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지 않는 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샤워하면서 무슨 생각하시나요?' 나에게 샤워시간은 후회이자 계획이다. 이걸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그럼 앞으로 이렇게 진행하자로 바꾸는 시간. 거창한 말로 포장했지만, 보통은 뭘 입고 나갈지를 가장 많이 생각하는 듯하다. 어제 후드티는 너무 더웠어. 오늘은 좀 얇은 걸 입고 나가야지. 비 예보는 없었나? 오늘 가방 작은 거 들고나가려고 했는데, 우산 때문에 가방 큰 거 들고나가야겠다. 와 같은 잡스러운 생각들.
러닝머신 위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러닝머신 위에 올라가면 흔히들 앞에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거나, 폰을 올려둘 수 있어 무언가를 보면서 뛰는 것 같던데, 불행히도 내가 다니는 센터는 러닝머신 위에서 무언가를 보는 걸 허락(?) 하지 않는다. 자세, 밸런스, 어디가 불편한지 나를 꾸준히 체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의 생각은 한 곳이 집중하지 못하고 러닝머신 위의 모든 것을 읽기 시작한다.
초보자일수록 시선의 힘이 강력하게 발휘하는 곳이 있다. 첫 번째 도박장. 두 번째 운전대. 세 번째 러닝머신 위. 내 시선을 숨기지 못하고 몸이 따라가는 것이다. 왼쪽을 보면 몸이 왼쪽으로 기우뚱, 경고메시지를 읽기 의해 눈을 내리면 목도 함께 아래로. 나의 시선이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여지없이 내 어깨와 목은 시선을 따라 움직인다.
상체를 작은 박스에 넣었다고 생각하고 상체의 움직임을 최소화하라-라는 말을 들을 때서야 내가 몸이 옆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노선도를 비교적 많이 외우고 있는 2,3호선의 노선도도 외워봤지만, 내가 알고 있는 역들은 1구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읽을 수도 없고 볼 것도 없는 내 생각은 최후의 수단인 구구단을 꺼내어든다.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생각이 끊이지 않을 때, 나는 구구단을 외우기 시작한다. 구구단인 이유는 간단하다. 쉽고, 무의식 중에 나오며 생각보다 길기 때문이다.
2*1=2,2*2=4.. 처음 운동을 하면서 구구단을 꺼내어든 건 러닝머신이 아니라 '로잉머신'위에서였다. 노 젓는 운동을 하는 기구인데 그놈의 로잉머신은 박자는 왜 이렇게 맞추기 힘든 걸까? 박자를 잘 타세요-라는 말이 무색하게, 힘들 때면 부르는 어떤 노래들을 꺼내어 불러봐도 여간 박자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왈츠, 세븐틴 여러 시도를 했었고 결국 찾은 박자는 구구단.
발끝 쪽에 위치한 줄을 잡은 팔을 배 앞으로 당기고 다시 제 자리에 돌아가는 게 한 번의 루틴인 이 운동을 거의 구구당의 힘으로 끌고 갔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팔이 무릎 위를 지날 때까진 5*6, 팔의 힘을 줘서 배까지 당길 땐 30!
로잉머신을 시작으로 운동하다가 잡생각이 들 때면 구구단을 외우기 시작했다. 2단부터 9단까지. 그리고 또 9단부터 2단까지. 이렇게 구구단을 여러 번 외우고 나면 생각보다 시간은 금방 가곤 했다.
구구단은 시작은 의식적이었지만, 완전 무의식의 영역이기 때문에 내 자세와 컨디션에 대한 체크가 가능하다. 그리고 중간에 끊기더라도, 큰 문제없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2단부터 시작한다고 해서 9단까지 가는 게 크게 어렵다던가 엄청난 에러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삼일은 삼, 착지 신경 삼이 육, 무겁지 않게... 구 오 사십오, 고관절도 사용해야해! 구 구 팔십일, 지금 이 느낌으로 한 번 더!
음절마다 발을 구르고 숫자를 생각하다 보면 한 번에 3분은 훌쩍 지나가있다. 오늘 뭐 먹지, 오늘 뭐 하지 결론도 내지 못할 생각을 도돌이표처럼 하고 있는 것보다 시간이 훨씬 잘 가고 몸도 무겁지 않다. 호흡이 딸린다고 생각하면 이 역시도 구구단에 맡긴다. 너무 얕게 숨을 쉬지 말고 한 행에 들숨, 한 행에 날숨. 그럼 호흡도 가다듬어지는 느낌이고 한 번 더 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롯데 자이언츠의 응원가 중에 선수에게 안타를 중용하며 가자 가자를 외치며 리듬에 몸을 맡겨 안타! 000! 하고 시작하는 응원이 있다. 그들은 리듬에 맡겨 안타를 치길 바라는 것처럼 나는 구구단에 몸을 맡겨 오늘도 달린다. 아싸, 가자 가자 구구단에 몸을 맡겨 육 사 이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