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속에서 듣는 빗소리
비는 다른 소리를 잊게 하는 대신,
잊었던 감정을 다시 듣게 만든다.
비는 말없이
하루의 여백을 채우고,
내 시선은 그 여백의 끝을 찾아 헤매다
네모난 창가에 멎었다.
느린 음표처럼 미끄러지는
우산들의 행렬,
투명한 악보에 쉼표를 남기는
유리창의 빗방울.
그 리듬에 맞춰 지붕을 두드리던 빗소리는
어느새 잊고 있던 심장마저 두드린다.
아, 이것은
오래된 가을의 박동.
수묵화의 먹물처럼 번져가는 마음의 무늬,
그 연한 자국이 따스한 커피잔 속에 녹아들 때
문득, 그 동그란 잔 속에서
하나의 우산이 떠올랐다.
다정한 지붕 같은 한 뼘짜리 우산 아래,
세상을 다 가진 듯했던 그 젖은 어깨.
그날의 빗소리는 유난히 조용했지.
비는 어쩌면,
오직 하나의 기억을 선명히 건져내려
세상 모든 소리를 잠재우는 것일까.
창밖의 비는 그치지 않았고,
내 안의 비도 그러했다.
골목마다 빗줄기가
은빛 실처럼 어둠을 꿰매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우산 아래
자신만의 하늘을 이고 걸어간다.
저 수많은 하늘 중,
어떤 하늘이 나를 부른 것일까.
어느새 눈동자가 젖은 풍경 속으로 뛰어들고
뒤이어 마음마저 속절없이 길을 잃을 때-
발밑의 작은 웅덩이가 문득,
하늘을 담은 동그란 눈으로 나를 본다.
떨어지는 빗방울에,
와르르 투명한 웃음을 터뜨린다.
아! 내가 잊고 있던 것은
눅눅한 슬픔이 아니었구나.
맨발로 온 세상을 악기 삼아 첨벙이던,
어린 날의 꿈 가득했던 그 웃음소리였구나.
비가 씻어낸다.
바깥 풍경만이 아니라
내 안의 풍경까지도.
행복은 꼭 쨍한 햇살의 얼굴만
하고 있지는 않구나.
비가 그치면,
세상은 갓 세수한 얼굴로 나를 보겠지.
나도,
이젠 맑아진 눈빛으로 화답해야지.
빗소리가 가르쳐준
나만의 노래를 부르며.
창밖의 거리가
별처럼 흩어져 반짝인다.
모든 게 젖고 나서야,
모든 게 비로소 빛났다.
그래서였을까,
그 빛 속에서 듣는
이날의 빗소리는 유난히 반짝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