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을 때 무엇이 중요한지를 늘 생각하며, 잘 살아야.
이형우 <老眼(노안)>
일 났다
일 났다
할머니 만나면
바늘에 실 꿰라 하실 텐데
클 났다
클 났다
시인은 왜 ‘일 났다’라고, ‘클 났다’라고 할까? 할머니가 바늘에 실 꿰라 하시면, 실 꿰면 될 텐데. 시인 자신에게 노안이 와서 그런가? 그럼, 찬찬히 하면 될 일 아닌가! 바늘에 실을 꿰지 못할까 봐 그러는 건가? 그럼, 못 한다고 하면 될 일 아닌가!
독자들도 여기서 읽기를 잠깐 멈추고, 생각해보길 바란다. 시인이 왜 ‘클 났다’라고 하는 가를! 다시 위로 올라가서 시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도 좋겠다. 자신의 공감 능력을 스스로 점검하는 좋은 시간이 될 수 있다. 그러니 꼭 해보길.
시인에게 노안이 왔다. 바늘귀가 잘 보이지 않는다. 육신의 보는 힘, 視力(시력)이 떨어진 거다. 바늘에 실을 꿰지 못해 할머니를 도울 수 없을까 걱정한다. 그 상황을 마음의 눈으로 본다. 볼 見(견)이다.
그런데 시인은 한 발 더 들어간다. 그래서 ‘클 났다’라고 하는 거다. 손주인 자신에게 벌써 노안이 왔음을 할머니가 아시면, 할머니가 얼마나 안쓰러워하실까를 시인은 느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손주를 걱정하는 마음을, 외려 시인은 할머니를 향한 깊은 애정의 눈으로 보는 거다. 볼 觀(관)이다. 사람 관계에서 ‘본다.’의 의미가 다양한 깊이로 해석됨을 알 수 있다.
본다는 건 참 중요하다. 다른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다. ‘멸치와 눈을 마주친 사건’ 말이다. 멸치와 눈을 마주함으로써 사람 마음에 변화가 생기는 사건 말이다. 육체의 눈과 그리고 마음의 눈 그리고 공감의 눈으로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가 있다.
아주 친한 사이라 해도 다툼이 있거나 어떤 이유로 어색한 사이가 되면, 제대로 눈을 마주하기가 쉽지 않다. 한집에 사는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몇 초 이상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눈을 마주치질 못한다. 자신의 감정이 눈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보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본다.’라는 건 삶 가운데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살짝 빗나간 이야기다. 남자들은 여자를 만났을 때, 여자가 자신을 혹시 무시하지 않을까를 두려워한단다. 여자들은 남자를 만났을 때, 남자가 자신을 혹시 죽이지 않을까를 두려워한단다. 男嫌(남혐)과 女嫌(여혐)이 대립하는 시대 현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아니 실제로 체감하는 남녀 간의 (시/견/관)점 차이를 일정 부분 반영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無視(무시)했다’라는 의미가 그토록 중요한 건, 서로서로 눈을 마주할 대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한쪽이 ‘무시’함으로써 자신을 깔보고 또는 업신여겼다고 느끼는 데에 있다. 남자가 그렇게 ‘느끼는 게’, 그 자체가 남자가 지닌 왜곡된 인식이라는 거다.
이와 같은 말이 남혐/여혐 사회 현실을 반영한다고 누군가 억지로 만든 말이라 할지라도, 남자들은 심각하게 숙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무시와 죽음이 대등한 관계라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속엔 이미 여자를 남자와 동등하지 않은 존재로 인식하는 관점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뱀 다리다.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漢字(한자)에는 일반적으로 女(녀)자가 들어있다. 여기서도 嫌(혐)자에 女(녀)가 들어있다. 동서고금를 막론하고 남존여비 사상은 뿌리 깊다. 사회 전반에 걸쳐 고쳐야 할 건 빨리 고쳐야 할 거다. 나도 알게 모르게 나오는 행동과 말로 인해, 딸에게 수시로 교정을 받으며 즐겁게 배우고 고쳐 가는 중이다.
오늘(2022년 7월 10일), 넷플릭스를 통해 다큐멘터리 <알피니스트-마크 앙드레 르클렉>를 봤다. 높은 산 빙벽과 암벽을 오르내리는 알피니스트 마크의 삶을 다뤘다. 어려서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를 겪은 마크는 여러 가지 이유 등으로 알피니스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마크는 빙벽과 암벽을 오르내리면서 그 산과 교감한다.
여자 친구와의 교제도 마찬가지다. 마크와 여자 친구의 공감이 중요한 내용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마크(1992년~2018년)는 26세의 나이로 현재 주검이 빙하 속에 있다. 산을 다 오른 후, 하산하다가 눈사태로 휩쓸렸다. 알피니스트들은 마크를 최고(?)의 실력자로 인정한다.
여자 친구의 마지막 말이다. ‘죽음의 자리에 함께 있지 못하는 게 아쉽다.’ 마크와 공감하며 살았던 친구가, 마크의 죽음까지도 공감하며 함께 하고자 하는 모습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했다.
알피니스트는 말한다. 빙벽과 암벽을 오르는 일은, 곧 죽음을 전제로 한다. 죽음이 가까이 있기에 고산을 오른다는 거다. 외려 그래서 의의가 있단다. 실제로 알피니스트의 절반이 사고로 죽었다.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항상 느끼며 사는 삶, 알피니스트의 삶이다. 그들에게는 빙벽과 암벽 그리고 高山(고산)과의 교감이 곧 삶이자 죽음이다.
병원에서 임종하는 환자들을 수많이 지켜본 의료진의 이야기다. 육체는 이미 다 쇠잔했음에도, 온 힘을 다해 호흡을 유지하려는 환자들이 많다는 거다. 별세 직전까지도 공감을 나누지 못한 환자가, 공감을 나눌 최후의 사람을 기다린다는 거다. 그 사람과 교감 또는 공감을 나눈 후에야 숨을 거둔단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죽음’에 관해 생각할 기회가 많아졌다. 내 부모님을 포함한 지인 부모님 별세와 그리고 친구 죽음 등이 그때였을 거다. 죽음이 멀리 있지 않음을 느낀다. 준비할 것이 있으면 마땅히 준비해야 할 거다. 마음부터. 혹여 내 죽음의 자리에 아무도 없는 상황이라도, 눈을 편히 감을 수 있을 정도로. 그러기 위해선 살아 있을 때, 무엇이 중요한지를 늘 생각하며, 잘 살아야 할 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