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려서부터 칭찬을 듣고 자랐다.
아마도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여기서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지 안 그런지는 중요하지 않을 듯하다. 중요한 것은 '나'라는 사람이 그 칭찬들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하는 것이니까. 다시 말하지만 나는 칭찬을 듣고 자랐다. 아니, 칭찬만 들었다. 누군가 이런 말을 듣는다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어느 쪽으로든 엄청 뛰어난 아이 었겠구나.' 생각할 것이다. 사실 나 자신도 그런 줄 알았다. 아마 우리 부모도 그런 줄 아셨을 것이다. 첫 시작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일로 인해 나는 칭찬을 받았고 그것이 나의 기준이 되었다. '잘하느냐, 못하느냐.'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잘한다.' '한 번에 알아듣는다.' 등.
다른 모든 영역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주식을 하면서 확연히 느끼는 나의 한계는 '나는 왜 이렇게 조급하여 단계를 밟아 나가는 것을 할 줄 모르고, 이렇게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면 분명 정상에 오를 것을 알면서도 그 과정을 견디지 못하는가?'였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하고 다시 하지만 자꾸만 되돌아 오늘 그 상태. 조급함으로 모든 것을 다 원점으로 되돌리는 상황을 만들어 놓는다. 나의 조급함은 내가 한 번에 잘해야만 한다는 생각, 과정보다는 결과를 내세우고 그것으로 인정받고자 했던 욕구.. 기타 등등의 경험과 결정들이 합쳐져 생겨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냐고? 아니. 나는 나의 조급함, 즉 '시간 없음'이 얼마나 앞뒤가 안 맞고 우스운지를 말하고 싶다. 나는 하고자 하는 것이 너무 많고 이루려고 하는 것이 너무 많고 크다. 그래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다 생각하다 보면 속이 답답하고 조급함이 몰려온다. '하루에 한 발짝씩 나아가서 언제 정상까지 오르냐는 말이지. 거기다가 가고 싶은 길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그렇게 시간에 늘 쫓길 것 같은 나는 그 쫓김이 너무 싫어서 수시로 멈춘다. 그냥 힘을 비축하는 '쉼'이라면 좋을 텐데 대부분은 그저 회피일 뿐이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회피. 마치 엉망으로 산 내 삶이 너무 아쉽고 불쌍해서 되돌릴 여력이 없다는 마음으로 리셋하고자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사람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되돌리기엔 너무 늦어서, 남은 날 동안 어쩔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기에 그냥 아예 남은 날을 없애 버리는 어리석음. 이제야 그 어리석음과 조급함이 뭐든 한 번에 이루려고 하는 나의 오래된 성향에서 비롯된 것임을 안다.
우습게도 나는, 빠지지 않는 살에 화가 나서 울면서 달렸고, 머지않아 폭식으로 배를 채웠다. 트레이딩에서는 또 어땠는가? 계좌를 몇 번이나 뒤엎었는지 모른다. 그저 내 눈앞에서 마이너스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렇게 조급하게 굴고, 단계를 밟을 줄 모르고, 루틴과 훈련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면서 나는 늘 화가 나 있고, 불만이 있으면 안정되지 않았다. 늘 한숨 쉬었으며 여유가 없고 앞선 이들과 비교하며 때로는 희망에 찼다가 또 가랑이가 찢어지기도 하며 그렇게 주저앉았다. 매일 10원씩 모으는 사람보다 삶을 주도하지 못했으며 늘 이 조급함을 다스리느라, 마음의 평화를 찾느라 온갖 에너지를 다 쓰기 일쑤였다.
이제 나는 여기에 서서 나 자신을 '내일 죽는 사람'으로 새롭게 창조한다. 내가 만약 내일 죽는다면 다는 하루를 어떻게 살 것인가? 어차피 죽을 거 대강 살기에는 남겨진 것들이 너무나 많다. 나의 아이들과 가족, 우리 집과 물건들, 친구들과 인연이 되었던 모든 이들. 그들에게 한 번에 '펑'하고 이룬 나의 결과물은 그리 중요하지 않고 나의 흔적과 자취가 중요하리라. 그래서 나에게 '내일 죽는 사람'이란 오늘 하루를 꾹꾹 눌러 정성스레 사는 사람이다. 한 장면 한 장면을 경이롭게 바라보고, 누군가의 눈에 담길 내 모습에 온 영혼을 담는 사람이다. 내일 죽는 것을 알면서도 오늘의 할 일을 그저 하는 사람이다. 내일 죽는 사람은 사실 다음 날도 살아 있을 것임을 안다. 그리고 만약 그렇지 못하더라도 어떤 사람으로 남겨질지가 있기에 절대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렇게 창조하고 시작한 하루는 그저 감사하고 좋았다. 수익보다는 나를 훈련하고 실력을 키우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이들과의 대화는 그들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며 누구에게든 사심없이 다가가 마음을 나눌 수 있다.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고, 내가 무엇을 바라고 이러는지를 말하는 것에 어려움이 사라졌다.
앞으로 나의 트레이딩에서는 매일의 일지와 훈련의 흔적, 좌절과 성장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을 것이다. 이제 나는 '더욱 나답게' 살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