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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울 Mar 26. 2024

저는 교수님 강의라면 뭐든 듣고 싶어요.

내 전공은 간호학, 부전공은 요양보호사 양성 교육학이라고 해야 할까?


요즘은 어떤 것이 전공이고 어떤 것이 부전공인지 혼동이 될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강의의 부류가 나누어질수록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좁아지는 기분이 든다. 그건 “인간”이라는 두 단어로 모든 강의 방향이 모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요양보호사 양성 표준교재를 16년 동안 읽어가며 인간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알아가고 있었던 것 같다.  

   

“작가님은 인생 책이 있으신가요?”라고 묻는 질문에 늘 죄송하다는 답을 먼저 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할 수 있는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년 전부터 죄송하다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제가 강의하는 요양보호사 양성 표준교재가 인생 책입니다.”라고 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인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인간을 대하는 방법 또한 익히게 되다 보니 어떤 강의가 들어와도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었다.  

   

새로운 강의 제안을 받았을 때 두려움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었던 용기도 “인간”이라는 범주 덕분이다. 강의를 듣는 대상은 언제나 사람이고, 강의의 모든 주제도 역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람 마음을 열고 들어가는 방법, 들어간 그곳에 내 마음을 남겨두는 방법,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아스라이 그리움을 불러내는 방법 모두 조금씩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양보호사 양성강의를 시작으로 인지활동지도사 자격과정, 병원동행매니저, 생활지원사 양성 과정 모두 제자가 되어 수료하신 분이 있다.     

모든 수업이 종강되고  돌아가는 마지막 날 나를 찾아오셨다.   

  

“교수님, 앞으로 또 다른 강의를 준비하고 계신 것이 있으세요? 저는 교수님 강의라면 뭐든 듣고 싶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전해주시는데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했다. 내가 이런 말을 들을 만한 자격이 되는 사람인가 싶어서다. 그래서 대답 대신 질문을 드렸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교수님 강의를 듣고 나면 마음이 이상하게 움직입니다. 그 마음 때문인지 꼭 무언가를 해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대답을 하고 계신 제자샘의 눈시울은 살짝 붉은 기운이 돌고 있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마음에 대한 보답으로 한 번 안아드리는 일뿐이었다.   

  

“그럼요, 반드시 무언가를 하시게 될 거예요. 그 무언가가 선생님을 어디로 데려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 발걸음의 시작에 제가 동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난 어떤 강의를 하든지 지식만 전하는 강의는 지양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늘 마음속에 새기고 있는 문장도 있다.    

 

“강의에서 중요한 건 내용보다 목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목적이란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과 같다. 내가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강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돌봄이 주제다. 상황과 형태만 다양할 뿐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고 있다는 것은 변함없는 공통점이다.      


결국 돌봄이란 상대방에게 어떻게 사랑을 전해줄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제는 간호학, 요양보호사 양성교육학보다 전공을 하고 싶은 강의가 있다. 그건 “인간 돌봄교육학”이다.


이런 학문이 현재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전문가도 아니면서 들먹인다고 하겠지만 그런 말쯤이야 이제는 흘려보낼 수도 있다. 전문가는 이론으로 채운 내용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경험으로 터득한 실전을 가득 채운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배워서 터득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오로지 익혀가면서 터득하는 것이다. 나도  차근히 이런 과정을 쌓아가고 있다.  

    

아주 이따금씩 이런 생각에 확신을 가져다주는 제자들을 만나게 한다는 것은 옳은 길로 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다.   

   

나는 통찰력의 힘을 믿는다. 통찰력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사물을 꿰뚫어 얻고자 하는 유익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또 한 번 던진다.    

  

내가 믿고 있는 힘과 얻고자 하는 유익은 동일하다. 언제나 옳은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지침서이다. 여기서 말하는 옳은 방향 역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태도다.    

 

목적을 잃어버린 삶은 행복도 희망도 없다. 그러니 한 순간도 목적을 놓아서는 안 된다. 아니, 모르는 척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길게 보면 이 땅에서 살기 위해 주어진 시간이 될 수 있고, 짧게 보면 지금 이 순간 일수도 있다.     

 

이 목적을 모르는 척하지 않기 위해 옳은 방향은 늘 점검해야 한다.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면 빠른 속도는 아니어도 다른 길로 가는 일은 줄일 수 있다.    

 

내가 터득해 가는 통찰력도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내가 믿는 주님이 알려주신 삶의 목적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부터 나에게도 살그머니 내려앉고 있는 마음이 사랑임을 믿고 싶다. 삼 남매의 첫째이지만 할머니 손에서 외동딸처럼 자라다보니 나 밖에 모르는 사람이란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어른이 되고 자녀들을 키우면서도 나를 내려놓은 적이 없는 이유기도 다.      


그러나 이제는 나 밖에 모르는 사람에서 남도 알아가는 사람이 되고 있는 것 같으니 그저 감사하며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어느 제자분이 전해준 한 문장이 이리도 오래 내 가슴을 물들이고 있었던 것은 이렇게 글을 쓰기 위함이었음도 이제는 알게 되었다.   

  

“앞으로 어떤 강의를 하게 되더라도 잊지 않을게요.  내 강의라면 뭐든  듣고 싶다 했던

그 사랑을요.”       



무언가에, 또 누군가에게 싫증이 잘 난다면 그건 아마도 싫증이 잘 나는 성향이라서가 아니라 잘 마모될 수밖에 없는 부분만 골라서 좋아하는 성향 탓 일수 있다.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다. 아주 구체적이지는 않아도 그 사람이 가진 고유의 결, 태도, 에너지 같은 것을 찾아내어 그게 내 사랑의 진원지임을 인정한다면 반복되는 패턴에 지루해지는 현상은 줄어들 수도 있다. 내피부가 아닌 마음 깊은 곳까지 다가와 툭 건드리는 것들을 구분해내는 것은 나름의 훈련이 필요하질도 모른다.

<보통의 언어들> 김이나 지음   


그사람이 가진 고유의 결, 태도, 에너지는 마모될 수 없는 부분이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 수록 견고해 지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의 이런 부분을 들여다 봐줄 때 사랑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나 역시도 누군의 이런 부분을 들여다 보는 순간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써놓고 발행대기 중이었는데 오늘 아침 독서에서 만난 이 문장들이 이 글을 더 찬란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 괜시리 기분좋아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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