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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Aug 14. 2023

몽골 15 ~몽골역사와 칭기즈칸

천년의 영웅 칭기즈칸

우리가 배워서 알고 있는 세계사는 다분히 서양사 중심이다.

그리고 동양사 또한 사마천의 사기와 같은 중국 한족 위주로 기록된 역사서에 기초하고 있다.

해서 역사란 것이 실제와는 다르게 제대로 객관적으로 통찰되지 못한 점도 다분히 있다 본다.


유럽은 물론 아시아에서도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강대국들이 몽골 역사를 상대적으로 축소하고 왜곡하지 않았냐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예를 들면, 러시아도 한때 몽골의 지배를 받았던 적이 있다. 칭기즈칸의 오른팔인 제베와 수부타이는 칭기즈칸의 사신을 두 번이나 죽인 호레즘 왕국의 왕을 사로잡으라는 칸의 명령을 받고 출동했다. 그들은 지금의 조지아를 거쳐 남러시아 근처에서 이민족 침입으로 착각한 러시아 공국 연합군과 마주쳤다. 그러나 당시에는 러시아의 존재조차 몰랐던 몽골군에게 러시아 공국 연합군은 완패당하고 얼마 후 칭기즈칸의 첫째 아들에 의해 그곳에 킵차크 칸국이 세워진다. 

그 후 오랜 시간 러시아 공국은 240년간 몽골에게 세금을 바치며 지배를 받았다. 그럼에도 이런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언급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은 마치 한족이 북방 유목민족의 역사를 축소화하고 폄하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번 보름 기간의 몽골일정을 마치고 직접 가서 보고 나서 더 생생히 느낀 점은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란 것도 바람처럼 지나간 시간들이니 우리는 결코 다 완전히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간은 다시 흘러오지 않는 물처럼 지나갔고 다만  같은 공간인 그곳에서 최소한의 기록과 유적들로 되새겨 추측해 볼 뿐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그래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처럼 여전히 대단하게 여겨지는 몽골 대제국에 대해 한번 더 성찰하고 지나가고 싶어 정리해 두는 글이다. 내 생각엔 앞으로도 이렇게 한 민족이 세계를 말발굽아래 두고 하나로 연결시키는 일은 전무후무 없을 거 같다. 물론 몽골군의 최강 무기 중 하나였던 속도전인 현대의 정보전으로 그리 될 수도 있겠지만 나타나는 양상은 다를 것이다.


워싱턴 포스터 지가 밀레니엄을 앞두고 '지난 천년동안 가장 위대했던 인물'을 뽑을 때 괜히 칭기즈칸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지금 몽골과 좋은 유대관계를 맺고 서로 오가는 교류도 많다. 아마도 이는 경제적 이유도 있지만 이전 고려시대 때부터 몽골제국과 많은 영향을 주고받은 역사로 이미 내재되어 있는 친밀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 역사에서는 1231년에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여 1368년까지 약 137년간 그 세력하에 있었다. 

이로 인해 고려는 직간접적으로 몽골의 영향을 받았다. 몽골제국의 문화가 유행하여 우리나라에 몽고풍이 생겼고, 역으로 몽골제국에도 고려 사람과 문화가 들어가서 고려양이 유행하게 되었다. 


몽골의 영향을 보면 음식에서 설렁탕 같은 경우, '슐렁'이라는 몽골어 단어가 우리 국어에 차용되어 '설렁'이 되고, 여기에 '탕'이 붙어 '설렁탕'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고수레문화, 혼인때 하는 연지곤지와 우리말 어휘에서도 몽골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몽골 사람들은 초원에서 음식을 먹을 때  하늘과 땅과 사람에게 세 번 고수레를 하고 소원을 빌며 음식을 먹는다. 그들은 술을 마실 때에도 손가락으로 술잔에 술을 묻혀서 세 번 고수레를 하고 마신다.
이전에 우리나라 사람들도 야외에서 먹을 때 먼저 음식을 조금 떼어 산과 들에 던지면서 '고수레'를 외치고 소원을 빌었다. 지금도 산소에서 제를 올릴 때는 거의 고수레를 하는 듯하다. 또 무당이 푸닥거리할 때  귀신에게 음식을 바치면서 고수레를 외친다. 제사를 지낼 때 문 앞 현관에 고수레 대신 음식을 접시에 담아두기도 한다.     


