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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Luce Oct 14. 2020

배나무와 풍뎅이

모르고 주는 상처

배를 수확하는 계절이 되면 풍뎅이가 떠오른다.


배나무와 풍뎅이의 일화는 오래전 한 영화를 본 후 소환되어, 매년 배 수확 철이 되면 나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영화 속 주인공이 어린 시절 냇물의 개구리에게 돌을 던지거나 다른 동물을 괴롭힌다. 물론 그는 모르기 때문에 저지르는 놀이였다. 어른이 된 그는 참으로 고달픈 인생을 살게 된다. 결국 쌓인’ 업보’를 푸는 여러 가지 수행과정 중에 커다란 돌을 몸에 매달고 산행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렇지만 끝내 그의 업보는 끝나지 않으며, 그는 욕망을 다스리지 못해 고통의 삶을 살게 된다.


괴테의 영원 회귀처럼 삶이란 순환의 연속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그 영화는 불교와 한국의 정서를 아주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무겁고 어두워서 오래도록 불편했다. 영화를 본 후, 곧바로 '내가 모르고 준 상처'들이 떠 올랐다. 현재 나는 무교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과 연결 지어 생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게 한 영화였다.


나 역시 어린 시절에 참새, 토끼, 개미, 풍뎅이 등의 생물을 괴롭혔다. 개미를 따라가 개미집을 파 헤쳤으며, 참새 뒷다리에 실을 걸어 날리면서 놀았고, 도망가려는 토끼를 귀찮게 했으며, 커다란 통에 물을 받아 목욕을 시켰다. 내가 열심히 목욕시킨 토끼는 다음날 죽고 말았다. 귀에 물이 들어가서 그런 것 같다고 했는데 알 수 없다.

전혀 농약을 하지 않은 우리 집 배는 작지만 단맛이 강했다. 풍뎅이들은 배를 아주 좋아했다. 우리 집 배 나무에는 풍뎅이가 엄청나게 날아다녔다. 우리들은 등이 청록색과 구릿빛으로 빛나는 풍뎅이를 잡아서 놀았다. 뒷마당의 땅바닥을 손으로 쓸어 평평하게 한 후, 각자 잡은 풍뎅이의 목을 비틀어 뒤집어 놓는다. 목이 뒤틀려진 풍뎅이들은 원위치가 될 때까지 날개로 바닥을 쓸었다. 누구 것이 더 많이 바닥을 쓰는지 보면서 환호했다. 한 번의 놀이가 끝나면 목이 원위치가 되고, 우리가 날려주면 풍뎅이는 잘 날아갔다. 그 때문에 우리들은 바닥에서 열심히 날갯짓을 한 것이 그들의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음을 알 수 없었다. 정말 철부지 어린아이들이었다.

글을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하다 보니 한국농어민 신문(2002.8.26.)에 배나무 풍뎅이 방제기술에 관한 기사가 실려있다. 요약하면 풍뎅이들이 좋아한 것은 배가 아니라 배나무 잎을 좋아한 것이다. 잎을 갉아먹어서 결국 과육의 성장을 방해한다. 따라서 연간 1회 이상 풍뎅이의 유충이 서식하는 땅 위에 방제를 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그때 우리 집 배가 작았던 이유는 풍뎅이들이 배가 자라지 못하게 나뭇잎을 다 갉아먹었기 때문이고, 그들을 잡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닌 것이다. 아무리 이렇게 변명해도 목을 비틀고 놀았던 것은 몰랐기 때문에 저지른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요즈음 풍뎅이는 환경의 지표라고 한다. 최근 산이나 들에서 풍뎅이를 본 적이 없다. 환경오염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등이 예쁜 풍뎅이가 날아다니던 배나무는 우리 집에 딱 한그루 있었다. 배를 먹을 때면 뒷마당 돌담 위 정원의 배나무와 풍뎅이들이 생각나고, 그때 내가 괴롭힌 풍뎅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얼마나 아팠을까. 나에게 업보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업보'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니, 한때 채식주의자가 되기를 희망했으나 고작 며칠 의지를 불태우다가 맛있는 요리 앞에서 포기하고 말았던 생각이 난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채식주의자들을 존경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채식주의자가 그의 가치관대로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을까? 두 권의 책이 떠 오른다.


첫째로,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곧바로 연상된다. 자신의 가치관을 폭력적인 육식자 사회에 대항하는 채식주의자의 모습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 보면 자신의 신념으로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이 물구나무서기를 하는데, 인간 사회에 뿌리내리기 어려움을 나타내는 듯했다. 나무가 되고자 물구나무를 선다. 우리 머리는 식물로 치면 뿌리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책은 얀 마텔의 소설 <파이 이야기>이다. 파이라는 소년이 탄 배가 난파되어 보트로 표류한다. 마침 배가 침몰할 때, 그 배에 실려 있던 뱅갈 호랑이까지 살아남아 작은 보트에서 함께 생활하게 된다. 뱅갈 호랑이의 이름은 리챠드 파커다. 이들이 구조되기 직전에 찾은 환상의 섬에서, 리챠드 파커는 그 섬에 살던 미어캣을 ‘먹고도 남길 만큼 욕심껏’ 사냥한다. 이로써 작가는 독자에게 실마리를 준다. 리챠드 파커는 과연 호랑이가 맞는가, 일반적으로 호랑이는 먹을 만큼만 사냥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먹을 만큼'만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채울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발버둥 치며 약자를 괴롭힌다. 사실 리챠드 파커는 파이가 지어낸 가상의 동물일 것이라고 추측하게 된다. 원래 파이는 채식주의자였기 때문에 가상의 동물을 만들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내가 먹은 것이 아니라 ‘다른 동물’이 먹은 것이라는 합리화를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사실 그 동물은 '내 안의 또 다른 나'이다. 주인공이 구조된 후에 나무늘보를 관찰하는 일을 즐기는데, ‘나무늘보를 보면 물구나무서서 명상하는 요가 수행자가 떠 오른다’는 표현을 한다. 정상적으로 세상에 뿌리내리는 일이 어렵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소설은 특수한 상황에서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이 어떤 상상력을 발휘해서 자신의 가치관을 유지하고자 하는지를 보여준다.


