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 사랑과 결핍 그 사이에서 노래한 한 인간의 고백
1980년대, 젊은이들은 가요보다는 팝송을 즐겨 듣던 시기였다.
그 시절에 청소년기를 보낸 나도 비틀즈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
어렸을 때는 폴 매카트니의 노래가 더 좋았다.
Yesterday, Let It Be, The Long and Winding Road 같은 곡들은 단순하면서도 따뜻했고, 힘들 때마다 곁에서 위로해 주는 친구 같았다. 비틀즈 안에서 폴은 늘 부드럽고 친근한 멜로디로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존 레논의 노래에 더 귀 기울이게 되었다.
Woman, Love, Imagine 같은 곡들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삶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했던 존의 노래들은 비틀즈 해체 이후 솔로 활동을 하면서 발표한 곡들이었다. 그리고 그 노래들을 들을 때마다 이런 의문이 따라왔다.
과연 이 노래들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존 레논은 1940년,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던 리버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집을 떠난 뒤, 어머니 줄리아는 재혼을 하며 어린 존을 자신의 언니에게 맡겼다. 부모의 사랑을 온전히 받지 못한 경험은 어린 존에게 깊은 결핍을 남겼다.
그렇다고 어머니 줄리아와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청소년기에 그는 어머니와 다시 가까워졌고, 줄리아는 존에게 우쿨렐레를 가르쳐주며 음악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녀는 그의 첫 번째 음악 스승이었다.
1956년, 존은 스키플 밴드 '쿼리멘'을 결성했고 여기에 폴 매카트니와 조지 해리슨이 합류했다. 1962년 링고 스타까지 들어오며 ‘4인조 비틀즈’가 완성된다.
특히 존과 폴은 특별한 유대를 형성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경험이 있었기에 서로의 상처를 깊이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존의 어머니 줄리아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폴의 어머니 메리는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공감대는 그들의 멜로디와 가사를 하나로 꿰는 보이지 않는 실처럼 작동했다.
이 무렵 존은 예술학교 동급생 신시아 파월과 결혼해 아들 줄리안을 얻었다. 그러나 안정적이고 차분한 신시아와의 관계에서 그는 자신이 평생 찾아 헤매던 사랑과 평화를 끝내 찾지 못했다. 내면의 공허는 점점 더 크게 울렸다.
존의 삶을 뒤흔든 결정적 비극은 열일곱 살에 닥쳤다. 어머니 줄리아가 길을 건너다 술에 취한 경찰이 운전하던 차에 치여 세상을 떠난 것이다. 청소년기에 어렵사리 회복한 모자 관계는 그렇게 허망하게 끊겼다.
그 상실감은 평생을 따라다녔다. 그는 Mother, Julia, My Mummy’s Dead 같은 곡에서 그리움을 절규에 가까운 언어로 토해냈다. 1970년 아서 자노브의 프라이멀 테라피를 받으며 “엄마! 아빠!”를 외치며 울부짖었다는 기록은, 그의 음악이 결코 포즈나 수사가 아니라 실제 고통의 표출이었음을 보여준다.
1966년 런던 인디카 갤러리.
존은 아방가르드 예술가 요코 오노를 만난다. 전시에 걸린 사다리를 올라가 돋보기로 “YES”라는 단어를 읽어낸 일화처럼, 요코와의 만남은 존에게 ‘허락’과 ‘환대’의 감각을 선사했다. 강한 끌림은 곧 관계로 이어졌고, 그는 결국 신시아와의 결혼 생활을 정리했다. 신시아는 바쁜 존을 위해 조용히 내조하며 가정을 지켜왔기에 많은 이들은 그를 조강지처를 버린 패륜아라며 비난했다. 그러나 신시아의 사랑은 가정을 지키는 헌신이었고, 어린 시절 상처가 많았던 존이 추구했던 사랑은 내면의 결핍을 채워줄 전혀 다른 무엇이었을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은 방향이 달랐던 것이다.
