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내가 내게 묻는다. 넌 누구냐?
20대 대통령 선거와 그리고 8회 지방선거가 끝났다. 출마자들은 자기를 알리려 수없이 홍보했다. 거리는 현수막 홍수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대부분 펼침막이었다. 幕(막)이 懸垂(현수)된 게 아니라, 막이 펼쳐진 거다. ‘아래로 곧게 드리워진’게 아니라는 거다. 의미도 현수막이 아니지만.
1980년대 초, 쿠테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정의사회구현>을 看板(간판)으로 했다. 저들은 자신들의 정의롭지 못함을 감추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다. <정의>의 말뜻이 완전히 왜곡되는 순간이다. ‘국가를 일격 강타’(쿠테타)한 당사자들은 다른 사람이 그렇게 봐주기를 원했다. 자신들은 전혀 정의롭게 살지 못했으면서.
요즘 사회 구성원 모두는 어떠한 목적이든 자신을 알리는데, 온 힘을 쓴다. ‘간판’을 알리려 한다. 개인이든, 단체든 또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장이든 공공의 이익을 위한 공공기관이든, 정부든 모두 간판을 중요시한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개인과 사업장은 간판이 곧 이익과 직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공기관과 정부는 자신들의 정체성과 주요 국정과제를 알리려 한다.
이력서를 작성해 봤던 시간이 꽤 지났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고 하나) 이력서에 자신의 특장점을 알리려 이른바 ‘스펙’을 포함하기도 한다. 학력, 성적, 경력, 자격증, 공인 어학 점수 등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간판으로 내세울 수 있는 내용을 적는다.
그러나 만일, 누가 내게 ‘정체성’과 ‘실체’를 묻는다면, 어떻게/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무엇을 말하나? 이름을 말하나? 이력을 말하나? 학력을 말하나? 직업을 말하나? 경력을 말하나? 실적을 말하나? 묘비명에 쓰고 싶은 말을 하나? 아니면, 이 모든 걸 다 말하나?!
사람들은 나를 ‘이태승’으로 부른다. 부모님이 뜻을 담아 지어준 이름이다. 친구들이 부르는 영어식 이름도 있다. ‘아가 리’다. 입이 커서 부르는 게 아니다. 아가같이 귀엽다나, 곱다나. (다른 별명도 있다. 입 큰 개구리다). 내가 의지를 담아 지은 것도 있다. ‘뉠리 리’다. 백합같이 예쁘게 살겠다는 뜻이 아니다. 놀자는 뜻이다. 부르기도 얼마나 좋은가. ‘뉠리리야 뉠리리야 니나노~’.
변형된 인디언식 이름도 있다. ‘좋은 기운이 감도는 구름과 달(吉 雲月)이 오얏나무 위를 지날 때 우주에 넓게 펼쳐져(李 宇暢) 크게 이어가는(太承)’. 바쁘고 복잡한 현대에 실제로 그렇게 부르기는 쉽지 않겠지만. 정작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불리길 원한다. 내가 스스로 부여한 의미대로.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으로 말이다. ‘信行一致(신행일치)한 사람’. 내 의지와 가치를 담아, 내가 작명한 이름으로.
내 이름이 看板(간판)의 의미가 아니라, 懸板(현판)의 의미로 다가가고 싶은 게다. 현판에 있는 대로 불리길 원한다면, 현판에 쓴 의미대로 살아야 할 게다. 삶으로써 보여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보인 모습보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가치를 전하기 원한다면. 내가 삶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게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알리길 원한다면. 현판의 내용이 단지 장식이 아니라 자신이 실천으로 증명해내야 할 지침이라면. 삶의 이력이 그대로 묘비명에 쓰이길 원한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봐줬으면 좋겠는가? 당신을 보는 사람이 타인이다. 타인이 주체다. ‘간판’을 묻는다. 당신은 당신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춰줬으면 좋겠는가? 당신을 보는 사람이 당신이다. 당신 스스로가 주체다. ‘현판’을 묻는다. 볼 看(간)에 目(눈-목)이 들어있고, 매달 懸(현)에는 目(눈-목)과 心(마음-심)이 들어있음이 흥미롭다.
간판으로써는 ‘낙엽’은 단지 ‘낙엽’일 뿐이지만, 현판으로써는 ‘낙엽’이 ‘사랑’이 될 수 있다. 책갈피에 꽂아둔 ‘낙엽’이, 가슴에 묻어둔 ‘사랑’인 거다. 타인에겐 낙엽이지만, 내겐 사랑인 거다. “남이 보는 간판이 중요한 시대에, 자기 삶과 공간에 뜻이 담긴 현판을 거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다.”(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 연구원, 신지은). 이 한 문장이 내게 왔다. 그래서 쓴 글이다.
내 안에 내가 내게 묻는다. 넌 누구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