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에야 상상도 못 하는 일이지만,
나의 학창 시절에는 한 반에 60명을 상회하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는 같은 학년의 학생 수는 15개 반 900여 명 되었다.
그러다 보니 새 학기가 되면, 전혀 모르는 새로운 친구들과 한 반이 되어 일 년 동안 생활을 같이 하게 되는데, 내성적이어서 친구를 사귀기가 힘든 나로서는 신학기가 고역의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은 새로 반편성을 하여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 신학기였는데, 그 학급에 들어가자마자, 나의 빠른 두 눈은 레이더처럼 좌우를 살피면서 나의 친구가 될 놈을 찾아 날카롭게 움직였다. 나는 나의 부족함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나하고 비슷하거나 나보다 못한 놈을 친구로 사귀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친구를 쉽게 사귈 수가 있다는 나의 편협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중 좀 덜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놈이 나의 시야에 걸렸다.
말을 시켜보니 생각에 뜸을 들인 후, 한참 뒤에 대답하는 게 영락없이 내 친구 감이다.
(`그래 오늘부터 너는 내 친구다`)
나는 그놈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래서 그놈과 나는 같은 반 짝꿍이자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새 학기가 일주일쯤 지났을까... 다른 놈들은 공부를 한답시고 책상에 '수학의 정석' 참고서와 연습장을 꺼내어 놓고, 되지도 않은 수식을 써가며 수학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놈은 어떻게 된 건지 연습장은 물론이거니와 문제집에 메모한 줄 조차도 없었다.
책을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연필로 딱하고 박자를 한 번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고, 문제집 맨뒤에 있는 답지를 보는 것이 아닌가?
"야! 너 지금 뭐하냐?"
"수학 문제 풀어!"
('어라! 미친놈 일세! 좀 모자란 놈 같아서 친해지려고 옆에 앉았더니, 이제 보니 아주 정신이 가출한 놈이네...')
수학여행을 가서도 같은 방에 나란히 누워서 잤다.
"너는 왜 내 옆에 딱 붙어서 자냐?"
밤에 자는데 왠 놈이 내 옆에 붙어서 자는 바람에 나는 잠을 설쳐서 볼멘소리를 하였다.
"밤에 네가 따뜻해서 난로를 끼고 자는 것 같아 나는 잘 잤다."
예전에 내가 열이 많다고 독자들께 말씀드렸듯이 이놈도 나의 온기를 그때 벌써 느껴버린 모양이다.
지금도 내가 퇴근하여 집에 오면 7년 묵은 우리 집 샴고양이가 내 눈치를 살핀다. 소파에 앉을 기색이라도 보이면 잽싸게 내 옆자리에 똬리를 틀고 잠을 청하는 것으로 보아, 내 체온이 다른 사람보다 높은 것이 사실인 모양이다.
사실 이 온기로 지금의 아내도 사로잡았는데...
"너는 뭘 공부하고 싶냐?"
"전자공학"
나는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놈은 천재였다. 수학 문제를 암산으로 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천재임이 틀림없다고 나는 굳게 믿었다. 아마, 한국의 전자공학분야를 몇 단계 더 끌어올릴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의 미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고민거리도 주고받으며 청소년기의 황금기인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3학년이 되면서 서로 다른 반으로 편성되어 헤어지게 되었다.
우리 큰 딸은 유난히 만화영화를 좋아했다.
나도 덩달아 만화영화를 같이 보러 다니다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란 만화 영화와 함께 '미야자키 하야호'의 팬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날도 만화영화를 보기 위해 군포시의 자그마한
영화관을 갔는데...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하여 화장실을 찾았다.
소변기에 가상의 타깃을 정하고 부지런히 영점사격을 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멀 때같이 같이 생긴 놈이 나를 아래위로 훑는 것이 아닌가?
('어! 이놈이... 자기 꺼하고 비교하나?')
바지의 지퍼를 올리면서 내가 얼굴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오만상을 다지으면서 그놈을 쳐다보았다.
"야! 너!..."
입을 실룩거리더니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반말로...
('어쭈 이놈 봐라! 이제 막 나가네!')
"그래 왜?"
남쪽 지방 사투리를 잘 썼으면 좋았을 것을, 그냥 서울 말씨로 목소리를 나지막이 깔고 대답했다.
"나 몰라?"
드디어 생각이 났다.
('어~... 그 놈이다!. 천재...')
그놈도 만화영화 좋아하는 애를 데리고 가족과 함께 영화관에 왔다가 화장실에서 나를 만난 것이다. 나는 그 친구를 못 알아봤지만, 그 친구는 한눈에 나를 알아봤다.
명함을 내미는데...
'ㅇㅇㅇ 이비인후과 '
'원장 ㅇㅇㅇ'
의사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시험성적이 우리의 미래를 선택하는 시대를 살아왔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험성적의 허락 없이는 직업 선택의 자유마저 박탈당하는 모순적 교육제도 속에 살아왔다. 그 친구의 명함을 보는 순간 학력고사 성적이 이 친구를 의과대학으로 보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중이염으로 고생하시던 나의 모친이 동네의 모든 병. 의원을 섭렵하시면서 경험하였던 의사들 중 단연, 나의 친구가 항상 톱을 차지하였다. 이 친구가 처방해준 약은 속이 편안하다는 평가를 덧 붙여서..
그 후 나의 모친은 그 친구의 팬이 되셨다.
친구의 모친이란 명목으로 진료비를 무료로 해준다고 하시며, 대신에 식사라도 대접하라는 모친의 명을 받들어 식사자리에서 들어본 친구의 속마음은 비즈니스로서의 의사가 되기는 애초에 그른 것 같았다.
'지금껏 자신의 이익을 위한 진료나 처방은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 자리가 그 친구의 얼굴을 본 마지막이었다. 나는 그 후 시골로 귀농을 하였고, 이제 그 친구의 얼굴을 본 지도 10여 년이 흘렀다.
잘! 있지 친구야!
보고 싶다.
젊음의 숙성되지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항상 들어주던 친구를,
괴산의 버스기사가 그리워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