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길이 외로울까 봐 동행자를 찾는다. 그가 나의 그림자 속에 들어오면 나의 길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 함께가 된다. 같은 방향을 향해 두 발로 한 마음으로 걷는다.
그를 만나는 순간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 내 화선지에 사랑이라는 색깔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그 사랑의 도파민이 넘쳐 흐르면 주체하지 못하고 곧바로 얼굴에 표시가 난다. "나 요즘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라고 말이다.
지금은 나의 아내가 됐지만 한 때는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며 사랑앓이를 하던 시절도 있었다. 데이트 할시 그녀는 나를 어떻게 불렀을까?
자기야?
길남 씨?
나를 불러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없다. 구태여 호칭이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만나면 우리는 껌딱지처럼 붙어 있거나 서로 마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을까? 역시 기억이 없다. 아니 말한 적이 없었던 게 확실하다. 나는 그 한마디를 듣고 싶어, 그녀의 감정을 훔치려고
조용한 야외로 나가 같이 걸어도 보고,
해가 저물면 잔디밭에 누워 밤하늘에 별도 세보고,
러브스토리의 주인공 올리버와 제니 같이 눈밭에서 뒤 궁굴지는 못했지만 눈 오는 밤거리를 걸어도 보고,
우산 속에서 두 연인이 꼭 껴안으며 걷고 싶어서 비 오는 날 이런저런 핑계를 만들어 데이트도 해 보았지만
내가 기다렸던
“사랑한다”
는 말은 없었다
나를 “자기야”하고 살갑게 불러준 적도 없고,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었는데도 그녀의 울타리 안에 갇혀
그녀의 사랑 노예가 돼버린 것은 어떤 연유였을까?
그녀의 말이 없는 조용한 사랑.
날씨가 쌀쌀한데도 허접하게 옷을 입고 다니면 그녀는 손수 목도리를 만들어 내 목에 걸어 주었다. 그녀의 온기가 겨울 내내 나를 따뜻하게 지켜준다. 내 여인의 상표가 붙어있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목도리다. 한 올 한 올에 그녀의 정성이 담겨있어 백화점에서 수십만 원 주고 산 목도리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소중하다.
길거리를 같이 걷다가 그녀가 내게 묻는다
“여기 어때?”
스테이크 하우스다.
나름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저녁식사를 하잖다. 식사를 하면서도 티키타카가 잘된다거나 케미가 맞아 분위기 있는 데이트도 아니었다. 그냥 내가 맛있게 먹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오늘 만남은 성공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보였다
말이 없는 두 연인의 사랑은 남들이 봤을 땐 무슨 재미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만날 때 얼굴 표정만 보면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고 헤어질 때는 두 사람이 얼마나 아쉬워하는지를 읽을 수가 있었다.
그녀는 우리의 사랑에 확신을 갖게 됐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도 남 달랐다. 친구 민정이, 기옥이, 옥주가 나를 만나보고 싶어 한단다. 이제는 주위에 우리 사이를 공개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녀의 친구들과 만나서 얘기하다 보면 그녀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의 친구 기옥이가
"우리 희정이가 그렇게도 좋아한 남자 친구 길남 씨를 만나서 반가워요"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 놀라지도 않는다.
언제?
두 달 후
준비할게요
우리의 화법은 마치 변호사 나 형사들과도 같았다. 미사여구도 없고 포인트만 주고받는다.
아내가 준비한 결혼 선물 중 가장 특이하고 궁금한 게 6세트의 포크와 나이프였다. 수저와 젓가락이었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포크와 나이프를 보는 순간 "내 처지에 언제 저런 것들을 사용할 기회가 있겠어?" 했다. 그녀에게 물었다. 왜 2세트가 아니고 6세트냐고. 대답 대신 지긋이 웃기만 한다. 다그쳐 묻지도 않았다.
혹여 자녀계획이 4명?
그렇다면 그 조합은? 딸 둘, 아들 둘?
둘 만 낳아 잘 기르자는 세상인데 --------
단풍구경차 둘이서 장성 내장사로 나들이를 갔다. 사찰까지 걸어 들어가면서 그녀가 포크와 나이프에 관한 얘기를 꺼낸다. 어느 날 스님이 시주차(당시에는 쌀을 스님에게 주는 것을 시주라 함) 그녀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녀를 보자마자 어머니를 향해
"이 애는 나중에 시집가서 여기서 살지 않고 외국으로 나가서 살 것입니다"
했다는 것이다.
딸이 시집가면 외국에 나가서 살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스님이 툭 던지고 간 "그 한 마디"를 기억하고 싶었는지 결혼 살림살이를 준비하신 어머니께서
"희정아, 오늘은 특별한 너의 결혼선물을 사고 싶구나, 나와 함께 가지 않을렴?"
백화점에서 어머님이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고서 나에게 맘에 드냐고 물으신다.
"엄마, 웬 포크와 나이프야?"
"스님이 너에게는 이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더구나"
그런데 왜 6세트냐고 아내에게 물었다
"나도 당신과 똑같이 궁금했어"
친정어머니께서는 대답을 않고 빙그레 웃고만 말았단다
그런데 둘째를 낳고 난 후 친정집에 들러
"엄마, 우리는 애를 너 낳을 계획이 없어. 아들 둘이면 족해" 했더니
"내가 사준 포크와 나이프는 6세트였는데" 하시더란다.
두 모녀의 속내가 풀리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