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첫눈은 눈인가 아닌가 헷갈릴 정도로 간질거리며 살짝 내리는데, 이번 첫눈은 내리기 시작 무렵부터 아예 함박눈이 되어 내렸다. 미쳐 가시지 않은 붉은 단풍나무 위로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였다. 단풍과 하얀눈이 함께 있는 풍경이 어색했지만 제법 예쁘기도 했다.
새벽부터 계속 내린 눈으로 거리는 하얗게 변했다. 그러고도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이런 날, 눈이 온다고 집에만 있을 수 없지. 눈 구경을 나가야지! 통창이 있는 카페로 가서 눈이 내리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봐야지. 따뜻한 카페라떼를 마시며 책을 보며 작고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모습을 바라봐야지. 옷을 껴입고 목도리, 모자, 장갑을 챙기고 읽을 책을 골랐다. 책상위에는 읽다만 책, 필사하려고 표시해둔 책,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이 쌓여있다. 책 더미속에서 <당신은 첫눈입니까-이규리> 책을 발견했다.
이 책이다! 며칠 전 도서관에서 빌린 시집이었는데 아직 읽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이규리시인의 시집을 들고 함박눈이 내리는 풍경속으로 나갔다.
카페에 도착해 눈내리는 창 앞에 앉아 책장을 넘기는데 책 사이에 작은 종이 한 장이 껴있었다. 자세히 보니 도서 대출확인증이었다. 내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대출확인증을 보는 순간, 갑자기 은밀한 일기장을 들춰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왠지 그 사람의 내밀한 취향을 알게 된 것만 같았다.
도서 대출증에는 <당신은 첫눈입니까-이규리> 외에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이병률>시집과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이은규> 세 권의 시집을 대출했다고 적혀있었다.
세 권의 시집. 책을 읽는 사람도 드물다는 요즘인데 시집을 읽는 사람은 더 귀하다. 나 역시 시집을 펼쳐놓고 다른 사람이 시집을 세 권이나 빌린 것에 대해서는 되려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예전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 책 뒤에 도서 카드가 있어 작성을 하게 되어있었다. 내가 재미있게 읽은 책을 누가 또 보았을까? 생각하면서 또 누군가는 내 이름을 발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도서 카드의 글씨를 예쁘게 쓰곤 했었다.
흰눈과 아련한 첫사랑을 잘 그려낸 영화 '러브레터'에서도 도서대출카드는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도서 카드에 그린 그림으로 첫사랑이었음을 알게되는 장면이 아날로그식 감성을 느끼게 해준다.
마침 '러브레터'의 한장면처럼 눈이 와서일까?
책 속에 껴있는 대출확인증 종이를 보는 순간,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저려왔다.
다른 책 사이에 종이가 껴있었다면 아무렇지 않게 구겨 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대출 도서 목록에 어울리지 않게 부자 되는 법이나 부동산 투자의 제목이었다면 흥미롭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출 날짜를 보아하니 작년 이맘때인 1월 22일이었다. 나는 첫눈이 오는 날 <당신은 첫눈입니까> 시집을 읽고 있는데 이 사람이 읽었을 때도 눈이 내렸을까? 어쩌면 눈을 기다리며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어제, 혹은 그제 내려 쌓인 눈을 바라보며 읽었을지도. 누군지 모르겠지만 영화나 소설이었다면 주인공과 대출한 사람이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졌을텐데.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을 때 많은 사람이 함께 보는 책이기 때문에 깨꿋하게 봐야겠지만 가끔 만나는 표시는 반갑기도 하다. 낙서가 써있다면 비매너라며 눈살이 찌푸려지겠지만, 위쪽 귀퉁이를 살짝 접었다 편 자국을 발견하면 어느 구절이 좋아서 접어놓았을까? 더 집중해서 읽어본다. 대놓고 밑줄을 그은 것보다 은근한 표현이 더 궁금한 법이다.
나혼자 책을 읽는 것이 아닌 누군가 이미 읽었고, 누군가 다음에 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를 친근감이 생겼다. 책 속이야기에서 더 나아가 도서관을 이용하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도서관 앱을 열어 다른 두 권의 책을 빌릴 수 있는지 확인했다. 나에게 읽어보라고 권해주는 듯하기도 하고 누군지 모를 사람의 도서 취향이 무척 궁금했다. 게다가 이미 한권을 같은 책을 골랐다는 건 나와 감성이 비슷하다는 뜻이지 않을까? 눈을 뚫고 카페로 왔는데 다시 도서관으로 가야겠다. 다른 사람의 도서 목록에 따라 책을 읽을 생각을 하니 첫눈 소식처럼 하얗게 설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