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이 오기 전 바다는 고요하다
비행기는 곧장 이륙했다. 챙겨 온 카메라는 잘 작동했고 미리 저장해 둔 넷플릭스도 순조롭게 재생되었다. 옆자리 아주머니들은 조용했고 앞자리 또한 등받이를 뒤로 젖히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완벽한 것 같았다. 잠시 후 내 잠을 깨우는 안내방송을 듣기 전까지는.
“현재 태풍으로 인해 다낭 공항이 폐쇄되어 입국할 수 없습니다. 저희 비행기는 나트랑 공항으로 착륙하기로 했습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아니면 차라리 꿈이기를 바랐을지도. 웅성웅성 소리에 정신이 들었고 승무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다낭이 우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태풍이라니. 분명 인터넷에서는 10월엔 우기지만 초반이라 큰비는 안 내릴 거라고 했는데. 10월 다낭 사진에는 비 오는 사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맑은 날씨였는데. 어디선가 사람은 혼자 보는 일기에도 거짓말을 적는다고 했다. 하물며 모두가 보는 블로그에 여행 내내 비가 주룩주룩 와서 돈 100 날렸어요,라고 적을 사람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태풍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건 계획에 없었다고!
계획대로라면 우리의 비행기는 11시 20분에 공항에 도착할 것이고 입국심사를 하고 짐을 찾아 12시 20분쯤 공항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그랩으로 택시를 타고 미리 잡아둔 24시간 프런트를 운영하는 하루 2만 원짜리 싸구려 호텔에 짐을 풀은 뒤 간단히 씻고 잠에 들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계획대로 할 수 없다니. 뜬금없이 나트랑이라니.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비행기는 이미 항로를 변경했다. 친절하게 앞 좌석 모니터에 나트랑으로 향하는 우리의 비행기가 보였으니까.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방송에서는 다낭 공항 사정이 나아지면 다시 돌려보내 준다고 했다. 일단은 나트랑에서 내려서 짐을 풀고 항공사에서 마련한 숙소로 이동할 것이라는데 언제 나아질지는 아무도 모른단다. 조졌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조졌다. 혼자 온 여행도 아니고 엄마랑 이모도 데리고 왔는데! 그것도 나만 믿으라며 큰소리쳐놨는데!
불안한 마음과 흔들리는 눈빛으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볼 것을 알았는지, 아니면 계속 나를 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엄마와 이모가 나를 보고 있었다. 어느새 둘은 나란히 함께 앉아있었고 방긋 웃으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우리 나트랑 간대~~!’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두 사람은 굉장히 신나 보인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을 위해서라도 얼른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왔지만 어찌 되었든 여행 아닌가. 원래 여행지에서는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을 즐겨야 한다. 행여 그것이 목적지가 바뀌어버리는 일일지라도.
“저쪽 숙녀분들이 보내시는 겁니다.”
머리를 싸매며 나트랑에 대한 정보를 기억해 내려 애쓰고 있을 때 한 승무원이 웃으며 말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캔맥주를 들고 계셨고 저쪽 숙녀분들은 역시나 이모와 엄마였다. 이모는 맥주캔을 높이 들고 입모양으로 말했다.
‘치-얼-스!’
기분이 좀 나아져 맥주캔을 땄다. 기분 좋은 치익! 소리를 기대했지만 애초에 기대를 버리라는 뜻이었을까. 그저 태풍을 통과하며 굉장히 흔들린 탓이었을까. 맥주는 폭발하듯 사방으로 튀어나갔고 내 손과 옷에 촉촉이 스며들었다. 내내 조용하시던 옆자리 아주머니들이 나보다 더 빠르게 반응했고 곧장 휴지와 물티슈를 내게 쥐어주셨다.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화가 나있던 때에 아주머니들은 다시 한번 내게 친절을 쥐어주셨다. 내 손에는 뻥튀기 하나가 들려있었다.
“맥주만 마시면 재미없지~호호호”
아주머니들은 호탕하게 웃으셨고 뻥튀기는 제법 맛있었다. 뻥튀기는 발 밑에 있던 아주머니의 가방 안에서 실시간으로 제조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뻥튀기가 나왔고 당연하다는 듯 한번 들어간 손에는 뻥튀기가 3개씩 딸려 나왔다. 배불리 먹고 취기가 올라오려던 때에 안내방송이 나왔다.
“기장입니다. 다낭 공항에서 입국이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우리 비행기는 예정대로 다낭 공항으로 항로를 변경합니다.”
월드컵에서 우리 선수가 골을 넣었을 때가 꼭 이랬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모두가 소리를 질렀고 환호했다. 나도 뒤를 돌아 엄마와 이모를 보았고 둘은 아까와 같이 웃고 있었다. 이제야 그 웃음에 웃음으로 답을 할 수 있었다. 앞 좌석의 화면을 몇 번이나 보며 확인했다. 다낭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다행히 한 번 변경된 노선은 변경 없이 곧장 다낭으로 향하고 있었고 다시 1시간 후 내 인생 가장 길었던 베트남행 비행기가 착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드디어 이륙한 지 약 7시간 만에 비행기가 땅에 닿았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비행기는 물 위에 착륙했다. 비상착륙이라는 말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부드럽게 물길을 가르며 비행기가 천천히 멈춰 섰다. 알고 보니 다낭공항 전체가 태풍으로 인해 물이 무릎높이까지 찼다는 것이다. 이 여행, 출발부터 계속해서 삐걱거린다. 어쨌든 다낭공항에 도착했으니 다행인 걸까.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던 질문이 문득 떠올랐다. 저한테 이러시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