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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제이 Nov 30. 2022

너희가 아빠를 아느냐

아빠란 무엇인가?

요즘 아빠들은 참 잘한다. 필자도 노력하는 아빠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요즘 아빠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돈 잘 벌지, 똑똑하지, 요리 잘하지, 심지어 빨래와 청소까지 완벽하다. 애 낳는 거 빼고 웬만한 일들은 여성보다 잘한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삽질하고 괭이질하는 것 빼고는 웬만한 남성들이 하는 일은 모두 한다. 명실공히 슈퍼맘이다.


지금은 좋은 아빠, 착한 아빠, 멋진 아빠들이 수두룩 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무서운 아빠, 힘든 아빠들이 많았다. 새벽에 나가셔서 저녁 늦게 들어오시는 아빠, 주말도 휴일도 없이 일하시는 아빠, 월급날이면 까만 봉투에 통닭을 한 마리 사 가지고 오시는 아빠, 가족사진 한 번 찍을 여유도 없이 바쁘게 살아오신 아빠.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아빠들은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 것 같다. 물론 해야 할 일은 더 많이 늘어났다. 부모님이 살아오시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것이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저축하며 사는 삶이 잘 사는 것인가? 소비하며 사는 삶이 잘 사는 삶인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에 의심은 없었지만 그것이 행복한 삶과 항상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에 회의가 들기도 했다.


옆 집 아들처럼 공부해서 대학을 가고, 졸업해서 취직을 하고, 취직하고 결혼을 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잘 키우는 것. 이것이 한 줄로 요약되는 인생이고 행복인데 그 과정이 생각처럼 간단하지는 않다. 첫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감동은 생각보다 짧고 무거운 책임감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삶은 전투적으로 바뀐다. 경주마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유를 먹이고, 젖병을 삶고, 새벽에 응급실을 찾아다니고, 크고 작은 질병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다. 퇴근하고 집에 오니 아내는 안방에서 불을 끄고 울고 있다. 나도 힘이 들지만 더 힘들어 보이는 아내의  어깨를 주무르고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며 새벽을 맞이 하기도 한다.


회사는 늘 바쁘다. 어느 때인가부터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아버지의 모습처럼 일을 하고 있다. 정시퇴근은 희망고문이 되었고 반복되는 야근과 주말도 반납해가며 일을 해야 하는 날들이 늘어간다. 자존심 같은거 버리고 로보트 처럼 산지는 이미 오래다. 육아도 회사일도 익숙해 질만 하니까 둘째가 태어나고 또 한 번 힘든 과정은 다시 반복된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기저귀 갈고 젖병 삶고 응급실 가는 일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삼시 세 끼를 챙겨 먹여야 하고 학교생활이 서툴러서 학습에 신경 써야 하고  인성, 교우관계도 관심을 갖아야 한다. 가끔 게으름도 피우고 싶고 아무도 없는 산속에 들어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런 행복한 잡생각도 오래 할 틈을 주지 않는다.


한 참을 고민해야 겨우 풀 수 있는 아이들의 수학 문제들과 아무리 생각해도 출제 의도를 알 수 없는 복잡한 언어 구성으로 만들어진 국어 숙제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숙제를 할 수 없을 만큼 교과 과정이 어려워졌고 문제는 복잡해졌다. 그래서 학습에도 양극화가 심해졌다.


야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 아이들 학습을 도와주어야 하고, 주말에는 자전거를 타주어야 하고, 축구를 함께 해야 한다. 그림을 좋아하지 않지만 미술관도 한 번씩 가야 하고 고궁도 둘러봐야 한다. 틈틈이 인터넷과 유튜브를 이용해서 요리도 배워야 한다. 앞으로는 요리 못하는 남편은 제명에 못 살 수도 있다. 찌개는 물론이고 각종 조림과 해물요리를 할 줄 알아야 하고 김치도 담을 정도의 궤도에 올라야 아내에게 이쁨 받고 살 것이다.



