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마시면 울게 돼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주사가 있다. 그중 하나는 술 마시면 울기다. 유난히 술만 들어가면 우는 사람들이 있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위로가 필요할 때 술을 마신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술 한 잔을 마시면 기분이 풀어지면서 감정이 완화된다. 그러다보면 사회 생활 하느라 욱여넣어 진심이 튀어나기도 한다. 말 하기 힘든 말도 술 한 잔에 용기를 낼 수도 있다.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봤던 술자리 눈물은, 뜻밖에 회식 자리였다. 평소 어려워 하던 상사가 있었는데 그는 주당으로 유명했다. 그는 늘 유쾌하게 술을 마시는 편이었고 웃음도 호탕했다. 그런데 그날은 한참 웃다가 내 앞에 턱 앉더니, 갑자기 펑펑 울기 시작했다. 내가 당황해서 술잔을 채워주자, 상사는 그 남은 술잔을 비워내곤 자신이 키우던 애완동물이 얼마 전에 죽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와는 직급 차이가 많이 나서 시시콜콜한 애완동물 이야기를 자세히 터놓고 지내진 않았다. 나도 고양이를 키우기 때문에 애완동물을 키운다는 공감대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날 만큼은 애완동물에 대해서도 자세히 이야기를 하고, 자신의 슬픔에 대해서도 깊게 털어 놓았다. 자신이 키우던 애완동물이 어떤 존재였는지, 알러지를 참아내면서도 키웠던 그 애완동물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얼마나 아파하다가 세상을 떠났는지. 그는 밸브라도 열린 듯 슬픔을 콸콸 쏟아냈다. 그는 한참 울다가 눈물을 훔치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애완동물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한 건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술이란 그런 것이다.
그뒤로 술자리에서 우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가끔은 헷갈리기 까지 한다. 술을 마시기 때문에 우는 것일까, 울고 싶어서 술을 마시는 것일까. 어떤 친구는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서운한 점이 있다고 욕을 하다가 술이 들어가더니 이내 보고 싶다고 울기 시작했다. 술의 마법이다. 어떤 게 본심이었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어른이 되면 함부로 울기가 쉽지 않은데, 술은 꽉 여며놓은 감정의 포대를 살짝 열어주는 도구인 것이다. 그날 친구는 펑펑 울었고, 속에 있는 이야기를 모두 꺼내놓았다. 그동안 나에게 차마 말하지 못한 이야기도 술이 들어가니 술술 나왔다. 나도 술을 함께 마시면서 친구를 안아 줄 수 있었다. 맨 정신이라면 쉽지 않았을 거다.
울고 싶은 날, 나도 술을 마신 적이 있다. 슬픈 일이 있으면 이상하게 "아 술 땡긴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렇다, 나는 술을 지독하게도 못 마신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술이 당긴다. 그럼 가장 믿음직한 친구에게 연락을 한다. 술 마시고 싶다고, 술을 사달라고. 친구는 다른 약속을 제쳐두고 나를 만나러 온다. 갑작스럽게 생긴 술 자리는 서로에게 낯설면서도, 가장 따뜻한 자리다. 친구는 나를 위로해줄 준비를 하고 술 자리에 나오고, 나 역시 위로 받고 싶어서 나간다. "야야,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마셔" 이 말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친구의 술 강요(?)가 고맙다.
가끔은 술 자리에서 흘리는 눈물을 다음날 후회할 때도 생긴다. '벽찬다'는 표현을 쓴다. 너무나 솔직했던 내 자신이 부끄럽고 숨기고 싶어진다. 그런데 벌어진 일이다. 그럴 수도 있다. 술을 마실 수도 있고, 슬플 수도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면 고민하던 일, 울었던 일이 별 일이 아니게 된다. 술 자리의 쪽팔림은 서서히 사라지고 함께 슬픔을 나눴던 친구가 생각난다. 그리고 나도 술 자리에서 누군가 슬픈 일이 있을 때 모든 걸 제쳐두고 뛰어가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한다. 눈물 한 잔에 술 한 잔. 술은 가끔은 고마운 마법을 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