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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Dec 15. 2023

'숨 쉬듯' 편안하고 자연스럽기를

우리의 숨은 딸기 사탕처럼 달콤하다

 여름에 태어난 아이는 수박을 좋아한다. 늦가을부터 마트에서 잠시 자취를 감췄던 수박을 겨울 초입에 다시 발견하고는 "아빠, 여기 수박이 있어요!" 하며 하원길에 만난 아빠보다 더 반가워한다. 동화책 『태양왕 수바』도 수십 번 읽었다. 먹고 또 먹어도 질리지 않는 수박처럼 질리지 않고 즐겨 찾는다.

 딸기도 잘 먹는다. 지금 사는 곳에 이사했을 때부터 마당 한편에 딸기가 있었다. 노지 딸기인 셈인데 시장에서는 딸기를 구하기 어려워지는 5월에 익어서 맛이나 양을 떠나 작은 즐거움이 되어주었다. 딸기꽃을 찾아 날아온 꿀벌이나 나비라도 만나는 날에는 꿀벌과의 강렬했던 첫 만남(제민천을 산책하다 볼을 쏘였다)을 떠올리며 무서워했다. 벌이나 나비가 왜 꽃을 찾아 날아오는지, 딸기가 어떻게 열매 맺는지 여러 번 들으면서 두려움이 줄었지만 꽤 오랫동안 벌을 볼 때면 "위잉~팍!" 하며 손가락이 허공을 맴돌다 왼쪽 볼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집에서 적당한 무관심과 과도한 물을 먹고 자란 딸기는 상품성 있는 큼직하고 달달한 맛을 내지는 못하지만 아이의 일상을 풍성하게 하는 효능이 있다. 밖에 나가기 싫다고 하다가도 '딸기가 빨갛게 익었나 볼까?' 하면 아빠보다 먼저 나가겠다고 서두르기도 한다. 자기가 따겠다고 나서서 서툰 가위질로 덜 익은 걸 잘라서 아까워하며 버리기도 한다. 하루나 이틀 늦게 발견해서 개미들이 먼저 먹어버리는 일도 흔한데 "개미, 너~ 내 딸기를 먹다니!" 하며 쿵쿵 거리지만 이내 "맛있게 먹어." 하며 공존을 택한다. 딸기꽃에 벌이나 나비가 날아드는 것과 꽃이 진 자리에 열린 작은 열매가 자라서 빨갛게 익어가는 것과 너무 일찍 따거나 늦게 따면 먹을 수 없게 된다는 것과 개미처럼 사람이 아닌 생물의 먹이 활동을 보며 지식으로 배우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체화하는 게 늘어가기를.


 가장 흔하게 먹는 과일은 사과다. 이유식 때 수저로 긁어주기 시작한 이후 꾸준히 좋아하는 과일이기도 하다. 사과가 먹고 싶어지면 '애쁠애쁠'하며 방방 뛰는데 칼로 탁! 하는 흉내를 내며 굳이 자르지 말고 통째로 달라고 한다. 자기 얼굴만 한 사과를 두 손으로 들고 껍질째 먹으며 걷는 사진은 지금도 큰 웃음을 준다. 망고와 키위의 맛을 알았고 파인애플과 단감도 있으면 '다~ 내 거~~'를 노래하듯 외친다. 한 마디로 거의 모든 과일을 좋아한다. 아이가 좋아하는 과일은 대부분 달콤하다. 와락 안으면 아이 숨에 남아있던 달콤한 향이 풍긴다. 거의 모든 계절에 풋풋하거나 시원하거나 달콤한 향이 난다. 


 세상이 변했다. 대부분의 과일을 제철이 아닌 달에도 먹을 수 있다. 제철보다는 비싸지만 그 격차가 생각보다 크지 않아서 과자나 다른 군것질거리 대신 과일을 택하게 되는 일이 많다. 아이에게는 한 겨울에 수박을 먹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모든 삶 동안, 기억 속에 늘 수박이 있었고, 과일을 먹을 수 있었으므로 과거에도 그랬을 것이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자연스러움과 아이가 생각하는 자연스러움이 조금도 닮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설명하기 어려운 궁금증,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이미 시작되어서 언제든 더 복잡하고 어려워질지 모를 말들을 미리 떠올린다. 


 수박을 먹기 위해 여름을 기다리는 아이가 있었을 것이다. 사과가 먹고 싶어서 일 년 내내 가을이었으면 하고 바라던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딸기가 없는 계절에 입덧하는 아내를 위해 한 밤의 거리를 뛰어다니던 발걸음이 있었을 것이다. 책에서, 신문에서, 라디오에서 전해 듣던 '그땐 그랬지' 속 이야기들. 그때는 자연스럽고 흔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부자연스러워진 모습들.  

같은 날 하늘의 오른쪽과 왼쪽 얼굴(지킬 앤 하이드?)

 '자연스럽다'는 말을 어떤 고정된 이미지로 기억하려고 했던 것만 같다. 마치 "비가 오는 날에는 해가 없는 게 자연스럽다"라고 생각해서 바로 옆에 떠있는 무지개를 보지 못하고 지나치듯 말이다. 아침부터 흐렸던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다. 상점을 나서며 올려다본 오른쪽 하늘이 잔뜩 흐리기에 "그동안 맑은 하늘만 찍고 흐린 하늘을 안 찍었네"하며 몇 장쯤 찍고 '됐다'라고 생각하며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는데 왼쪽 하늘 구름 사이로 웬 선명한 파란 하늘이 떠있었다. 잠깐이지만 생각이 멎었다. 


'응? 이게 맞아?'


 맞다. 이런 하늘이 그리 드물지도 않다. 그럼에도 비 오는 하늘은 온통 흐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그래야만 하기에. 슬픔을 겪는 사람이 웃으면 그걸 두고 뒷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래도 돼?' 그래도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은가. 나의 어린 시절에 있던 '제철'이 아무리 아름답고 가치 있었다고 해도 지금의 제철이 없는 모습이 부자연스러워지지는 않는다. 

 다름과 변화를 받아들이면 조금 편안해지는 일이 분명 있고 나의 자연스러움과 타인과 세상의 자연스러움을 나누어 기억하면 서러울 일이 적다. 


 과일을 좋아하는 아이는 과일맛이 나는 사탕과 과자도 즐겨 찾는다. 엄마 아빠는 다 알겠지만 과자나 사탕에서 나는 과일맛은 사실 맛이 아니라 향에 가깝다. 맛이 나도 천연의 자연스러운 맛이기보다 화학적으로 만들어낸 맛인 게 진실이다. 아직 이해하지 못할 말을 아이에게 들려준다. 이 사탕과 과자는 '딸기맛'이지만 '딸기에서 나는 맛'이 아니라 '딸기에서 나는 맛을 흉내 낸 맛'이라고 덧붙인다. 언젠가 조금 더 자라면 자연스럽게 딸기에서 나는 맛과 그걸 흉내 낸 맛의 차이를 알게 될 거라고 믿으면서. 

제철 수박의 선량함과 넉넉함을 기다리며


 딸기를 먹은 아이의 숨도 달콤하고 딸기 사탕을 먹는 아이의 숨도 달콤하다. 딸기가 달콤하기도 하겠지만 우리의 숨이 달콤해지는 건 서로를 소중히 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의 힘이 크게 작용한 거라고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오늘 겨울 수박을 사러 간다. 



아이가 통통 수박을 두드린 후 수박에 귀를 대고 수박이냐? 물을 것이다.

(동화책 『태양왕 수바』속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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