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편지 09
“오늘 떠나죠?"
"네"
"동부로 간다고요?"
"네. 동부로 갔다가 거기서 돌아갈 예정이에요"
"덕분에 즐거웠어요"
"저도요"
"즐거운 여행 되길 바래요"
"네... 남미는 위험하다니, 늘 조심하세요"
길에서 만난 사람은
길에서 헤어진다.
길에서 만난 인연은
그렇게 여행지의 추억으로 남는다.
멀리 버스가 오고
이젠 정말 안녕이구나 싶을 때
그가 다시 나타났다.
이름 모를 꽃으로
작은 꽃다발을 만들어 내게 건넨다.
"잘 가요"
"잘 가요"
추억으로 남을 뻔한 우리는
그렇게 작은 꽃다발로 다시 이어졌다.
그는 지금 내 곁에 있다.
20대에도, 30대에도, 40대가 된 지금도 여전히 나는 로맨스가 좋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밀당에 설레고, 그들의 어긋남에 마음이 아프다.
대학생 때, 3박 4일 대학생 대상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적이 있다. 무슨 배짱이었는지 홀로 참가신청을 했다. 어리바리 대학 새내기. 홀로 온 내가 외로워 보였는지 선후배들이 함께 온 언니 오빠들이 나를 자신들의 무리에 포함시켜 주었다. 그중 A오빠와는 취향도 성격도 심지어 학교도 같아 템플스테이에서 돌아온 후에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냈다.
어느 날 그는 임용고시 준비를 위해 고시원에 들어갈 예정이라며 소장하고 있던 문학책 100권을 내게 빌려주었다. "썸이다. 아니다." 친구들은 두 가지 해석을 하며 부산을 떨었지만, 100권의 책은 책일 뿐 상대의 마음을 말해 주진 않았다. 나는 그저 책을 책으로 받았고, 일부는 읽고 일부는 읽지 않은 채 1년이 지났다. 그러다 나는 미국에 1년 이상 거주하게 되었고, 한국을 떠나기 전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던 중 '100권의 책'이 눈에 띄었다.
"책이 너무 많아서요, 집 주소 좀 알려줄 수 있어요? 집 앞까지 택시를 타고 갈게요."
천천히 돌려줘도 된다고, 너무 많으면 몇 번에 걸쳐 돌려줘도 된다고 그는 말했지만 출국일이 임박했던 나는 마음이 바빴다. 택시를 타고 낯선 동네 낯선 골목을 지나 그의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책꾸러미를 골목에 남겨둔 채 택시는 떠났고 그가 2번에 걸쳐 책보따리를 집 안으로 옮길 때까지, 골목 모퉁이 슈퍼마켓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땀을 흘리며 그가 뛰어왔고 나는 투명 파일에 끼운 책 목록 리스트를 건넸다.
"혹시 몰라서요. 빌려 준 100권의 책 목록이에요. 너무 늦게 돌려줘서 미안해요. 아, 오빠가 좋아할 것 같은 시집도 한 권 같이 넣었어요. 초등학교 선생님이 쓴 시집인데, 오빠가 읽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오빠는 분명 정말 좋은 선생님이 될 거예요."
파일을 건네받으며 그는 혼잣말처럼 낮게 "정말 마지막이구나." 했다. 같은 대학이었지만 과도 달랐고, 홀로 간 템플스테이에서 만난 인연이라 서로의 소식을 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는 제3의 인물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아주 가끔 나는 궁금하다. 그가 내게 빌려준 100권의 책에는 어떤 마음이 담겨 있었던 걸까? 정말 책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던 걸까? 그날 그 마지막 만남에서 만약 "마지막이 아니게 하면요? 마지막이 아니길 바래요?"라고 물었더라면 우리의 인연은 또 다른 엔딩을 맞이했을까.
'호감 일지 아닐지' '썸 일지 아닐지' 추측하고 상상하는 지인들에게 나는 곧잘 바람을 넣는다.
"머리로만 상상한다고 뭐가 해결되니? 일단 그냥 가서 물어봐. 아님? 아님 말라지 뭐. 그런데 맞으면 어쩔 거야? 진짜 썸이었음 어쩔 거냐고?"
내 말에 용기를 얻은 몇몇은 썸을 넘어 연인이 되기도 했고, 또 몇몇은 "너 때문에 망신살만 뻗쳤다"라고 원망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시절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물어보고 싶다.
"오빠, 그때 내게 왜 100권이나 되는 책을 빌려줬나요?"
2017년 1월부터 3월까지, 꽃 작품과 글을 엮는 <꽃편지> 프로젝트의 초기 기획과 함께 원고 작업을 했다. 매주 5개의 이야기, 총 60개의 이야기를 내 안에서 끌어냈다. 일이었기에 가능했다. <꽃편지> 프로젝트 덕분에 내 안에 떠돌던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어 글로 기록했다. 노트북이 망가져 모든 기록이 사라져 버렸던 2021년의 어느 날, 혹시나 하고 찾아간 Leposy의 블로그. '감사합니다' 아직 글들이 남아있었다. 내겐 소중한 이야기들을 한 편씩 옮겨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