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일흔에 풀어놓는 소소한 이야기(제56편)
인문고에서 3학년 담임을 연속해 맡을 때의 일이다.
새 학년이 시작돼 배정된 우리 반 학생의 명렬표를 들고 자리에 앉았을 때, 옆자리 박 선생님이 보여 달라고 해서 줬더니 대뜸 한 명의 이름을 보고 이러는 게 아닌가.
“와! 선생님 반에 〇〇〇가 들어갔네요.”
“아니 그 애가 사고 뭉칩니까?”
“사고뭉치라뇨? 오랜만에 나온 서울법대 갈 재목감인 걸요. “
하면서 들려준 얘기를 종합해 보면 이랬다. 1, 2학년 인문계 1등을 단 한 번도 놓친 적 없고, 전국모의고사에서도 10등 이내 들어간 적이 세 차례나 된다는 게 아닌가.
공부 잘하는 애가 반에 들어온다 하여 큰 기쁨은 아니나 싫어할 일은 전혀 아니다. 아이들과의 처음 만남을 이름 부름으로 대신했다. 사실 부르면서도 그 애가 누군지 궁금했다. 3학년만 계속 맡다 보니 좋지 않은 점은 1학년 2학년 때 과정을 전혀 모른다는 점이다.
헌데 그 애 이름을 불렀을 때 문제가 생겼다. 하필이면 같은 이름이 두 명 아닌가. 할 수 없이 일어서라고 했다. 다행히(?) 둘의 모습이 전혀 달랐다. 한 명은 누가 봐도 공부 잘하는 애의 특징 그대로 총기가 번뜩이는 데다 좀 도도해 보였고, 다른 한 명은 졸린 눈에 어벙해 보였으니... 나는 한눈에 판단했다. 그리고 그 판단이 뒤집히는 일은 없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며칠 지나 그 반대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즉 똘똘해 보이는 애는 사실 뒤에서 첫째였고, 어벙해 보이는 애는 앞에서 첫째였다. 그걸 알았을 때 얼마나 당혹했는지... 첫인상이 끝 인상이 아닐 때가 있지만 어떻게 그리도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정반대인지...
그 뒤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까 어벙한 외모와 다르게 1등 아이는 아주 반지빨랐다(말이나 행동이 얄밉도록 민첩하고 약삭빠르거나, 얄밉게 교만하다). 청소 시간에 눈치껏 빠져나가고, 자기 이익 챙기기엔 한 점 양보가 없었다. 그와 반대로 이기적 용모의 꼴등 아이는 또 얼마나 성실한지. 자기 담당 구역 청소 끝난 뒤에는 남을 도와주는 등 한 마디로 아주 모범적이었다.
중국 당나라 때 마의선사가 펴낸 관상서 [마의상법 (麻衣相法)]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相好不如身好 (상호불여신호) 身好不如心好 (신호불여심호)”
"관상(얼굴) 좋은 것이 신상(몸) 좋은 것보다 못하고, 신상 좋은 것이 심상(마음씨) 좋은 것보다 못하다"
여기서 만들어진 말이 ‘만상불여심상 (萬相不如心相 : 어떠한 관상도 마음씨를 따를 수 없다)’이다. 만약 내가 이 글을 진작에 읽었더라면 아이들을 볼 때 외모와 상관없이 그 사람됨을 먼저 보았을 텐데...
방송국마다 예능프로그램을 늘리자 수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연예인은 물론 의사, 변호사, 정치인, 거기다 일반인까지.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그가 지닌 내면보다 처음 눈에 든 외모로 그 사람됨을 판단한다. 즉 눈에 번쩍 뜨이는 외모의 남자, 여자가 하는 말을 더 믿는다.
비록 산도적처럼 생겼어도 비단결보다 더 고운 심성의 사람일 수 있고, 누가 봐도 끌리는 외모의 소유자라 해도 신뢰감 떨어지는 인간일 수 있는데도 말이다. 적어도 연예인이라면 관상이 좋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회적 물의를 빚는 이들의 얼굴과 그의 행위를 비교해 보면, '설마 저처럼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 그랬을까?' 하는 의심이 들 때가 종종이다. 특히 요즘 뉴스와 인터넷을 달구는 젊은 연예인을 예전 모 프로그램에서 본 적 있다. 누가 그렇게 반듯한 얼굴에서 그런 짓을 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20세기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뽑은 김구선생과,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링컨 대통령, 이 두 분은 모두 관상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이다.
김구 선생은 어렸을 때 수두를 앓았는데 당신 어머님이 수두인 줄 모르고 흔한 부스럼인 줄로 알아 고름을 짜낸 탓으로 얼굴에 얽은 마마 자국이 남아 있었다. 선생은 한때 관상학을 공부했던가 보다. [마의상법]에 쓰인 내용을 기초로 자신의 얼굴을 거울로 보면서 한 가지 깨달았다. 부귀의 상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온통 흉하고 천한 상만 보였으니...
그에 실망하여 제법 오랫동안 매달렸던 공부를 때려치우려다가 한 구절을 보았다. 바로 ‘만상불여심상(萬相不如心相)’에 관한 글이었다. 그분은 결국 관상이 준 운명(?)을 거부했기에 나라와 겨레를 위해 큰일을 하게 되었다고 본다.
링컨 대통령은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존경받지만 또 가장 못 생긴 대통령이라는 말도 들었다. 그에 관해선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무명의 젊은 시절, 파티에 가면 어떤 여인도 춤 상대가 돼 주지 않았다. 신청하면 '너무 많이 춰 좀 쉬고 싶어요.' '다른 분과 예약이 돼 있어요.' 그러니 혼자 술만 마실 수밖에.
어느 날 파티에서 총각들의 시선을 독차지하고 있는 아가씨를 보았다. 자기도 파트너가 되고 싶었지만 포기하고 술만 마실 뿐. 그런데 오랫동안 춤추던 아가씨가 잠시 쉬러 자리에 앉은 걸 보자, 술김에 용기를 내 그녀 앞에 섰다. 그리고 이리 말했다.
"아가씨 이 세상에서 가장 못 생기고 가장 춤 못 추는 사나이와, 춤출 영광을 주신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처음 그녀는 이리 생각했다. 거절한다면 어쩌면 그가 자살할지도 모르겠다고. 헌데 춤추며 얘기 나누면서 그의 인격에 푹 빠지게 되었다. 나중에 결혼까지 한 그녀는 메리 토드 링컨 여사다.
[마의상법]을 펴낸 마의선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람의 운명을 판단하면서 먼저 그 사람의 형상과 모습을 보기 전에 그의 내면에 감추어진 마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나이 일흔이면 꽤 살았고, 그 정도면 사람 볼 줄 안다고 자부해도 되리다. 허나 나는 아직 마이 멀었다. 아직도 그 사람의 참된 속을 보지 못하고 겉에 매달린다. 언제쯤 되어야 내면을 보는 눈이 생길까.
*. 사진은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