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해철 시인(1956년생) : 전남 나주 출신으로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전남대 의대를 나와 현재 서울에서 [나해철 성형외과] 원장으로 있으며, '오월시' 동인
<함께 나누기>
아내가 누구랑 전화할 때 보면 한심하단 생각을 종종 합니다. 요즘 귀가 좀 안 좋아 ‘스피크’ 켜놓은 채 전화하니 저쪽 방에서 해도 다 들립니다. 딸과 이틀에 한 번꼴로 전화하는데 별 알맹이 없는 내용뿐입니다. 가끔 주요 볼일로 전화하기로 하지만 그냥 안부 전화인데 2~30분은 훌쩍 넘깁니다.
그에 비해 저는 딱 할 말만 하고 끊습니다. 어떤 땐 너무 일찍 끊어 저쪽에서 섭섭하다 여길 정도로. 여태 그게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할 말 있을 때만 전화하고 그 내용도 할 말만 해야 한다고.
오늘 시를 읽으며 제 자세가 혹 틀리지 않았냐는 생각이 들어 이 시를 잡았습니다.
"밥집 마당까지 내려온 가을을 / 갑자기 맞닥뜨리고"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깔쌈한 표현이 나오면 무조건 붙잡습니다. 이 시구가 바로 거기에 해당하지요. '가을이 깊어지다'란 표현을 여럿 보았습니다만 '밥집 마당까지 내려온'이란 묘사는 처음이니 시인의 독창성이 배인 시구입니다.
"빌딩으로 돌아와서 / 일하다가 / 먼 친구에게 큰 숨 한 번 / 내쉬듯 전화한다"
화자의 직업에 대해 대충 짐작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일단 빌딩에서 일하며, 짬 내 친구에게 전화 걸 수 있는 비교적 여유 있는 직장. '큰 숨 한 번 내쉬듯'을 어떻게 풀이해야 할지 애매합니다만, 적어도 마음먹으면 언제나 전화할 수 있는 사이로 새깁니다.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 나눈다"
아, 남자도 아무것도 아닌 일로 전화 거는가 보다 하는 뜻으로 읽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로 읽습니다. 중요한 일이 아님에도 언제나 전화 걸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이 시구로 하여.
"가을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 / 와 있어서 / 그를 그렇게라도 보내게 한다"
오늘 시가 깊숙이 와닿음은 바로 이 시행 때문입니다. 많은 시인묵객들은 가을에 갖은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위대하게, 어떻게 하면 쓸쓸하게,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란 의미를 담으려고.
헌데 참 허망합니다. 가을은 특별한 계절인데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 와 있다니. 그렇지요. 정말 그렇습니다. 해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내리비치고, 바람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어오고, 함박눈도 아무것도 아닌 것에 내리건만 왜 우리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여겼을까요?
끝내려 하다 '아무것도 아닌(일)'에 눈길이 더 머뭅니다. 무려 세 번이나 나온다는 점. '아무것도 아닌'의 반대말은 '가치 있는 일(중요한)'일 겁니다. 이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은 요즘 세상에선 무엇일까요. 언뜻 떠오른 것만 펼치면 성공, 명예, 부귀영화 등.
그런데 쓸쓸하고 가슴이 허전한 계절 가을에 '아무것도 아닌'이 '가치 있는'보다 더 우위에 섬을 어떻게 해석할까요? 가을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 와 있다면, 우린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며 사는 게 아닌가 합니다.
오늘 문득 아는 이에게 아무것도 아닌 일로 전화하고 싶습니다. 깜빡 놀랄지 모르나 괜히 그러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