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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Sep 22. 2022

감성이야말로 먹고 사는 일

커피에 둥근 얼음을 띄우며



[대구 수성구 범어동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어느 날인가부터 커피값이 참 비싸게 느껴졌다. 근처 카페의 스페셜티 원두를 자랑하는 커피는 향은 멋지지만 한잔에 5천원이 넘는다. 이런 귀한 커피는 가끔씩 마셔야 귀한 줄 안다. 일할 때 곁들이는 커피로는 저가 브랜드의 얼음 가득 투샷 아메라카노를 아깝다는 느낌 잆이 쭉 들이키는 것이 제격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병원에서 커피를 주문하면 배달료가 추가되어 일반 커피 가격을 웃돈다. 그래서 네xx레소 기기를 장만해 아침마다 커피를 내린다. 예전 처럼 직접 드립을 내리는 운치를 즐길 여유가 없는 요즘 참 요긴한 기계다. 물론 목돈의 기계값이 만만치 않지만, 230ml 용량의 커피 캡슐을 하나 소모하여도 1000원 돈이 되지 않으니 장기적으론 꽤 이득이다.


냉장고에 붙어있는 작은 큐브형 얼음은 출근길에 금새 녹아버리기 일쑤다. 그래서 다x소에서 산 위스키용 구형 얼음 만드는 틀 (가격은 천오백원 이었다.)을 애용한다. 둥글고 커다란 얼음을 보냉 텀블러에 넣으면 진료 시간 내내 청량함이 넉넉히 오래간다. 기계적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요~ 라고 주문하고 폰을 뒤적이다 받아든 늘 같은 커피에 비하면 운치도 있고 다양한 맛을 고르는 재미도 쏠쏠하다.






표면에 가득한 크레마 사이로 완벽한 구형의 얼음이 빼꼼히 떠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왠지 흐뭇하다. 적은 돈과 사소한 정성이 상상치 못했던 효용을 만들어내는 즐거움이다. 내게 감성이란 그 흐뭇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감성이 직접적으로 밥과 돈을 주는 일은 아니기에 종종 힐난을 받는다. 감성충, 이러한 느낌을 이야기하는 이를 벌레로 칭하는 말이 유행했을 정도다. 아마도 먹고 살기가 만만치 않고 점점 더 각박해지는 현실에서 유유자적 소소한 기쁨을 찾는 일 따위는 배부른 소리로 느껴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내게 감성은 사치재가 아니다. 오히려 내게는 이런 순간들이 삶의 본질에 가깝고, 더 큰 본질들을 이어갈 힘을 주는 필수재로 느껴진다.






글을 쓰는 지금 시간은 새벽 네시 반이다. 아직은 밤낮 구분 없이 세시간마다 우유를 먹어야 사는 딸아기 수유를 마치고 트림까지 완료시킨 시간이다 .매일 같은 오버타임 진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여덟시, 야간 진료날이면 아홉시가 되는 일상에서 새벽에 아이를 돌보는 미션이 추가되었다.


심한 날에은 세시간도 채 제대로 못잘 정도로 잠이 줄었는데. 그 와중에도 진료를 위한 최신 지견을 습득하려 연구회 활동을 병행하려면 일주일에 이틀은 아침 잠을 한시간 더 줄여야 한다. 버겁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정신과 던트가 뭐가 힘들다고 앓는 소리냐' 며 핀잔을 줬던 동기들도 어느새 교수며 봉직 의사가 되어서는 '요즘은 동기 중에서 네가 제일 빡신 것 같다' 고 인정해준다.


이러한 시간을 무작정 견딘다 느낀다면 언젠가는 쓰러질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아이를 재운 지금, 어차피 바로 잠들 수 없는 이 새벽 동안 오히려 힘을 얻을 무언가를 한다. 예컨대 단 10분이라도 텐션이 즐거운 유튜버의 수산물 손질 영상을 보거나, 지금 처럼 이 순간의 기억을 글로 조각하는 것이다. 이런 순간들이 꼭 이어가고픈 매일을 이어갈 힘을 준다.


하루가 지치고 피곤하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그 하루 속에 지키고 싶은 것들이 가득하다는 의미도 된다. 우리가 버거움을 감수하는 이유는 그 버거움을 통해 그 이상의 의미를 추구하고 싶기 때문이다. 가족을 위하고 스스로가 그리는 미래를 위하는 이 고됨들을 나는 기꺼이 감내하고 싶다. 꼭 감내하고 싶은 이 고됨을 이어갈 힘을 주는 것은, 동그란 얼음이 떠 있는 모닝 커피와 적재의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는 이런 순간들이다. 좋아하는 멜로디와 닮은 글을 남기는 과정이 나를 살게 한다.


이러한 느낌들과 그로부터 전해지는 힘이 감성충이란 힐난을 반갑게 감수하고 싶은 이유다. 세 시간 쪽잠을 자는 일상에서도 덩어리 얼음이 데구르는 커피 한잔은 여전히 또 충분히 달갑다. 감성의 추구란 참 수지 맞는 장사다.






인간은 먹고 사는 것 만으로는 잘 먹고 잘 산다고 느끼지 않는다. 삶을 삶 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먹고 사는 것 이상의 의미들이다. 이는 배부른 이들에게만 허락된 여유가 아니다. 오히려 그 의미들이 먹고 사는 생업을 이어가는 힘이 되며, 때로는 그것들이 오히려 삶의 본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소소한 소중함들을 자각하는 순간들은 그렇게 의미와 힘이 되어준다. 그것들은 지금까지 내가 삶에서 이뤄왔던 모든 것들의 원동력이었다. 그래서 내게 감성은 사치나 여흥이 아니라 먹고 사는 문제다.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유희가 아니라 늘, 지극히 그 현실을 살아가는 이야기 그 자체 였다.


여름이 지난다. 반팔이 애매해지는 시원하고 산뜻한 바람이 불어온다. 한 해 중 가장 짧고도 좋아하는 계절이다. 소중함을 자각한다는 것은, 바람의 습기와 온도가 달라짐을 느끼는 일이다. 충분히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당신은 그 사소한 감성을 누릴 자격이 있다. 일상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그 힘이 당신에게도 전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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