하지만 공민왕 시대 이후로 반원 정책을 펼치면서 몽골풍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고려 조정에서는 변발과 몽골식 옷을 입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였는데 그러나 이미 사회 전반으로 퍼진 풍속은 한 동안 남아 계속되었다. 

결혼식 때 사용하는 족두리나 뺨에 찍는 연지, 남녀의 옷고름에 차는 장식용 칼 등도 몽골의 풍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통 혼례에서 신부가 족두리를 쓰고 연지 곤지를 찍었는데 족두리는 원래 몽골 여자들이 쓰는 외출용 모자였는데, 고려로 전해지면서 혼례용 모자로 사용되었다. 또, 이마와 양쪽 볼에 빨갛게 연지 곤지를 찍는 것은 몽골 여자들이 나쁜 귀신을 쫓기 위한 풍습인데 신부의 단장으로 하게 되었다.


몽골 영향의 어휘로는 왕과 왕비를 가리키는 '마마', 세자와 세자빈을 의미하는 '마누라', 임금의 음식을 나타내는 '수라'등이 있다. 궁녀를 뜻하는 '무수리' 등은 원의 궁중에서 사용되던 이름들이 원 출신 공주들의 영향으로 고려에서도 사용되었다. 

벼슬아치, 갖바치, 장사치 등의 단어에 ‘치’가 붙는 것도 몽골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치’는 직업을 나타내는 몽골어의 끝 글자이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매와 말에 관련된 것도 있는데, 얼룩말·노새·보라매·송골매 등도 몽골에서 비롯된 말이다. 


또한, 우리 속담에 있는 '사돈 남 말 한다', '사돈집과 뒷간은 멀수록 좋다'와 같은 속담도 몽골어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사돈은 결혼으로 맺어진 관계를 의미하는데, 몽골어에서는 일가친척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며, 몽골에서는 우리나라를 '사돈의 나라'라고 부르기 했다. 이것은 칭기즈칸 시대에 몽골과 고려가 형제의 나라로 맺어진 것에서 유래한다.


이렇게 우리와는 역사적으로는 각별하다면 각별하게 가까운 두 나라이고 지금은 몽골의 열 집 중 한 집은 한국에 와서 일한 적이 있는  '외노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근래 들어 우리나라에서 몽골여행을 부쩍 많이 가는 추세이니 몽골인들에게 하면 좋은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도 같이 알아두면 좋을 거 같다.


몽골식 예의라면 나도 여행 중 들은 이야기로 말을 탈 때는 항상 왼쪽에서 타야 하고 음식을 권할 때는 내 입맛에 맞지 않더라도 일단 시식을 해야 한다는 것 등이 있었다. 그 외에도 이쑤시개를 할 때 입을 가리고 해야 하고 우리처럼 다른 사람이 식사가 끝나기 전에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끝까지 기다리는 예절등이 있다.


말을 탈 때 왼쪽으로 타야 하는 이유는 불분명한데 정작 몽골인들에게 물어도 시원한 답은 없었다. 그냥 말이 그렇게 길들여져 있다고만 했다. 그리고 혹자는 말은 몽골가축 중에서도 가장 양의 성질을 지닌 동물인데 양의 성질을 지닌 남자가 오른쪽이라는 또 다른 양의 성질을 만나면 말이나 사람에게 다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쳐서 그렇게 왼쪽으로 탄다고 했다. 그것이 음양을 존중해서 가리는 고대로부터 오는 지혜라며. 


