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잘 아는 의사와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것
낯설고 어색하지만, 어쨌든 우리 동네/ 소아과
아이가 태어나고 거의 1년 동안은 아픈 일이 없었다.
감기는 물론이고 콧물 한 방울 나는 일이 없었기에 나는 아가들은 생각보다 강하다고 생각했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1년 동안 소아과는 예방접종과 영유아 검진을 위해 들르는 곳일 뿐이었다.
딱 돌이 지나고 갑자기 상황이 달라졌다.
아이가 수시로 감기에 걸렸다.
감기약을 한참 먹고 감기가 떨어질만하면 다시 새로운 감기에 걸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아이가 걸리는 감기라는 게, 내가 알던 감기와는 사뭇 달랐다.
감기는 쉽게 모세기관지염이 되었고, 후두염이 되었고, 폐렴이 되었다.
아이는 감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입원을 하기 일쑤였다.
이 과정이 여러 번 반복되고 나자 콧물이 한 방울만 비추어도 심장이 덜컹했다.
이 콧물 한 방울이 이번에는 어떤 괴물 같은 존재가 되어 나와 아이를 괴롭힐지 두려웠다.
아이는 참 연약한 존재구나 생각했다.
아이마다 맞는 병원이 따로 있다 해서 동네에 괜찮다는 소아과는 차례차례 다 가보았다.
어느 병원에서는 조금 더 감기가 빨리 나은 것 같아서 그 병원을 몇 번 다녀보았고, 저 의사가 폐렴을 잘 잡는다고 하면 그곳을 내원해 보았다. 그렇게 우리 아이에게 잘 맞는 병원을 찾기 위한 길고 긴 여정을 떠났었다.
수많은 소아과와 수많은 의사들을 만났다.
어느 의사는 최대한 항생제를 적게 사용하려 애를 쓰기도 했고,
어떤 의사는 초장에 약을 세게 써서 잡아주는 게 오히려 낫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어떤 의사는 친절하고 다정한 말투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와 나를 위로했고,
어떤 의사는 심드렁한 말투로 약을 처방해주기도 했다.
몇 달이 지나고, 나는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네 친구들과 다 같이 산책을 나갔다 돌아온 날이면, 다른 아이들은 아무 일도 없이 멀쩡한데 나의 아이는 컹컹 기침을 했고, 이튿날 아침 하얗게 변한 폐사진을 보고는 입원을 했다.
한두 번은 '우연일 거야 운이 안 좋았던 거야. 이번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를 되뇌며 마음을 다독여보았지만,
이내 끊임없는 좌절을 겪으며 인정하게 되었다.
그는 그러던 와중에 만난 의사였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허무한 느낌이었다.
그는 아주 유명한 전문의였고, 여러 사람에게 넌지시 추천을 받았어서 이번엔 이 의사를 만나보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에 나의 아이가 기침을 시작했다.
당연히도 나는 예약은 못 잡았다.
이틀 전 자정에 열리는 예약시스템으로 예약을 잡아야 했었는데, 나의 아이는 기침이 시작되면 반나절 안에 급격히 상황이 나빠지는 아이였다.
예약을 잡지 못하고 무작정 현장접수를 하고 기다리기로 했다.
소아과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한 지하철을 연상케 할 만큼 사람이 많았고 두 시간이 넘게 기다려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울고 불고 지겨워하고 징징거리는 아이를 안아 들고 2시간 만에 들어가서는 2~3분 안에 진료가 끝났다.
그때의 감기나 빨리 나았는지 어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아이가 아플 때마다 이렇게 대기해서 만날 자신이 없어서 그냥 그렇게 그 병원을 포기하게 되었다.
집에서 꽤 많이 멀기도 해서 여러모로 진이 빠졌다.
그 후로도 나의 병원 쇼핑은 계속되었다.
내가 사는 곳에 갈 수 있는 반경 안에 있는 병원 중에 입원실이 딸린 병원들을 전전했다.
면역력을 높이는데 좋다는 이것저것들을 먹여보았고, 온도와 습도를 조절했고, 매일 먼지를 털고 청소를 했다.
그래도 여전히 아이는 계속 아팠고, 한 달에 절반 이상을 입원실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런 나를 안타깝게 여긴 지인이 나를 붙잡고, 제발 다시 꼭 그 의사에게 가보라고 간곡한 권유를 했다.
자신의 아이도 나의 아이와 비슷했는데 결국 돌고 돌아 그 의사에게 돌아갔다고.
