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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의 덧없음

by JJ

먹고 치우고 설거지하고, 먹고 치우고 설거지하고 두 번을 반하니 하루가 끝났다. 궁중요리를 한 것도 아니고 구첩반상을 차린 것도 아닌데 주방은 뭐가 이리 요란하고 치울 것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하루종일 뭔가 열심히 한 거 같은데 밥 두 끼 먹고 설거지 한 게 전부다.


아내는 17년간 전업주부 생활을 마치고 몇 개월 전부터 직장에 나간다. 일과 가사를 함께 하니 힘에 부치는가 보다. 위로를 해주어도 모자랄 판에 또 한바탕 난타전을 벌였다. 승부는 무승부. 한 대씩 치고받았다.(언어로)

올해의 버킷 리스트 중 하나가 "마누라랑 싸우지 않기"였는데 목표가 깨진 지 이미 오래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배웠던 직업선택의 이유가 "자아실현"이라는 말은 뻥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기 싫어도 먹고살기 위해서 일을 한다. 나 때만 해도 요리 잘하는 남자들이 많지 않았다.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매일 새벽밥을 지으셨고 일을 하고 돌아오신 후에 저녁밥을 지으셨다.


그 와중에도 김장을 하셨고 각종 해물요리, 동치미, 찌게, 팥죽, 오곡밥, 모든 요리를 다 하셨다. 그렇게 일하시며 가사 하시며 4명의 자식을 키워 내셨다. 지금 생각하면 초특급 파워 울트라 슈퍼우먼이 아닐 수 없다. 휴일에 밥 두 끼 차려 먹는 것도 이렇게 기진맥진인데 그렇게도 많은 일을 해 내셨다는 것이 불가사의하다.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 강변유원지

아내가 17년간 전업주부를 했기에 우리 부부는 자연스럽게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분리되었다. 아내는 집안일에 최적화되었고 나는 회사일에 집중했다. 달리 말하면 나는 점점 가사(家事)와 멀어졌고 아내는 경력단절이 점점 심해졌다.


우리 회사 직원 중 한 친구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다. 학교 갔다가 집에 오면 배가 고파서 스스로 라면을 끓여 먹고 밥도 해 먹었다고 한다. 그렇게 요리를 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와이프보다 훨씬 요리를 잘하는 남편이 되었다.


17년간의 결혼 생활을 돌아보면 맞벌이는 필요한 것 같다. 꼭 경제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다. 아내도 아르바이트라도 하며 사회 활동을 해야 하는 것 같다. 물론 남편도 가사를 함께 해야 한다. 그래야 서로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진다. 외벌이로도 근근이 살 수는 있으나 외벌이만 하며 살기에는 시대가 너무 많이 변했다.


아내는 나에게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달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남편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다며 음식물 쓰레기는 꼭 아내가 버린다. 무슨 개똥철학인지, 어떤 이데올로기적 발상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음식물 쓰레기봉투는 건들지 말라고 하니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 어름치 도서관

아내는 열심히 가사를 했고 나는 바깥일을 열심히 했으나 그것이 꼭 바람직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시간이 오래될수록 나는 점점 가사에 무지해졌고 아내는 점점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이 되어 갔으니까. 인간의 마음이 참 간사한 게 아내가 알아서 하는데 굳이 내가 나서서 할 필요성도 못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기본적인 요리나 빨래, 청소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로 가끔 아내가 아프거나 없을 때는 집안일이 올스톱이 된다. 내가 허둥대며 해 봤자 하나 마나다. 그때 깨달았다. 맞벌이든 외벌이든 남자도 요리, 빨래, 청소 3종세트정도는 기본적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물론 세상이 좋아져서 요즘은 클릭 한 번이면 뭐든 다된다. 먹거리, 빨래, 청소.

돈만 있으면 다 된다. 애 낳는 거 빼놓고 여성이 하는 모든 일이 남성도 가능한 세상이다. 그래도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부가 일심(一心) 으로 함께하는 가사는 그 자체로서 가치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고무장갑을 자주 껴야 할 것 같다. 그것이 아내도 살고 나도 사는 길이다. 아, 그렇다고 본인이 가사에 완전 무지랭이는 아니다. 미비(未備)하나마 약간의 가사를 하고 있고 더 중요한 것은 열심히 노력 중이라는 것이다. 다만 아내의 만류로 중단되는 경우가 종종 있을 뿐이다.


그래도 힘쓰는 일은 내가 전부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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