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성을 따르는 게 맞을까?
시집간 큰 딸이 드디어 임신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어련히 저희들의 계획이 있었겠지만 결혼 3년이 되도록 개 한 마리만 기르며 아이를 갖지 않아 염려스러웠는데 이젠 사돈댁에 체면이 서게 됐다.
태아도 건강하고 아들이라며 초음파 사진을 보내왔다.
다만 제 친정 엄마를 닮아 입덧을 심하게 하는 모양이다.
이역만리 미국에 떨어져 있으니 가까이서 보살펴 줄 수도 없고 그저 격려하며 안타까워할 뿐이다.
우리 아기가 어느새 자라 자기 아기 낳느라 고생하는 걸 보니 대견하고 기특하다.
아내는 아이 셋 모두 임신기간 열 달 내내 입덧을 했다.
입덧이 심하면 임신오조라 해서 탈수와 영양부족 그리고 전해질 불균형으로 산모와 아기 모두에게 위험할 수 있다.
요즘은 병원에서 항구토제를 처방해 준다는데 그때는 산모가 약 쓰는 걸 두려워해서 그저 참고 견뎠다.
1950년대 동물 실험 결과 안전성이 입증되어 '기적의 입덧약'이라 불리던 '탈리도마이드'가 사지기형아를 출산하게 했던 예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술 마시고 나면 속이 울렁거림을 잠시도 못 견디겠던데 그런 상태가 하루종일 그것도 열 달 동안 계속된다면 아마 미쳐버렸을 거다.
아내는 목에서 피까지 올라올 정도로 구토를 심하게 했고 막내를 낳을 때는 노산이라 너무 힘을 주는 바람에 출산하자마자 치질로 더욱 고통을 겪었다.
나는 그저 약품 도매상에서 수액제를 몇 박스씩 사다 놓고 탈수가 일어나지 않도록 매일 링거 주사를 놓아주었을 뿐이다.
지금도 아내에게 너무 미안하고 감사하다.
사실 모체의 입장에서 태아는 유전자의 절반은 나 아닌 다른 개체인 것이다.
따라서 이물질에 대한 거부반응으로 수정란이 태반에 착상하는 것을 방해하려는 면역반응이 생긴다.
실제 수정란의 70%가 착상에 실패해 죽는다고 한다.
하지만 착상에 성공한 태아는 자기도 살아야 하므로 모체로부터 조금이라도 양분을 더 빨아들이기 위해 호르몬을 방출하여 모체의 혈당이 높아지도록 한다.
전체적인 혈류량도 증가시켜 결국 임신성 당뇨와 임신성 고혈압 등 임신중독증이 나타나게 된다.
분만만이 유일한 치료라고 한다.
자식은 이렇게 엄마 뱃속에서부터 어머니의 등골 브레이커인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나를 열아홉에 낳으셨다.
고딩엄마인 셈이다.
아버지는 외가의 직원이자 아이들 공부도 봐주는 가정교사였는데 고등학생이던 어머니와 눈이 맞아버렸다.
외가의 사업 부도로 길에 나앉게 되자 입 하나라도 던다고 결혼식도 없이 그저 숟가락만 들고 적산가옥 단칸방에서 살림을 차렸다고 한다.
얼마 후 내가 태어났는데 백일쯤 되자 애가 비실비실한 게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결국 폐렴 진단을 받고 침례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치료를 해도 낫기는커녕 애가 울지도 않고 새파랗게 질려 악화되어만 갔다.
결국 의사가 가망 없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어머니의 뇌피셜이라 믿기는 어려운데 당시 아버지는 병동 간호사실에서 무슨 내용인지 몰라도 차트 내용을 그대로 베껴 기록해 놓았단다.
계속 여기에 있다간 애를 잃을 수 있겠다 싶었지만 돈이 없어 퇴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이를 포기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병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들쳐업고는 이층 병실 창문을 통해 탈출을 감행했다.
그렇게 맨발로 아이를 업은 채 달아나다 길가의 아무 가게에 무작정 뛰쳐 들어가 몸을 숨겼다.
놀란 주인 아주머니는 사정을 듣더니 속는 셈 치고 한번 가보라며 쪽지에 주소를 써 주셨다.
슬리퍼를 얻어 신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돈 한 푼 없이 다시 길을 가던 중 마침 퇴근하고 병원으로 올라가던 아버지와 극적인 조우를 하게 된다.
그 길로 바로 택시를 타고 쪽지에 쓰인대로 국제시장 내 개인 소아과의원을 찾아갔다.
머리 희끗한 노의사는 기록해 온 차트 내용을 보시더니 할만한 치료는 웬만큼 한 것 같은데 특이체질 환자에 대한 치료는 안 한 것 같다며 마침 약이 있으니 주사해 보자고 했다.
그 주사를 맞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파랗게 질려 있던 애 얼굴에 핏기가 돌며 "엄마 엄마" 부르며 울기 시작하더란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이제 살았다는 안도에 넋을 잃고 실신을 하고 말았단다.
아이를 살려주셨는데 치료비도 못 드려 죄송하다니까 의사 선생님께서는 자기도 열아홉 살 먹은 딸이 있는데 아기 엄마는 애가 애를 낳아 이렇게 살리겠다고 동동거리는 모습이 너무 장하다며 걱정 말고 아기나 잘 돌보라고 하셨단다.
정말 모성의 위대함은 부성에 비할 바가 아닌 것 같다.
그토록 고생을 하는데 아빠의 성을 따르는 게 미안할 정도다.
실제로 1회 사정 시 정자는 1-2억 마리나 방출되지만, 좌우 난소에서 한 달에 한 개씩 나오는 난자는 일생동안 고작 400여 개 밖에 안되는 귀한 거다.
크기도 난자가 정자보다 수백 배 커서 수정 되었을 때 세포 내 핵 속에 들어있는 유전자는 반반씩 섞여도 핵 외의 세포 소기관들은 난자의 것이다.
그러므로 장차 태아가 될 수정란의 미토콘드리아는 어머니로부터 유래된 것이고 계속해서 딸들에게만 전해진다.
이러니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게 과연 맞나 싶다.
이제 드디어 나도 진정 바라던 할배가 될 모양이다.
벌써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손주의 초음파 사진으로 프사를 바꾸어 놓고 주위에 자랑질을 한다.
아내는 산후조리를 위해 몇달 후 미국에 갈 예정이지만 나는 손주 얼굴을 언제 한번 직접 볼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저 사진과 영상으로만 대하다가 크면 서로 말도 안 통하겠지.
그래도 행복하다.
부디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