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에에에에에엑
내가 술을 마시는 걸 꺼리게 된 이유는 아마 술을 마시고 토한 경험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내 인생에서 몇 가지 인상 깊었던 토했던 기억을 끄집어 내본다.
술을 마시고 처음으로 토했던 건, 수시 합격을 해놓고 대학 입학만 기다리고 있던 20살 겨울이었다. 그 무렵에 나는 집 근처 농업기술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띵가띵가'를 하고 있었다. 놈팽이였던 나를 부른 건 오랜만에 연락 온 고등학교 친구. 당시에도 썩 술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정확한 주량을 알 만큼 많이 마셔본 적도 없어서 냉큼 나갔다.
기억에 안 남는 적당한 호프집이었다. 그곳은 생맥주만 팔았다. 주량이 센 친구를 위해 생맥주 3000을 주문문했는데 갑자기 친구가 주변을 살피더니 가방에서 술병을 꺼냈다.
아, 핸드백 속에서 주섬주섬 꺼낸 소주병. 악몽의 시작이었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도망가야 했다는 걸. 친구는 내 잔과 본인의 잔에 맥주를 채워주고 그 안에 소주 1병을 까서 넣었다. 물론 초록색 병은 블랙홀 같은 친구의 핸드백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금은 시간이 오래 흘러서 그날 일이 정확히는 기억나질 않는다. 술 자리의 분위기나, 술집의 이름이나 뿌옇기만 하다. 다만 그날 먹었던 안주가 낙지볶음이었다는 건 아직도 생각난다. 왜 기억하냐고? 나도 기억하고 싶진 않았다. 먹던 걸 술집 변기에서 그대로 봤는데 어떻게 기억이 안날 수 있을까. 술 마시고 구토를 하니 목구멍이 저릿저릿하고 입에서 쓴 맛이 났다. 술 취한 사람이 으레 그렇지만, 왜 우는지도 모르게 펑펑 우는 친구와 분위기에 휩쓸려 같이 우는 나를 태우러 온 엄마가 타박하는 잔소리도 기억이 난다. 그리고 집에 가서 몇 번을 더 토하고 술 때문에 심장이 쿵쿵거려서 꼴딱 밤을 세웠다. 한동안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두번째로 인상 깊었던 구토 기억은, 회사 입사 직후다. 제목만 봐도 왜 악몽인지 알테지. 그때는 코로나19도 아니었어서 정말 '오지게' 술을 마셨다. 일주일에 세번은 새벽 2시까지 회식을 한 적도 있고, 오늘은 이 선배 술 자리에 갔다면, 다음날은 저 선배의 술 자리에 가는 식으로 움직였다. 물이 술 같고, 술이 물 같았다. 그해 1년 마신 술이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마신 술보다 더 많았다.
내가 가장 어려웠던 술 자리는 폭탄주를 빡세게 말던 선배의 술 자리였다. 그 선배는 특제 폭탄주를 말았다. 소주8, 맥주2의 비율로 일반적인 폭탄주와 비율이 역전된 폭탄주. 이 폭탄주의 색깔은 소맥 색깔이 아니라 소주에 맥주를 한 방울 탄 것 같은 옅은 황금빛이 감돈다. 술을 못 마신다고 말씀드렸지만, 선배는 이런 거도 마실 줄 알아야 한다며 술을 권하곤 하셨다. 문제는 내가 주량이 소주 세잔이라는 점이었다. 선배의 기량에 한참 달렸기 때문에 노력해서 마셔도 '술 빼는 녀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꽤 그 선배에게 몇주를 시달린 나는, 하루는 이번에는 안 빼고 마셔봐야겠다고 단단히 결심을 했다. 회식 장소는 횟집이었다. 의식처럼 선배는 폭탄줄르 말기 시작했고, 문제의 폭탄주를 세잔인가를 연거푸 마셨다. 그리고 곧 참사가 버려졌다. 그 자리는 상사들이 동석한 부서의 공식적인 회식자리였다. 차마 화장실 갈 틈도 없었다. 테이블에 모든 것이 쏟아져버렸다.
