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복숭아

by 석현준

짓물러 터진 복숭아에서 나는 향긋한 향이 코끝을 감돌다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애초롭게 가만히 서서 싱그럽기만 하던 그때가 그 애가 그리워 온다

콧속으로 스민 향처럼 상큼 달달하던 그 애의 계절이


질리도록 차갑기만 하던 나의 세상에 네가 들어왔다. 보이지 않을 것 같던 미래에서 네가 도착해 있었다. 마음씨가 곱던 널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 초록잎이 온 마을을 가득 매웠을 때 그때가 우리의 첫 만남이었지. 꼭 동화 속에서 나온듯한 얼굴을 가진 너를 보며 나의 여름이 시작됐다. 봄도 없이 곧바로 여름으로 건너뛰었다.


생기가 없던 나의 세계에도 풀들이 피어나기 시작하며 푸르른 초록이 내 마음을 정화해 갔다. 버려진다는 아픔을 잊게 만들었고 한밤중 같던 나의 미래에도 좁은 길이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크게 네가 노력한 것은 없었지만 모든 일이 잘 풀려갔지. 널 만나고부터 다시 살아갈 용기가 났어. 그리고 이맘때쯤 늘 다니던 복숭아 밭으로 널 데리고 갔다. 나무들 사이를 이리저리 해쳐가다 작은 개울가에 걸터앉았다. 가장 여름 같던 개울에는 이전의 폭우 때문이었는지 복숭아들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나무에 끝내 매달려있지 못하고 한껏 익은 복숭아들이 속살을 내보이며 천천히 떠내려갔다.


꼭 네게서 나던 향, 겉모습만큼이나 여리던 마음까지 복숭아는 너와 닮아있었다. 나는 개울 근처까지 팔을 뻗은 나무에서 아직 덜 익은 복숭아를 먹었다. 달콤한 과즙이 한가득 들었어야 하는 속살은 딱딱하고 떫었다. 나는 그것을 끝까지 먹었다. 씨만 남을 때까지 모조리 씹어먹었다. 그날밤엔 배탈에 긴긴밤을 뜬눈으로 지새웠고 배속에 있던 모든 것을 게워내었지. 네가 담겨있던 여름의 복숭아까지도.


아침이 밝아오고 매슥거리는 것을 참고 너를 찾았다. 사리진 너를 찾았다. 사라질 이유가 없던 너를 불렀다. 그중에 내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 마을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너는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런 애는 보지 못했다고 그리고 어제도 내가 혼자 다니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들도 나오기 시작했지. 허공에다가 뭐라고 말하는 내 모습을 본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럼 이제껏 귀신에 홀려서 살아왔다. 그 귀신은 내게 생기를 불어넣었고 다시금 날 살게 만든 것이다. 죽지 못해서 살던 나를 다시금 사람답게 만들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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