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여름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햇볕은 뜨겁다 못해 따가웠고 땀은 줄줄 흘러내렸다. 아이는 수영장에서 놀고 싶어 했지만 그래도 경주까지 왔는데 불국사는 가봐야지. 투덜대는 아이를 데리고 나왔는데 길까지 잘못 들었다. 주차장을 지나쳐 후문에서 내려 정문으로 걸어가는 내내 더워서 힘들다며 삐죽삐죽거렸다.
중간쯤 걸었을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급하게 주변을 보니 다행히 큰 나무가 있어 일단 나무 밑으로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조금 있으면 그칠까 싶었는데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더니 비바람까지 불었다. 주변 개울가의 물소리도 세차게 들리고 먹구름이 몰려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남편은 안 되겠는지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가지고 오겠다며 빗속을 뛰어갔다.
나와 아이는 서로 부둥켜안은 채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해있었다. 비가 퍼붓듯 쏟아지니 비를 막아주던 나뭇잎도 소용없고 차가운 비를 맨몸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살면서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비를 맞은 적이 있었던가.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소란스러운 빗속에 아이와 나 우리 둘 뿐이었다.
‘옷이 다 젖겠네. 아이가 감기에 걸리면 어떡하지? 비 예보가 있었던가? 불국사는 내일이나 올걸. 차에 우산이 있었는데 가지고 내릴걸’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후회를 했다.
거세지는 비를 보며 걱정이 앞섰는데 아이는 뭐가 신이 났는지 내 품에서 킥킥거렸다.
“아빠가 뛰어가면서 미끄러져 넘어졌을지도 몰라!”
“아빠 차가 우리 옆을 지날 때 물벼락을 쏴악 뿌려서 맞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방금 웃다가 비를 먹었어!”
아이에게는 온통 재밌는 일 투성이었다. 그나마 비를 덜 맞는 곳에 있었는데 그곳을 들락날락하며 비를 맞는 것을 재밌어했다. 아이는 옷은 이미 다 젖었는데도 걱정거리는 하나도 없는 듯 깔깔거리며 웃었다. 바람에 비가 날린다며 웃고, 비가 나뭇잎을 때릴 때 소리가 엄청 크다고 웃고 비가 너무 차갑다며 또 웃었다. 아이가 신나서 까불고 있는 모습을 보니 찌푸려졌던 미간이 펴지고 가라앉은 마음에 덩달아 웃음이 났다. 어느새 나도 아이의 장난에 맞장구치고 있었다.
“그래, 머리카락이 다 젖어서 이마에 딱 붙었네! 비는 먹지 마. 깔깔깔"
남편이 차를 가지고 올 때까지 우리는 빗속에서 웃고 있었다. 차에 타서도 웃음이 가라앉지 않은 우리를 보고 남편도 어이가 없었는지, 웃음은 전염되는 것인지 우리 가족은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지금도 가끔 비가 오면 그날을 이야기하며 웃는다.
소나기로 옷이 다 젖고 감기 걸릴까 걱정하며 여행을 망칠뻔한 마음이 아이의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에 다 씻겨 내리며 우리 가족은 서늘한 빗속에서 행복하게 웃었다. 뜨거운 열기를 식혀주는 소나기처럼 원망과 걱정 대신 빗속에서 깔깔깔 웃었던 기억들은 재미있는 추억이 되었다.
이제 좀 컸다며 앞서 걷던 아이가 아기 때처럼 내 품 안에 쏙 들어와 조잘조잘 떠들고 눈을 빛내며 웃는 얼굴이, 그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고 좋았다. 그깟 비에 젖는 게 무슨 대수랴. 이렇게 즐거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