대기시간이 두려워하는 나에게 예약을 하는 요령까지 알려주며 그분만큼 폐소리를 빨리 잘 듣는 의사를 찾기 힘들 거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못 이기는 척 다음 거친 파도가 왔을 때 그 의사를 찾아갔다.
아침 7시나 되었을까.
황망한 표정으로 소아과 대기석 소파에 앉아있는 나에게, 청바지에 야상점퍼를 입은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이가 많이 안 좋은가요. 아직 진료시간이 아니긴 한데 제가 지금 보면 도움이 될까요?"
고개를 들어보니 그 의사였다.
그는 우리의 히스토리를 듣고 처방을 내리고 장기치료를 시작했다.
아이가 많이 크기 전까지는 또래 아이들과 접촉하지 않도록 권유했다.
"아이가 계속 자주 아프면서 크면 평생 약한 기관지를 끌어안고 가야 할 수도 있어요.
엄마가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최선을 다해 보호하고 지켜내서 끊어 내주는 게 좋을 거예요.
어머니. 그렇다고 자책하지 마세요. 질병이라고 생각할게 아니라 그냥 타고난 체질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도움이 될 거예요.
몸이 커지고 기관지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없어질 거예요. 그때까지 몇 년만 최대한 조심하면서 키워봅시다."
나는 그의 조언대로 아이를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격리시키면서 키우고서야 아이는 괜찮아졌다.
자연스레 나도 아이와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일상이 이어졌다.
그렇게 아이는 3살이 되었고, 4살이 되었다.
사회성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나이라고 부르는 나이에 와서도 아이는 오로지 엄마와 아빠만을 만나며 일상을 보냈다.
5살에 어린이집을 다니기로 했다. 나는 동네에 있는 기관에 다 전화를 걸어 가장 감염병 관리에 철저한 곳을 골랐다.
남들은 다들 교육 커리큘럼과 양질의 교육에 대해 논할 때 나는 감염병 관리에 철저한지를 보고 한 반이 7명인 곳을 선택했다. 그렇게 다니기 시작한 곳에서도 다른 친구가 감기에 걸린 채로 등원하면 나의 아이는 하원을 했다.
그래도 종종 아팠고, 그럴 때마다 우린 그와 함께 했다.
기관에 다니기 시작한 지 반년쯤 지나고 얼추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들 무렵,
나의 아이는 크게 아팠다.
아주 거대한 파도가 밀려왔고, 걷지도 못해 나의 등에 업혀서 온 아이를 보고 그는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청진기를 대보자마자 바로 폐사진을 찍고 입원실로 올라가라고 했다.
아이는 코에 산소줄을 달고도 숨을 잘 쉬지 못했고, 그는 몇 시간에 한 번씩 병실로 와서 상태를 확인했다.
중환자실에 연락을 해두고 옮길 준비를 하며,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나서야 아이는 비로소 쪽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회진에 아이는 내 핸드폰으로 포켓몬스터를 잡고 있었고, 그는 그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끌어안으며 말했다.
"근래에 만난 최고 중환이었어. 와 진짜 긴장했다. 잘했어~ 잘 이겨냈어. 씩씩하게 이겨내 줘서 고마워~
포켓몬은 뭐 나와? 여긴 스탑 하나뿐이라 별거 안 나오지 않아?"
그는 고개를 돌려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나의 목소리가 갈라져 괴물 같은 소리를 내었다.
그는 나의 목소리를 듣고는 어머님도 청진 한번 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나는 수면제가 들지 않도록 처방이 가능한지 묻고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진료를 본 지 몇 년이 흘렀다.
아이의 숨소리가 범상치 않다 싶을 때마다 우리는 그의 도움을 받는다.
어느 날 청진을 하고 있는 그의 머리가 하얗게 변해 있는 게 느껴졌다.
청바지에 야상점퍼를 입고 다니던 젊은 의사는 조금씩 머리가 희끗희끗한 의사 선생님이 되어가고 계셨다.
그도 나의 아이가 커가는 걸 보고 있겠지.
아이 한 명 업고 와서 진료를 보던 가족은 남산만 한 배를 해서 진료를 보았고,
그다음 해에는 동생을 낳아 아기띠를 해서 진료를 보러 왔다.
그렇게 남매를 같이 진료해주고, 종종 온 가족을 다 진료 보기도 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 분과 함께 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아이가 아플 때마다 그가 생각이 난다
아플 때 지체 않고 달려갈만한, 우리를 잘 아는 의사가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