하지 말아야 할 금기 중에 타인의 모자를 만지지 말기도 있다. 모자는 머리를 상징하고 전쟁에서 투구를 벗거나 잃어버리면 전사할 확률이 많기 때문일 거라 추측된다. 그리고 몽골에서는 손가락으로 사람을 가리키는 행동을 하면 안 된다. 몽골사람들은 심지어 가축도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않는다. 꼭 필요한 경우는 손을 다 펴서 다섯 손가락으로 가리켜야 한다. 

그리고 몽골인과 식사를 하거나 회의를 할 때는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놓지 않는 것이 좋다 한다. 중국인의 경우 술잔에 술을 따를 때 받는 사람이 감사를 표하며 손가락을 구부려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는 것과는 상반되게 몽골에서는 자칫 테이블을 치거나 두드리면 싸우자는 뜻으로 와전될 수도 있다니 주의해야 한다. 


이 밖에도 칭기즈칸이 명한 것 중에는 물을 소중히 하라는 것과 관련된 것도 있었다. 물에 침 뱉지 말고 난로 잿불에 오줌누지 말라는 것도 물과 불은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라는 뜻일 거다. 

이 밖에도 게르의 문턱을 밟지 말라등 많이 있었는데 아마도 여행자들은 몽골에 가기 전 한 번쯤 챙겨보고 가면 좋을 듯하다.


마지막으로 고려의 공녀 출신으로 황후가 된 여걸 '기황후'에 대해 잠시 언급하고 가려한다.
그녀는 1333년 궁녀가 되어 원나라 조정에 공녀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혜종(재위 1333~1368)의 총애를 받아 황태자와 나중 재위에 오른 빌릭스를 낳았다.
그녀는 황제의 총애를 배경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이어서 황후 직속기관인 자정원을 만들어 재정권을 거머쥐고 나중엔 군사권까지 장악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실세로 고려에서도 그녀의 오빠인 기철이 권세를 휘두르다 1356년 공민왕의 반원 개혁정책으로 제거되었고 그러자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1364년 다른 왕을 세우려다 고려의 명장 최영에게 대패하였다. 
1368년 주원장이 반란세력을 통합하여 명을 세우고 북경을 점령하자 원은  내몽골로 피신하였고 그녀의 아들 빌릭트가 북원의 소종(재위 1370~1378)으로 즉위하였다. 이후의 그녀의 행적은 기록되지 않았다.
아무튼 그녀는 우리에게 몽골 하면 떠오르는 역사적 인물이기도 하다. 혜종의 재위기간 동안 그녀가 누린 실세와 고려왕정에 끼친 영향력도 대단하였기에 고려가 원나라의 문화적 영향을 받는데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한낱 고려의 궁녀였던 그녀가 원나라 말기에 그 세력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시사하는 의미가 뭘까 싶다. 어쩌면 의도하지 않았어도 원의 멸망을 앞당기면서 <<137년 동안 원의 속국>>으로서 지배당했던 고려가 그에서 벗어나는데 일조를 한 건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튼 그녀의 드라마틱한 삶은 영화로 만들어도 흥미로울 한  인생 파노라마가 될 거 같다. 



66세에 야생마를 길들이다 말에서 떨어져 죽을 때까지 총명함을 유지했던 칭기즈칸 초상화 ~ 칭기즈칸 즉위식

 혼례식 족두리

내몽골 칭기즈칸 기념관 ~칭기즈칸 초상화






<<아래 글은 칭기즈칸에 대해 비교적 잘 정리된 글이라 참고로 첨부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몽골의 유라시아 제패


테무진의 탄생, 훗날 칭기즈칸이 되다

1162년 금나라에 세종이 즉위하여 최성기를 구가할 무렵, 시베리아 남단 해발 1,400m의 몽골 초원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테무진, 몽골어로 '최고의 쇠로 만든 사람'이라는 뜻으로 '눈에 불이 있고 얼굴이 빛나는' 아이였다. 그가 장차 몽골족을 통일하고 유라시아를 제패하는, 세계사상 최대의 제국을 이룩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테무진, 용맹함으로 몽골고원을 통일해 나가다

전설에 의하면, 몽골족은 하늘에서 내려온 푸른 이리가 흰 사슴을 아내로 맞아 건설한 나라이다. 북방의 혹독한 추위와 거친 유목 생활은 그들을 강인한 체력과 끈질긴 인내심을 가진, 매우 독립적이고 용맹한 개인으로 키워냈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평생을 말안장 위에서 생활했다.