구토할 줄 몰랐던 나는 앞접시를 황급히 받쳐놓고 토악질을 했다. "죄송합니다, 웨에엑, 죄송합니다." 구토를 하면서 죄송하다고 했지만, 구토는 눈치 없이 멈출 줄을 몰랐다. 사람들은 처음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내 모습을 못 본 척 했다. 그런데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우에에에엑'을 반복하는데 그걸 언제까지 견딜 수 있겠는가. 당연히 회식 분위기는 엉망진창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파했다.
밖으로 끌려나온(?) 나는 그뒤로 전봇대에서, 택시에서, 집 앞에서, 집 욕실에서 연거푸 구토를 했다. 택시에서 구토한 값은 날 데려다준 선배가 전부 부담했다... 덕분에 그 선배와는 이전보다 친해지게 됐지만(?) 선배도 나도, 잊고 싶은 기억이다.
아, 그날 이후로 폭탄주를 말아준 선배는 트라우마가 생겼다며 나에게 술을 강권하지 않는다. 그날 선배가 입 벌리고 내가 토하는 모습을 쳐다보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올해다. 술을 소개하는 기획 기사를 맡으면서 전국을 출장 다녔는데, 경기의 모 양조장에 방문한 적이 있다. 내가 마신 것은 도수가 상당히 높은 진이었고, 양조장 대표는 진을 탄산수에 타줬다. 그게 또 완전 내 스타일인거라. 거기에 막걸리까지 얻어 마시고 이미 내 주량을 넘어선 꽤 취한 상태로 일을 마치고 귀가를 시도했다(보통 이런 때는 저녁 6시도 안된 시점이다).
그런데 그날의 나는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탄산수에 술을 타면 술이 늦게 올라온다는 것을 간과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고 있는데 갑자기 구토감이 치밀어 올랐다. 입을 틀어 막았지만 속에서는 받지 않는 술이 용암처럼 치밀어 올랐다. 이대로면 영화 <엽기적인 그녀>처럼 지하철 안에서 토할 거 같아서 서둘러 내렸다. 그리고 철로에다가 구토를 했다(개진상).
경의중앙선은 스크린 도어가 없는 일반 지하철이었다. 당시 나는 화장실까지 가기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술을 마신 상태였다... 철로에 있던 안전 요원이 달려와서 토하는 것을 지켜봐주고(ㅠㅠ) 괜찮냐고 물을 정도였다.
그뒤로 지하철에서 세번을 내려서 구토를 했다. 아, 이대로는 안 될 거 같아서 귀가할 때까지 거리가 한참 남았는데 경기도에서 택시를 잡아 탔다. 비용은 상관 없었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뒷자리 좌석에 누워있기만 하면 그래도 집에 갈 때까지는 꽤 버틸 수 있을 거 같았다.
응, 당연히 아니었다. 내가 미쳤었나보다. 그날 길이 유난히 막혀서 택시가 섰다, 갔다, 섰다, 갔다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마침 택시는 아주 더워서 허브가 들어간 술의 냄새를 끊임없이 불러일으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게는 봉투가 있었다. 한참을 멈췄다, 달렸다 하는 택시 안에서 봉투에 대고 구토를 하고 말았다....
....아. 달리는 차 안에서 구토라니 정말 최악이었다. 봉투 안에 구토한 내용물이 넘실 거렸다. 지옥 같았다. 택시 아저씨께 죄송하다고 말하며 구토 봉투를 어떻게든 처리하려고 했는데, 택시 아저씨는 물티슈를 주면서 괜찮다고, 그럴 때도 있는 거라고 위로를 해주셨다. 술 기운에 울컥해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토한 것도 나고, 진상 손님도 나인데 괜찮다고 하시다니. 사실 택시에서 토하면 15만원까지 부담해야 하는 일일 수도 있고, 나도 그 정도 부담해드리려고 말씀 드렸는데 택시 기사님은 애써 사양하시며 요즘 직장인들이 힘드니까 이해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에게 나중에 고마움을 다시 표현하긴 했지만, 그때 느꼈던 죄송함과, 목이 써질 때까지 나왔던 구토는 잊질 못한다...
물론 나는 평소엔 토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모든 토하는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올 연말까지는 다시는 술 때문에 토할 일이 없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