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히 문을 닫은 카페 안에서
모든 불이 꺼져서 밖이 훤히 보이는 그런 시간에
홀연히 나를 비친 달빛을 보고 네 생각이 났다
네가 사라지길 바랐다. 널 죽도록 미워했고 그만큼이나 미치도록 사랑했다. 우리는 적이었고 시간을 함께하는 친구이기도 했지. 내게 죽어서도 값을 수 없는 빚은 네 목숨 값으로도 부족했지만 나는 겨우 네가 살길 바랐다. 내가 온 마음을 담아서 내뿜던 저주가 진심으로 효력을 잃길 바랐다. 나조차도 내 마음을 알 수 없었다. 널 만나서 처음으로 숨 쉬어 보았고, 너와 함께 있는 순간에 인간답게 살아보았기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네게서 도망쳤어. 도저히 얼굴 보며 내 삶을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널 떠나 먼 곳으로 아주 먼 곳으로 네 생각이 나지 않을 곳으로 네가 닿지 못할 거리만큼 떠났어. 사랑했지만 이어질 수 없던 슬픈 사랑이어서, 도저히 널 용서할 수 없어서. 혼자서 내가 사랑하던 널 두 눈에 고이 담으며 떠났지. 영문도 모른 채 네가 날 기다리며 애타길 바랐고 기댈 곳 없이 혼자 울길 바랐어. 그러면 조금은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로만 '이해한다'라는 가식적 이해 말고 몸소 아파가면서 느끼는 뼈저린 그 아픔을 느끼길 바랐어. 너조차도 이런 악독해 보이는 내 모습을 마음속에서 밀어내길 바라며 서로를 서서히 잊어가길 바라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어.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어. 널 내 속에서 몇 번이고 죽였지. 그래도 아직도 왜 내 마음 한편엔 푸른 시냇물 곁에 앉아있는 모습이 자꾸 떠오르는 걸까. 내 삶을 한밤중으로 바꾸어버린 너인데, 캄캄해서 도저히 보이지 않는 흑암을 내게 선사한 너인데 이제 조금 밝아지려 하는데 자꾸 네가 날 어지럽게 해.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게 매사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네가 밉고 미워.
"온 힘을 다해서 널 시기하고 미워해도 난..... 난 왜 다시 널 끌어안고 있을까. "
요동치는 검은 커피 속에 비친 달을 보며 눈물을 훔쳤다. 널 유리창에 적어도 보았고 지워도 보았다. 같이 살고 있을 날을 꿈꾸어도 보았다. 한낮의 꿈처럼 허망하게 사라질 것을 알았지만 그런 날이 오길 신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결코 이어질 수 없었던 우리의 연이 한 번이라도 다시 이어질 수 있게 해달라고 딱 한 번만이라도 다른 곳을 보며 걷던 우리가 한 번 더 함께일 수 있게 해달라고 우리가 다시 서로에게 인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널 위한 것 같은 내 기도였다.
그런 기도를 몇백 번쯤 한 어느 밤에 친구에게서 짧은 문자가 와있었다. 짧지만 강열한 문장들이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야, 넌 이제 그 애 장례식장에도 안 오기로 했냐?'
'그래도 부고 문자 봤으면 오는 게 예의야 빨리 와.'
숨이 가빠졌다. 가슴이 꽉 막혀 괴로워 미칠듯했고 온몸이 옥죄어오는 듯했다. 분명 숨은 쉬고 있었다. 이성을 잃은 채 카페에서 있던 복장 그대로 달려갔다. 달리는 중에 앞치마가 거추장스럽게 펄럭이자 얼른 벗어 버리고 달렸다. 발이 까지는 것은 대수도 아니었다. 그저, 그저 네 생각뿐이었다. 날 한밤중으로 내몰았던 널, 내 첫사랑이었고 내 모든 마음을 앗아간 너만 생각하며 달렸다. 그리고 도착했을 때 내 꼴은 꼴이 아니었지. 바로 오느라 갈아입지 못한 옷가지부터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로 네 앞에 섰다. 그래도 조금의 위안을 찾아보자면 입고 있던 옷들이 검었던 점 그 점 하나뿐이었다. 여러 꽃들 사이에서 활짝 웃고 있는 네 모습은 이질적이었다.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모습 이어서일까. 한참을 웃는 널 보고서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있었지. 그리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겠다.
잠깐 눈을 감은 것 같은데 이렇게 쉽게 나를 떠나버렸구나. 이러면 내가 너무 죄인 같잖아. 사과할 잠시도 주지 않고 떠난 널 미워할 수밖에 없잖아. 평생의 소원이었지만 이루어져도 내 마음은 나를 옥죄어와. 널 살릴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는걸 나도 알아서일까 꼭 널 내가 죽인 것 같아. 그토록 많이 마음속에서 죽였지만 이렇게 다시는 볼 수 없으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 네가 없어진 지 벌써 한 달이나 되었는데 나는 왜 아직도 이 시간만 되면은 그날이 생생할까. 달려가면서까지 제발 한 번이어도 좋으니 인사만 사과만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던 기도가 귀에 쟁쟁히 울릴까.
이따금 이런 꿈을 꾸곤 했어. 지금 바로 내 사랑이 오고 있을 거라고 죽었다는 것은 모두 가짜였고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나 아직도 잊지 못했나 시험해 본 것이라고 저기 앞에 있는 길모퉁이를 돌고 있을 거라고 조금만 걸어 나오면 가로등에 비친 네 모습이 보일 거라고 그리고 날 보며 환한 미소를 지을 것이라고.
"미안해. 미안해,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닿지 못할 너에게 겨우 내가 하는 사과였다.
결국 어두운 내 밤을 비춰줄 달로 돌아올 것이라곤 꿈에도 몰랐지. 쉬이 사라지지 않는 달빛이 되어 내 주위를 맴돌 거라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