요코는 존에게 단순한 연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잃어버린 모성적 안정감을 대신 채워주었다. 동시에 예술적 자극과 정치적 동반자 역할도 해냈다. 존은 요코와 함께 Bed-in 퍼포먼스를 벌이며 반전을 외쳤고, Give Peace a Chance를 녹음했다. 그의 마초적 기질은 요코와 함께하면서 페미니스트적 언어로 바뀌었고, Woman은 요코에게 바친 진심 어린 고백이자 의존의 표현으로 남았다.
요코의 존재는 팬과 언론의 거센 반발을 불렀고, 비틀즈 내부의 갈등을 자극했다. 하지만 해체의 원인은 단지 요코 때문만은 아니다. 멤버 간 음악적 성향의 차이, 매니지먼트 문제, 각자의 삶과 예술에 대한 욕구가 겹쳤고, 1970년 비틀즈는 공식 해체를 맞는다.
이후 존은 오히려 더 솔직해졌다. Plastic Ono Band에서 그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드러냈고, Imagine에서는 단순한 피아노 선율 위에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그려냈다. 사람들은 그 곡을 인류 보편의 노래로 기억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것은 무엇보다 존 개인의 소망이었다. “세상이 이렇게만 된다면”이라는, 결핍에서 솟아오른 간절한 상상.
무대 위의 그는 평화와 사랑을 외쳤지만, 무대 밖의 삶은 갈등과 모순으로 어지러웠다. 첫 번째 가정은 무너졌고, 아들 줄리안과의 관계는 멀어졌다. 요코와의 관계마저 사랑과 의존, 갈등이 교차했다.
그의 노래는 인류를 향한 구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상처 입은 한 인간의 고백에 더 가까웠다. Love는 그가 가장 갈망했던 감정을 노래했고, Woman은 요코에게 바친 곡이지만 그 안에는 모성에 대한 갈망이 묻어난다. Imagine은 모두의 이상향으로 불리지만, 사실은 존이 꿈꾸던 세상의 모습이었다.
1980년 12월 8일, 뉴욕 맨해튼 다코타 하우스 앞. 존 레논은 마크 채프먼이 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불과 몇 시간 전, 그는 채프먼에게 앨범 Double Fantasy에 사인을 해주었는데, 같은 사람의 총탄에 생을 마감했다. 마흔 살, 너무 이른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팬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고, 라디오와 방송국은 하루 종일 그의 노래를 틀었다. 지금도 뉴욕 센트럴파크의 ‘스트로베리 필즈’에는 그를 기리는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존 레논은 음악에서는 분명 천재였다. 그러나 그의 삶은 사랑과 평화를 노래한 메시지와는 달리 모순으로 가득했다. 가까운 가족과 동료들에게는 그가 외쳤던 사랑과 평화를 주지 못했으면서도, 인류 전체를 향해서는 끊임없이 그것을 외쳤다. 이 아이러니 때문에 나는 그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늘 위대한 메시지와 그 뒤에 감춰진 모순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그 모순의 뿌리를 알게 되면서, 나는 오히려 그의 노래를 더 따뜻하게 듣게 되었다.
Woman, Love, Imagine은 인류를 향한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상처 입은 한 인간이 평생 진정한 사랑과 마음의 평화를 갈구한 고백이었다. 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흔들렸지만, 최소한 한 여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진정성만큼은 분명히 남겼다.
존 레논은 총성에 쓰러졌지만, 그의 고백은 지금도 내 안에서 살아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노래를 들을 때, 사람들 말처럼 ‘인류를 위한 사랑과 평화’가 아니라—나약하고 상처 입은 한 인간이 마침내 손에 쥔 사랑과 평화의 온기를 느낀다.
다음 회차에서는 한국 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은 뮤지션, 유재하의 이야기를 다룬다. 단 한 장의 앨범으로 한국 음악사의 방향을 바꾸고도, 스물다섯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의 삶과 음악을 살펴보려 한다.
위키백과 – 존 레논
나무위키 – 존 레논
BBC Culture – The day John Lennon met Yoko Ono
가디언(The Guardian) – John Lennon: the lost weekend
The art piece that 'started' John Lennon and Yoko Ono's relationsh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