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떠나보내며
할머니가 눈을 감은지도 어느덧 3년이 되었다. 3년 동안 나에게 무수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방 한 구석에 놓인 할머니의 영정 사진이다.
할머니는 한복을 입고 찍는 여느 할머니들과는 다르게 정장을 입고 영정사진을 찍었다. 자신이 죽기 직전까지 사회의 한 구성원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 달라는 의미에서였다. 할머니의 영정사진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꽤 파격적이었는지 화장터에서 대놓고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보러 온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런 할머니가 무척 자랑스러웠다. 다른 사람이 보고 놀라 달려오는 영정사진이라니!
생각해 보면 할머니는 정말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 시절 흔치 않게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기도 했고, 너무 예뻐 학교 정문 앞에 영화감독들이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 남자에게 속아 20대 초반에 결혼해 남은 평생을 노동하며 가난하게 산 사람이었으며, 말년에는 자식을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앞세운 사람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인생의 굴곡이 어마어마하게 심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할머니를 존경했다. 할머니처럼 남자에 속아 결혼은 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할머니처럼 당당하게 살 거라고 다짐했다. 할머니는 언제나 당당했다. 자신이 피땀눈물을 흘려가며 만들어 낸 노동의 결실을 아껴 쓰고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이었고, 가난하다고 해서 어디 가서 쉽게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나 꼿꼿했고, 우아했다. 나는 그런 할머니가 내 할머니라서 너무나 좋았다.
어린 시절 나는 길거리에서 노래가 흘러나오면 바로 춤부터 추는 애였다. 노래에 맞춰 사람들이 보든 말든 열심히 춤을 췄다. 앞 구르기도 하고 뒷구르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항상 할머니가 옆에서 박수를 쳐 주었다. 교회 장기자랑에서도 흥이 너무 차올라 구석에서 춤을 추다가 무대 정 가운데로 가서 몸을 흔들었을 때에도 할머니는 일어나서 박수를 쳐줬다. 할머니의 아낌없는 지지를 받고 자란 애가 나였다.
그 외에도 할머니는 나는 못 하는 게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잘한다고 똑똑하다고 옆에서 자존감을 채워주었다. 나는 게임을 하면서 크게 노래 부르는 버릇이 있는데, 그럴 때에도 할머니는 꼭 노래 그만 부르라는 소리를 하지 않고 노래 이따 부르고 할머니 좀 도와줘. 했다. 내 인생에 할머니라는 존재는 엄청나게 큰 존재였다. 언제나 내 편이고, 언제나 나의 자존감을 올려주고, 언제나 사람들 눈치를 덜 보게 해주는 그런 방패 같은 존재.
그런 할머니가 떠났을 때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항상 잘한다고 너는 못하는 게 없다고 칭찬해 주던 할머니가 더는 없었다. 아파 죽어 가면서도 응급실에서 내 생일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 맛있는 케이크를 사서 먹자고 하는 할머니가 없어서 나는 슬펐다. 절대적인 내 편이 사라지고 나니 슬퍼하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아무도 나에게 무언가를 잘한다고 해주지 않았고, 아무도 나를 보고 괜찮다고 그럴 수도 있다고 해주지 않았다. 할머니의 빈자리가 너무나도 컸다.
지금도 할머니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고 있다. 참을 뿐이다. 참을 수밖에 없으니까. 할머니가 죽기 전 할머니 영상과 할머니 음성을 많이 남겨두었는데 하나도 제대로 못 보고 못 듣고 있다. 아직은 자신이 없다. 언제쯤 자신이 생길까. 자신이 생기는 날이 오기나 할까.
할머니를 너무나도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게 할머니 인생에도 내 인생에도 우리는 우리 밖에 없었다. 우리가 우리를 챙기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를 챙겨주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손을 잡고 다녔다. 동네 사람들은 할머니와 나를 짝꿍이라고 불렀다. 할머니와 나는 그렇게 딱 달라붙은 채로 세상과 싸워 나갔다. 둘 중 하나가 나가떨어지면 부리나케 달려와 일으켜주곤 했다.
글을 쓰다 보니 할머니가 보고 싶다. 할머니 때문에 흰머리를 뽑는 건 아주 도가 텄는데.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할머니의 흰머리를 뽑아왔기 때문에 남들과 족집게를 잡는 손 모양부터가 다르다. 할머니의 흰머리를 뽑아주고 싶은데 이제 흰머리를 뽑아줄 할머니가 없다는 게 너무나 섭섭하다. 장난으로 '할머니 죽으면 할머니 흰머리 뽑는 대신 묘지에 난 풀잎들 뜯을게.' 했는데 우리 할머니 화장해서 납골당에 있다. 뽑을 것도 없다.
원래도 눈물이 많아서 할머니한테 자꾸 그렇게 울면 재수 없다는 소리를 종종 들어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할머니의 글을 쓰면서 펑펑 울고 있다. 누가 보면 또 상치르는 줄 알겠다. 하지만 마음은 개운하다. 얼마 만에 이렇게 새벽에 울어본 지 모르겠다. 남자 때문에도 돈 때문에도 운 적이 없는데 할머니는 항상 나를 울린다. 그래도 나는 우리 할머니가 밉지 않다.
할머니와 손잡고 다녔던 많은 곳들을 떠올린다. 그곳들을 이제는 혼자 다니게 되었지만 그래도 할머니는 언제나 내 곁에 있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정말, 정말 할머니가 내 곁에 있다면 아직도 할머니의 납골당 한 번을 무서워서 제대로 가지 못하는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버스로 납골당 앞만 지나가도 눈물을 닦는 나를 할머니는 한심하게 생각할까. 아냐, 할머니는 또 내 편이 되어주었을 거다. 우리 애가 눈물은 많아도 할 줄 아는 게 아주 많아. 하면서.
할머니와의 추억이 많은 집에서 사는 게 너무나 버거워 이사를 왔다. 할머니는 전에 살던 집에서 20분 정도를 걸어 회사에 갔는데 다리가 많이 아프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이사 온 집은 할머니의 회사 바로 앞에 있는 집이다. 할머니가 나와 같이 이 집으로 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집은 곰팡이도 없고 부엌 겸 거실도 넓고 화장실도 깨끗한데. 할머니 회사까지 1분밖에 걸리지 않는데. 우리가 함께 이곳에서 1년이라도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글의 소제목으로 할머니를 떠나보내며라고 썼는데 나는 아무래도 당분간은 할머니를 떠나보내지 못할 것 같다. 아직은 할머니 이야기를 웃으면서 할 수 없고, 할머니의 물건들을 눈물 없이 만질 수 없고, 할머니와의 기억들을 좋았던 기억들이라며 옛날의 것으로 치부할 수 없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할머니를 생각할 거고, 할머니를 자랑스러워할 거고, 할머니를 그리워하며 울 거다.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가만히 바라본다. 할머니가 나를 인자하게 보고 있는 것 같다. 사진 속 할머니와 눈을 맞추며 예전 할머니와 깔깔깔 웃으며 떠들었던 때를 떠올린다. 할머니, 우리는 어디서든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괜히 속으로 말해본다. 할머니가 내 곁에 있다면 나에게 보이지는 않더라도 떠나기 직전 마지막 날처럼 고개를 끄덕여주었으면 좋겠다.
새벽에, 할머니가 많이 보고 싶어서 이런 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