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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 점프!

by 장희은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한 겨울이지만 꼭 선크림을 발라야 하는 곳이라는 그 하얗고 넓었던 곳을 처음 마주했을 때,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인 것만 같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다는 스키장에 처음 가본 날이었다.


스키를 타는 아빠는 언니와 나에게 맞는 스키를 신겨주었다. 다리를 조이는 답답하고 딱딱한 신발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이 앞뒤로 길어진 발이 불편했다. 평지를 걸을 때면 다리를 벌려 앞뒤로 수시로 움직여줘야 움직일 수 있었다. 스키는 나를 내리막길보다 평지에서 더 움직이기 힘들게 만들었다. 그렇게 낯선 느낌과 함께 아빠에게 처음 배웠던 스키는 아빠의 성격대로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속도 조절을 하기 위한 A자 자세를 배우고 S자로 내려오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아빠가 먼저 출발하면 그 뒤를 언니가 따라갔고, 언니의 뒤를 내가 따라갔다. 하강이 아주 조금 익숙해질 때 쯤, 아빠는 바로 우리를 산 위로 데리고 올라갔다. 곤돌라를 타야 갈 수 있는 장거리 코스였다. 첫 놀이공원에 갔을 때 다짜고짜 나를 롤러코스터에 앉혀 다른 모든 놀이기구들을 우습게 여기도록 만들었던 아빠만의 방식이었다.


산 위로 올라가는 곤돌라 안에서 아빠는 언니를 바라봤다.

“잘 탈 수 있지?”

대답 없이 아빠를 보는 언니는 겁에 질린 표정이었고, 산 위에 올라가는 것을 탐탁치 않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언니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심장에 문제가 생겨 큰 수술을 받았다. 그 뒤로 아빠는 심장이 약한 언니를 더 건강하게 키워내야겠다는 다짐을 했고, 언니는 아빠의 기대에 부흥하며 자랐다. 언니는 심장이 약했지만 늘 나보다 달리기가 빨랐고 줄넘기를 잘 했다. 건강하게 태어난 나보다 체력도 훨씬 좋았다. 그래서 나는 늘 언니를 따라다녔다. 어렸을 적 언니를 생각할 때면 까만 피부, 마른 몸에 달리기가 빠른 운동 선수를 보는 것만 같았다. 아빠는 그런 언니의 모습을 특히 마음에 들어했다. 언니에게는 아빠의 다짐을 실현시키는 특별함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항상 언니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산 위에서는 그 넓은 세상이 보이지 않았다. 끝없이 내려가는 하나의 길만 보였다. 가파른 코스는 아니었지만, 매우 완만하지도, 짧지도 않은 코스였다. 겁을 먹은 언니와 나의 앞으로 아빠는 몸소 시범을 보여주고자 스키를 타고 내려갔다. 그리곤 아래에서 우리 둘에게 와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언니는 망설이고 있었다. 둘 다 선뜻 용기를 내어 내려가지 못했고, 그 상태에서 시간이 계속 흘렀다. 괜찮으니까 와보라고 이야기하는 아빠가 곤란해하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언니보다 먼저 내리막으로 발을 딛었다. 겁이 나는 마음에 힘껏 A자를 만들어 속도를 늦추었고, 천천히 아빠가 있는 곳으로 다다를 수 있었다. 언니는 먼저 내려간 나를 보고 용기가 났는지 곧바로 내 뒤를 따라왔다. 아빠는 먼저 내려온 나를 보며 웃음지었다. 그리고 코스를 내려가는 내내, 나는 언니보다 먼저 내리막을 내려가 언니가 내려오길 기다렸다. 마침내 코스를 완주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나는 점점 스키 타는 것이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이 하얗고 넓은 새로운 세계에서는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게 있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체감이 되지 않을 정도로 긴 시간동안 코스를 완주하는 데 결국 성공했다. 이후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할 때, 언니는 산에서 내려오는 코스가 너무 무서워서 처음에 내가 없었으면 내려가지 못했을 거라고 말했다. 그때 잠깐 신이 났던 내 마음은 질투 섞인 동경의 대상이었던 언니를 이겼다는 승리감에서 왔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처음 혼자만의 힘으로 두려움을 이겨냈던 성취감에서 왔던 것이었는지, 아직도 확실히 할 수 없다. 어쩌면 두 감정 모두였을지도 모른다. 답답하고 딱딱했던 스키부츠는 어느새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대로 점프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모든 것이 가볍게 느껴졌다. 그때 내가 진짜 점프를 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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