나도 언어로 항변을 하고 있다. 나는 모르고 상처를 준 것이라고. 또는 나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집안에 들어온 거미를 죽이거나,  내가 애지중지하는 꽃나무에 있는 거미줄을 걷어내면서 “에잇,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 밤새 일했겠지만 다른 데로 가 버려!” 또는, 아픈 나무를 관찰하여 “내가 딱지 벌레 잡아줄게!”하고 곤충을 떼어 죽이며 장미에게 말한다. 사실 나뭇잎을 갉아먹는 나비의 애벌레나 나무의 진액을 모두 빨아먹는 선녀벌레, 딱지 벌레 같은 해충을 죽이는 일은 정당하다고 여긴다.


그런데 사람도 해충 같은 경우가 있다. 매체에서 나온 범죄자 중에는 해충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싫은 인간 부류가 있다. 설상가상으로 '같은’이 아니라 해충 '만도’ 못한 사람도 있다. 작가 얀 마텔이 소설을 통해 전했다시피 인간의 내면에는 여타 동물보다 심한 잔혹성과 비열함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나는 주장한다. 아무리 못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해도 정신질환이 아닌 이상 우리의 심성은 교육으로 바뀔 수 있다고. 유전적 환경과 사회적 환경 중 나는 후자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말’, 언어는 생후 2개월 경 자신을 돌보는 사람의 입모양과 소리를 모방하는 옹알이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의 언어란 몸짓, 말소리, 문자(텍스트)를 모두 포함한다. 옹알이를 열심히 하고 사회적 언어를 배운 이후, 나는 소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고 생각한다. 항상 긍정의 언어를 사용한다면 좋겠지만 엄마와 아내, 그리고 직장인으로 산다면 그게 불가능하다. 나의 정당함을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하기 때문이다.


‘내가 신은 아니잖아? 나도 감정이 있다고!’라고 생각하면서 때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톡 쏘아붙이게 된다. 말을 예쁘게 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참으로 신기하다. “아! 그래요? 아! 네, 잘 알겠어요.”라고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이며 상냥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답변한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전혀 연락이 없어서 다시 질문하면, 일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애당초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속한 사회의 언어는 어른이 되어도 이해가 어렵다.


결론으로 풍뎅이의 일화처럼, 내가 '모르고' 남에게 준 상처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도 모르는 그 상처는 누군가의 마음속 어느 깊은 공간에 웅크리고 있다가, 언젠가 나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온다. 그때 나는 참으로 억울하다. 적시에 대화를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는 그 사람에게 오히려 서운한 마음이 든다. 때로는 상대방이 혼자 오해하고 부풀리는 경우가 있다.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받아들이는 쪽에서 잘못 받아들인 것을 나에게 어쩌란 것이냐'라고 속으로 소리쳐 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스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주인공처럼 황당한 일도 겪을 수 있다. 이유도 듣지 못한 채 오랜 친구들에게 내쳐진다. 사실은 그 모든 발단이 '오해'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지만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흘러버리게 된다.


만약 그 누군가와 다시 돈독한 사이가 되기를 원한다면, 어떤 경우라도, 늦었다 할지라도, '소통’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인해 본심이 전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희망과 믿음으로 나는 그저 내 할 일을 할 뿐이다. 사과라면 사과를, 용서라면 용서를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영미 시 한 편이 떠 오른다. 아름다운 언어, '사과’ 에 관한 시다.


The Quarrel
말다툼
                             Poem by Eleanor Farjeon(엘레노어 파전의 시)                                                         

I quarreled with my brother,
오빠와 말타툼을 했다
I don’t know what about,
무엇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One thing led to another
하나가 다른 하나로 이어지고
And somehow we fell out.
어찌 된 일인지 우리는 엇나갔다.
The start of it was slight,
처음엔 사소한 것으로 시작된 것이
The end of it was strong,
결국엔 심각해져 버렸다
He said he was right,
그는 그가 옳았다고 말했고
I knew he was wrong!
나는 그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We hated one another.
우리는 서로 노려보았고
The afternoon turned black.
그날의 오후는 심각하게 변해버렸다.
Then suddenly my brother
그런데 갑작스럽게 나의 오빠가
Thumped me on the back,
내 등을 툭 치며 말하기를
And said, “Oh, come on!
"야 인마,
We can’t go on all night—
우리 밤까지 싸울 거야?
I was in the wrong.”
내가 잘못했다."
So he was in the right.
사실 그가 옳았다.

마지막 시는 대학원 영미 시 수업을 받으면서 알게 된 영국 시인 엘레노어 파전의 시이며, 나의 언어로 번역해 보았다. 다소 쉬운 내용이라서 원어로 읽어 보면 좋을 것 같다. 불편하고 긴장된 마음이 일시에 누그러지는 모습이다. 다툼을 멈추고, 오빠가 먼저 용기 있게 사과하는 장면에서 웃음이 나온다. 대부분의 말다툼은 웃으면서, “ 그래~ 내가 잘못했어. “ 하고 말하면 다 풀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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