테무진은 용맹한 몽골 부족장 예슈게이와 호엘룬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그가 9살 때 아버지 예수게이는 타타르 족에게 독살당하고 말았다. 당시 몽골고원에는 몽골족 외에도 몽골계 · 투르크 계의 여러 유목 민족들이 서로 각축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부족은 타타르 · 메르키트 · 케레이트 · 웅구트 · 나이만 등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테무진은 어머니 슬하에서 고난에 찬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점차 장성하면서 부족 재건의 투지를 불태웠고, 그의 용맹함은 주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몽골고원을 통일해 나갔다. 한 번은 메르키트 부족에게 아름다운 아내 보르테를 빼앗겼던 적도 있었는데, 그것은 예슈게이가 메르키트 청년의 아내 호엘룬을 탈취해 갔던 것에 대한 복수였다. 유력한 부족의 신부를 얻는다는 것은 당시 부족 간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하나의 전략이었다.


강력한 군주, 칭기즈칸이 탄생하다

마침내 1206년, 몽골의 부족장들은 부족 연합회의인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이미 백전의 경험을 가진 뛰어난 전략가 테무진을 '칭기즈칸'으로 추대했다. 칭기즈칸이란 몽골어로 '강력한 군주'라는 뜻이며, 쿠릴타이는 '집회'라는 뜻이다. 새로운 나라의 이름은 '예케 몽골 울루스', 즉 '대몽골제국'이었다. 그는 부족 간 납치나 몽골인을 노예로 삼는 등의 악습을 폐지하고 법의 우위를 선포하였으며, 능력에 따른 합리적인 인사를 통해 평등하고 효율적인 조직을 만들었다. 이제 한 부족의 명칭에 불과하던 몽골은 몽골고원 일대에 거주하는 종족 전체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확대되었다.

칭기즈칸의 묘소 앞에 세워진 칭기즈칸 동상.


그는 종래의 씨족제를 해체하고, 사회를 천호 · 백호제로 재편했다. 당시 총 95개의 천호 중 88개의 천호장에는 '나라를 함께 세우고 함께 고생해 온 전사'가 임명되었고, 칭기즈칸은 피로써 다져진 충성스러운 전사조직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며 대정복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질풍노도와 같이 유라시아 대륙을 제패해 나가다

1215년, 먼저 동으로 진격하여 금의 연경을 공략하여 하남으로 밀어낸 칭기즈칸은 말머리를 서방으로 돌려 그야말로 질풍노도와 같이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을 제패해 나갔다.

칭기즈칸나이 들어서까지 건강과 총기를 잃지 않았던 만년의 칭기즈칸


요의 망명정권 서요를 대신한 나이만 왕국이 쓰러졌고, 중앙아시아 최대 강국으로 사마르칸트에 도읍하고 있었던 호레즘 왕국이 쓰러져갔다. 1225년까지 남으로는 인더스 강 유역에서 서로는 카스피해를 넘어 남러시아에 이르는 중앙아시아 거의 전역이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귀향한 칭기즈칸은 1227년 마침내 서하를 무너뜨리고, 금으로 진공을 꾀하던 중 병영에서 대정복으로 점철된 66년의 생애를 마감했다. 몽골족의 풍습은 매장 후 봉분을 하지 않기 때문에 고향에 묻힌 그의 묘소를 확인할 길은 없다.