뒷동산 짱돌이. 뭘보냐? 살만하냐? 가끔은 얘가 부럽다


갈수록 노쇠해지고 기력이 떨어지는 어머니를 보면서 아이들에게 하는 것 반 만 이라도 어머니께 하면 어머니가 얼마나 좋아하실까 하는 생각을 한다. 죄송스럽다. 중학생 딸은 학교, 학원, 유튜브, 게임 등 공사다망하다. 아빠가 퇴근하고 돌아오면 방문을 열고 “다녀오셨어요?” 인사 한 마디하고 다시 방문을 닫고 숙제를 하고 공부를 한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빠와 대화할 주제가 사라졌다.


아침 식탁은 아빠가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지는 것이 아니고 딸이 등교하는 시간에 맞춰서 반찬이 세팅된다. 언제부터인가 서열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비가 오는 날에도 아빠는 비를 맞고 들어와도 아이들을 비를 맡고 들어오지 않는다. 물론 아빠도 아내에게 전화를 하면 아내가 마중을 나오겠지만 나까지 아내를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다.


보약은 역시 딸에게만 지어 주려나 보다. 나도 보약 먹을 줄 아는데. 물론 아내가 나도 먹으라고 말한다. 이때 눈치 없이 넙죽 받아 먹으면 안 된다. 내가 먹는다는 것은 아내도 먹어야 한다는 것이고 세명이 먹으면 아들도 빼놓을 수 없다. 괜찮다는 것은 "안 먹어도 무방하다"는 것이지 "먹지 않겠다"의 의미는 아니다. 괜찮다고 하면 내 것은 없어진다. 정확하게 표현해 주어야 한다. "안 먹어도 괜찮은데, 먹고 싶어"라고


아이들 교육 문제로 아내와 티격태격한 적이 있다. 아내는 생각이 "다른 것"이라고 했지만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틀린 것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라며 뭉뚱그려서 넘어 갈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른 것과 틀린 것을 혼동하면 안 된다. 틀린 건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다. 나도 실수를 하고 자주 틀리기도 한다. 틀렸다고 창피하지 말자. 오답노트를 적어서 다음에 안 틀리면 된다. 틀린 것을 인정하자.


조용히 일하고 밥 먹고 자고 출근하고 퇴근하는 아빠여야 한다. 있어도 없는 듯한 아빠, 없어도 있는 듯한 아빠로 존재해야 한다. 찾으면 가서 도와주고, 찾으면 가서 용돈 주는 아빠. 기복 없이 직장생활을 하며 경제적 안정을 책임지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는 아빠. 그런 아빠가 되어야 한다.  책상 위에 놓인 시계의 배터리처럼 쓰고 나면 버려지는 소모품이 되더라도 소리 없이 일해야 한다.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니는 지금도 아들 걱정, 며느리 걱정, 손주 걱정뿐이다. 아픈 사람이 안 아픈 사람을 걱정을 하는 관계가 부모 자식 간의 관계인가 보다. 그 상황에서도 양말 속에서 꼬깃해진 지폐를 몇 장을 꺼내며 밥을 사 먹으라고 돈을 꺼내어 주신다.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돈다. 평생을 일해서 자식들 먹이고 가르치고 노년에는 병이 들어 요양원에 계시면서도 통장에 있는 몇 푼 안 되는 돈을 꺼내서 주시는 존재가 어머니다. 미치게 슬프다.


아내가 아무리 남편을 사랑한다고 해도, 아이들이 아무리 아빠를 사랑한다고 해도, 내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는 것과는 또 다르다. 어머니가 내게 베푸는 사랑처럼 나도 아이들에게 그렇게 해야 하나 보다. 그게 부모의 숙명이고 굴레다.


퇴근하면 현관문으로 앞으로 달여와서 안기던 딸의 어렸을 때 모습을 상상하며, 퇴근하면 그 녀의 집 앞에 가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행복해했던 아내와의 연애 때를 상상하며, 그 기억으로 평생을 힘내며 살아야 한다. 물론 지금도 행복하지만 그 행복함 못지않게 힘겹다는 생각도 함께 있다. 그러나 이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이것 늘 공존하는 것이다. 이것도 지나갈 것이라고 믿으며 구두위에 먼지를 물티슈 닦아 내며 다시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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