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7일 오후 6시 퇴근을 준비하는데 갑자기 사무실이 웅성거린다. PC 화면 하단에 팀 직원이 메신저로 보낸 메시지가 꽂힌다. 2025년 상반기 00도청 과장급(4급) 승진대상자 사전예고 명단이다. 올 것이 왔구나! 숨을 죽이고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한다. 1989년 군대시절 사격 사로에서 숨을 잠시 멎고 표적을 향할 때의 그 호흡을 유지한 채 조심스럽게 메신저 첨부파일을 연다.
1페이지를 보니 행정직군 승진자는 총 14명이다. 저 14명 안에 내 이름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무실 공기가 무겁게 느껴진다. 국 주무팀장인 내 이름이 명단에 있으면 환호하고 여기저기서 축하인사가 전해질텐데 아무 반응이 없다. 혹시나? 하고 2페이지로 넘긴다. 아뿔싸! 내 이름은 없다. 3번 이상을 찬찬히 살펴보아도 이름이 없다. 승진자 명단을 다시 살펴본다. 총 14명 중 11명은 나보다 선임이고 1명은 동기, 2명은 후임이다. 사업부서가 아닌 자치행정국, 비서실 등 Staff 조직에서 총 5명이 승진하였다. 나를 더욱 슬프게 한 것은 2017년 5월 사무관인 나보다 후임인 2018년 3월 사무관이 벌써 승진자 명단에 이름이 있다. Surprise!oh my godness
얼굴히 화끈거린다. 직원들 볼 면목이 없다. 지난 1년간 국 주무과 주무팀에서 열심히 일하고 노력한 직원들 시선이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 같은 부담감에 더 이상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다. 서둘러 가방을 챙긴다. 직원들에게는 먼저 퇴근한다는 인사말을 건네고 지하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엘리베이터에서 아는 직원들 만나 인사발령 이야기로 어색한 대화를 하게 될까 두려워 서둘러 직장을 빠져나간다.
솔직히 금번 인사에서 승진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소속된 조직의 인사시스템으로 볼 때 통상 팀장(5급 사무관)에서 과장(4급 서기관)으로 승진하는데 빠르면 8년, 평균 10년이 소요된다. 내가 2017년 사무관이니 금번에 승진하면 빠른 승진이다. 그러나 퇴직까지 총 3년 6개월이 남았고 1년 공로연수기간을 감안하면 지금 승진한다 해도 2년 6개월 밖에 과장직을 수행할 수 없다. 그래서 더욱 조바심을 내는지 모르겠다.
더욱이 현재 담당하는 업무가 민선 8기 도지사 중점추진과제가 상당수 포함되어 언론에서도 각별한 관심을 받는 터라 실국 배정을 감안하면 승진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사업 지원부서인 자치행정국, 비서실, 기획조정실 등 스태프조직이 급부상하였다. 도민의 삶과 직접적 관련 있는 사업부서는 상대적으로 홀대받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하지 않는다. 더욱이 비서실 근무하는 2018년 후임 사무관이 통상적인 승진기간을 추월하여 4급 승진자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얼마나 일을 잘하였으면.. 부러움 반, 질투 반.
인사는 기관장의 고유권한이다. 공조직이나 사조직이나 이 사실을 부인하는 조직구성원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인사가 조직의 목표달성 및 조직운영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하면 기관장의 인사권은 원칙과 기준에 맞게 예측가능하고 공정하게 시행되어야 한다. 인사에 대한 조직구성원의 수용도가 낮을수록 조직에 대한 충성감이 희미해지고 견고한 조직으로 기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금번 인사가 특정 실국에 편중되지 않은 전체 조직을 아우르는 공정하고 포용적인 인사였으면 하는 짙은 아쉬움이 남는 이유이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심기일전하여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대응방안이다. 후배가 위로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건넨다. "형님. 이제 줄(Line)이 줄었으니 다음번에는 좋은 일 있을 겁니다". 후배가 말한 줄(Line)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14명 승진했으니 최소 14명만큼 순위가 올라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저 말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 연공서열, 선입선출 등 공직사회의 관행인 줄(Line) 승진문화가 유지된다면 향후 2년 내승진하리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과장은 언감생심, 5급 팀장으로 퇴직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공직사회 조직문화가 혁명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고강도, 저임금을 버티지 못하는 MZ 공무원들의 공직이탈현상은 가속화되고 있다. Chat GPT 등 AI기술의 발전으로 나 같은 50대 관리자는 업무기획은 차치하고 직원들이 기안한 문서를 이해하는데도 많은 시간을 소요한다. 그나마 공직사회를 관통하는 기본적인 동기부여체계는 MZ공무원이나 OLD BOY 공무원이나 다르지 않다. 바로 승진이다. "열심히 일하면 빠르게 승진할 수 있다"라는 조직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 조직안정성이 굳건하게 지켜져야 한다. 인사부서, 감사부서, 비서실 등 핵심 요직부서에 근무해야 승진할 수 있다는 사이비 믿음이 팽배하면 그 누구도 도민의 삶과 직결되는 부서업무를 기피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2024년 12월 3일 대통령의 비상계엄으로 대한민국이 상당히 어수선하다. 헌법이 규정한 헌정질서가 권력자들에 의해 존중되지 않는 상황이 개탄스럽다. 비상계엄권, 탄핵소추권, 재의요구권등은 남발하며 헌법이 규정한 헌법재판소 재판권 임명권은 정치적인 이유로 소극적으로 행사하고 있다. 또한, 대통령이 비상계엄 선포 시 국무회의에 참가한 국무위원들은 비상계엄의 부당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않았다. 그 결과 대한민국 국정은 혼돈의 블랙홀로 빠져들고 있으며 현 상황에 대한 국무위원들의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대통령의 국무위원 임명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良藥苦於口而利於病, 忠言逆於耳利於行"(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는 이롭고 충성된 말은 귀에 거슬려도 행동에는 이롭다).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대통령의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는 국무위원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이제 흐트러진 마음을 바로잡고 일상으로 돌아와 평상시와 같이 일해야 한다. 6개월 후 있을 인사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려면 지금부터 새로운 씨앗을 뿌려야 한다. 솔직히 씨앗 뿌릴 힘도 없지만 다시 한번 힘을 모은다.
승진에 울고 웃고 하는 것이 공무원의 운명인가 보다. 이제 3년이 지나면 내 인생에서 승진할 일도 없고.. 나름 현재의 좌절감이 인생을 살아가는 또 하나의 모티브가 되고 있다. 글을 마무리하며 마음을 바로잡는다. 마지막 힘을 내자. 서기관 승진. 그 까이거. 안 되면 그만이지! 마음속으로 외쳐보니 없던 힘이 불끈 솟아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