칭기즈칸의 정복사업, 자손들에게 계승되다

칭기즈칸에게는 정실 소생의 네 아들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 툴루이가 있었는데, 그의 영토는 몽골풍습에 따라 이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대칸의 위는 오고타이, 그의 아들 구유크, 툴루이의 아들 몽케, 몽케의 동생 쿠빌라이에게 이어졌다. 오고타이 사후 권력분쟁이 이어졌으나 칭기즈칸의 정복사업은 그 자손들에게 훌륭히 계승되었다.

수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세계제국을 건설한 칭기즈칸이 정복한 지역.


오고타이는 1239년, 마침내 숙적 금을 멸망시켰고, 몽케는 1258년 세계 최고의 문명 발상지이자 고도의 이슬람 문명국인 서아시아의 아바스 왕조를 무너뜨렸다. 칭기즈칸의 5대 대칸 쿠빌라이는 1279년, 마침내 동아시아 최대의 문명국 송을 멸망시킴으로써 제국의 최대판도를 이루었다. 동해에서 남러시아에 이르는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다.


몽골군의 위력, 몽골의 기마전술과 신기술의 결합에서 나오다

몽골군의 전술은 마치 초원에서 사냥을 할 때 포위망에 들어 있는 짐승을 압축하듯이 추호의 사정이 없었다. 정복당한 나라의 백성은 기술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잔인하게 살육되었다. 그들은 전진하는 몽골군의 후방을 괴롭힐 수 있기 때문이다. 살육당하지 않은 정복민은 다음 전쟁터로 끌려 나가 위험한 노역에 동원되는 등 몽골군의 방패막이로 쓰러져갔다. 몽골군이 지나간 도시는 철저히 파괴되어, 수천 년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영원히 사라져 갔다. 몽골군의 말발굽 소리만 듣고도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신출귀몰한 기마전술로 세계를 점령한 몽골군과 중국군의 전투 장면.


몽골군의 이 파괴적인 위력은 신출귀몰한 기마전술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으나, 금을 통해 취득한 송의 화약 무기,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여 성벽 도시에 큰 돌을 쏘아 넣는 투석기, 성벽을 무너뜨리는 특수 수레 등 신기술들이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남송 말기에 총과 유사한 화약무기가 발명되었는데 몽골은 대나무 통을 금속관으로 교체하여 화총이라 불렀다.


몽골의 대제국, 황제의 직할령과 4개의 한국으로 나뉘다

몽골의 대제국은 몽골 본토 및 중국은 황제의 직할령으로, 그 나머지 땅은 이른바 4개의 한국으로 나뉘어 다스려졌다. 남러시아에는 킵차크한국, 서아시아에는 일 한국, 중앙아시아에는 차가타이한국, 서북 몽골에는 오고타이한국이 건설되었다.

칭기즈칸 사후 이슬람 세계까지 정복한 몽골군의 바그다드 공성전.


일 한국은 몽케의 동생 훌라구가 세웠다. 그는 1258년 바그다드를 함락시켜 500년 이상 지속된 압바스조 칼리프를 멸망시키고 이슬람 세계를 정복하였다. 몽케가 죽고 둘째 형인 쿠빌라이와 동생 아릭부케 사이의 칸의 계승 다툼 소식을 듣고서 귀환을 단념하고 일 한국을 세웠다. 킵차크한국은 오고타이 때 주치의 아들 바투에 의해 건설되었는데, 바투는 1238년 모스크바를, 1240년에는 남러시아의 키예프를 점령한 데 이어 신성로마제국, 폴란드, 헝가리를 점령함으로써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1241년 신성로마제국과 폴란드의 연합군을 대파한 '리그니츠' 전투는 어찌나 죽은 자가 많았던지 '죽은 자의 도시'라는 뜻의 '발슈타트'로 바뀌게 되었다.

몽골의 대제국 속에서 동서의 문물은 매우 활발히 교류되었으며, 몽골의 문화는 그들의 지배력이 뻗쳤던 유라시아의 각국에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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