나면 아쉬운 맘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주어진 시간 안에 최대한 목표했던 걸 놓치지 않고 해나가며 알차게 이 여행을 채워가려고 노력 중이다.
여행을 하면서 하고 싶었던 일들을 목록에서 하나씩 지워가는 동시에, 한편으론 새로운 목록이 생겨난다. '이번엔 이걸 했으니 다음에 다시 오면 저걸 한번 해보자!'이런 식으로 말이다. 아마 죽기 전까지 이 목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여행도 계속될 것이다.
버스는 악마의 폭포 입구에 우리를 내려준다. 입구에서부터 10분 가량 산길을 걸어가면 매표소가 나온다. 그리고 폭포로 들어가면,
"우와.."
입장을 하자 순간적으로 두려움이 엄습했다. 폭포는 아직 보이지도 않는데 그 우렁찬 소리와 쏟아지는 물의 서늘함이 몸을 휘감았다. 정말로 수십마리의 악마가 괴이한 소음을 내며 달려드는 듯 했다. 나는 원래 소리에 민감한 편이라 시각적인 것보다 청각적으로 공포를 쉽게 느끼는 터라 더욱 이 폭포에 압도당했는지도 모르겠다.
폭포는 멀리서도 볼 수 있지만 계단을 타고 더 가까이 다가갈 수도 있다. 계단을 올라가는 길이 쉽지는 않다. 천장이 낮은 동굴을 기어가듯 지나서 한명이 간신히 오를만한 좁은 계단을 오르고 악마의 얼굴 모양으로 조각한 조형물을 통과하면 폭포의 시작점이 나온다. 그곳에 도달하면 폭포가 어찌나 거칠게 쏟아지는지 다 젖는 걸 감수할 수밖에 없다. 우린 그냥 샤워한다 생각했다.
쫄딱 젖은 옷으로 숙소에 돌아와 감기에 걸리기 전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옷을 말렸다. 바뇨스는 하루 종일 산바람이 불어서 옷이 금방 말랐다.
오후에는 마을을 천천히 걸어다녔다. 볼수록 빠져드는 매력을 지닌 바뇨스였다.
"딱 일주일만 여기서 쉬고 싶다."
"한달 살기도 괜찮겠는데?"
"음.. 한달까지는 좀 지루할 것 같고 하하."
자꾸 쉬고 싶다는 얘기가 나오는 걸 보니, 사실 이때쯤 해서 조금 지치기도 하지 않았었나 싶다. 반년 가까이 집을 나와 있으려니 향수도 생기고, 또 남편은 최근에 아프기까지 해서 더 그랬을 거다. 아픈 내내 한국에서 먹던 어묵탕이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대던 남편이었다. 한번씩은 농담으로 '우리 한국가는 항공권 끊을까?'하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얼마나 오고 싶던 여행인데. 얼마나 큰 맘을 먹고 떠난 길인데 여기서 그만 두다니 말도 안된다. 지금 이 소중한 시간을 즐겨도 모자랄 판에 잠시 지쳤다고 해서 중도 하차할 순 없었다. 그저 잠깐 '아~엄마도 보고 싶고 김치도 먹고 싶다.'하면서 한번 찡찡거려 주고선 다시 여정을 계속하면 된다.
일시적 슬럼프에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게, 이 다음 나라인 페루에 가자 마자 이 정체기는 금방 끝이 나게 된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다음 도시인 페루의 와라즈에서 풀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