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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수 Mar 22. 2024

[100-18] 우리의 스케이트를 신나게 타요

 그림책 선/ 이수지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 '선'은 글밥이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 표지에 제목조차 없이 둥글둥글한 선뿐이에요. (요즘 나온 책에는 표지에 제목이 있더라고요.) 표지를 넘기면 오른쪽 페이지에 도화지 위에 연필가 지우개가 보여요. 다시 한 장을 넘기면 비로소 '선'이란 제목이 보이고요. 작가의 이름은 선의 ㅅ 아래로 길게 연결되어 있는데요. 도화지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나타내는 것 같아요. 


빨간 모자를 쓰고 빨간 장갑을 낀 아이가 스케이트를 타요. 얼음 위에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가 비쳐요. 아이 뒤에는 스케이트를 타고 지나온 자국이 구불구불해요. 아이가 신이 나서 스케이트를 탄 자국은 때로는 굵게 가늘게 때로는 오른쪽으로 때론 왼쪽으로 굽이칩니다. 우리의 스케이트는 무언가요? 어떤 사람은 그림을 그리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음식을 만드는 것일 수도 있지요. 우리가 신이 나서 그림을 그리고 음식을 만들듯 아이는 신이 나서 뱅글뱅글 돌아요. 미끄러져 넘어져요. 모자가 벗겨져 날아가요. 우리도 넘어져봤지요? 실망을 하고 주저앉아도 봤잖아요? 그래서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지요.


이 페이지를 넘기면, 오른쪽 페이지에 구겨진 도화지가 놓여있습니다. 이제까지 아이가 스케이트를 탄 흔적이 그려진 도화지예요. 이 구겨진 도화지 옆에 닳은 지우개가 놓여 있고 주변에는 지우개똥이 널려있어요. 아이가 넘어져서 실망했나 봐요.  연필이 구겨진 종이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여 있는 것을 보면요. 이는 아이가 스케이트를 타야만 구불구불 흔적을 남길 수 있잖아요. 


우리도 가끔은 아무것도 못할 때가 있지요. 그렇다고 해도 우린 다시 일어나 우리 자신의 스케이트를 타지요. 세 빨간 모자를 쓰고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도 마찬가지예요. 아이는 넘어진 뒤에야 다른 아이가 스케이트를 타다가 넘어지는 것을 발견해요. 아이는 스케이트를 타다가 넘어지는 것이 저 혼자만 겪는 일이 아니고 또 슬퍼할 일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웃지요. 


우리가 아프고 고통스러울 땐 우리의 시선이 온통 자신을 향해 있죠. 그래서 주변이 안 보이지요? 하지만 이 상황을 극복해 가면서 주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지요? 이 아이도 그래요. 넘어져 본 아이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스케이트를 타고 있어요. 전에 스케이트를 타다가 넘어진 아이가 이 아이를 일으켜 줍니다. 아이는 다시 빨간 모자를 쓰고 아이들과 어울려 신나게 스케이트를 탑니다.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 선은 글자가 하나도 없지만, 우리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우리가 우리의 스케이트를 신나게 타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타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탄다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겠죠. 아이가 스케이트를 탄 흔적이 구불구불 남아 있듯이요. 우리 최선을 다해 우리 각자의 스케이트를 타고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우리 삶의 흔적도 구불구불 남아있겠죠. 아름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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