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내리고, 눈이 피어도
너를 만나기 전,
나의 시간은 오지 않는 봄을
기다리는 굳은 땅과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너의 연둣빛 울음이
얼어붙은 세상 가운데
씨앗처럼 터져 나왔을 때,
나의 세상은 비로소 봄이 되었지.
넌 이내 보드라운 땅을 뚫고 나온 새싹이 되었어.
세상이라는 낯선 정원에 조심스레 내디딘
너의 작은 첫걸음마다,
꽃이 피어나던 나날들.
꽃잎보다 여린 손이 대지의 겉옷을
살며시 움켜쥘 때,
햇살은 그 작은 잎들 사이로 다정히
희망을 속삭여주었지.
그 손에 담겨 있던 희망이
얼마나 뜨거운 씨앗이었던지,
너는 어느새 종잡을 수 없이
열정적인 여름이 되었단다.
소나기처럼 까닭 없이 울다가도
쨍한 햇살처럼 온 세상을 향해
환하게 웃었던 그 여름날들이 기억나는구나.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는
녹음처럼 자라고,
무릎에 새겨온 장미 가시 같은 상처와
온몸에 흐르던 땀방울은,
네가 얼마나 뜨겁게
너의 계절을 통과하는지 보여주던
선명한 흔적이었지.
웃음소리는 계곡의 강물처럼 불어나고,
맨땅을 뛰어가는 발바닥은
태양처럼 뜨거웠던,
하루하루가 번개처럼 쏟아지는 날들이었어.
매미의 울음처럼 강렬하고도
짧았던 모든 순간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여름의 열기도,
끝없이 내리는 빗소리 같던 나날도
조용히 잦아들 무렵,
어느덧 너의 눈빛엔
깊은 단풍이 물드는 가을이 찾아왔어.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에 낙엽처럼 쌓여갔고,
너는 홀로 그 잎들을 밟으며
새로운 길을 걸어갔지.
꽃잎이 진 자리에는 단단한 열매가 맺혔고,
낡은 생각은 바람처럼 떠나보내며
너는 자신만의 빛깔로 더욱 깊어져갔단다.
실패가 마른 낙엽처럼 손에서 부서져도,
너는 그 서늘한 바람 속에서 기어이 배웠지.
뜨거운 땡볕을 견뎌야 곡식이 영글고,
푸르름을 비워내야만
그 자리에 황금빛이 채워진다는 것을.
그 충만한 빛을 가슴에 품고
너는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었고,
마침내 혼자만의 겨울 속으로 첫 발을 내디뎠어.
세상의 찬 바람 앞에 홀로 서기 위해
모든 잎을 떨구고,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서있었지.
아, 그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시작이었어.
너의 뿌리가 얼마나 깊어졌는지
보여주는 시간임을 나는 알았으니까.
어깨 위에 첫눈이 내려앉듯 시간이 무게를 얹어도,
거센 눈보라 속에서 너의 뿌리는 더욱 깊어지고
너의 눈동자는 동백꽃처럼 선명히 빛났어.
아이야, 내 작은 사계절아.
너는 봄처럼 아장아장 걸어와,
여름처럼 뜨겁게 머물렀고,
가을처럼 내 안을 가득 채우더니,
마침내 겨울처럼 눈부시게 나아갔구나.
아이야, 네가 오던 날부터
나의 모든 날들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이름을 얻었단다.
봄은 너의 시작이자 나의 새싹이었고,
여름은 너의 열정이자 나의 햇살이었으며,
가을은 너의 사색이자 나의 열매였고,
겨울은 너의 용기이자 나의 깊어진 뿌리였다.
꽃이 내리고, 눈이 피어도—
너는 내 모든 계절의 이유로 남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