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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Dec 19. 2023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언제인지 몰라도 그날까지 숨 쉬듯 천천히

 오늘 가장 부끄러운 고백은 서른 즈음까지도 삶이 그다지 간절하지 않았다는 거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식의 유행어를 남발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오늘이 누군가에겐 간절했던 내일'이라는 말에 잠시나마 흔들리는 내게 '모든 게 허무할 뿐'이라며 내내 속삭였다. '허무와 공허만이 가득하죠'같은 문장이나 쓰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을 무위라는 자연스러움에 끼워 맞추기도 했다. 모든 삶의 모든 순간이 간절할 수는 없다 해도 삶이 내내 간절하지 않은 건 슬픈 일이다. 슬픔을 딛고 몸을 돌려 나설 수 있음에도 얕은 슬픔에 빠져 허우적이는 스스로를 연민하는데 힘을 쏟았다. 불가항력의 비극적인 결말을 상상하며 의지를 꺾고 불사른 재 속에서 허덕였다.

 

 허세.

내 삶이 간절하지 않다는 생각은 '얼마나 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질문에 '마흔까지 살면 충분하지 않을까'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럴 리 없다며 되묻는 상대를 향해 오히려 그 이상 살아서 더 나을 것이 무엇이 있느냐며 반문하기도 했다. 무엇을 할지 무엇이 될지 상상할 수 없었으므로 삶을 막연한 미래까지 유예하고 싶지 않았다. 이루고 싶은 것이 없는 사람, 학습한 무기력, 자신이 소중하지 않은 인간 실격자.


돌아보면 그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숨이 가쁜 날이 많았다. 보통의 공기 속에서도 숨이 찼다. 냄비 속 개구리처럼 서서히 끓어오르는 물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서 기적처럼 다가올 구원을 기다렸다. 그러다 그게 다 일어날 수 없는 헛된 기대라는 걸 인정하려고 하면 발악처럼 허무와 공허가 밀어닥쳤던 것이다.

흐린 하늘, 한 줄기 빛

 오늘의 고백이 부끄러운 건 그 후 10년 삶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지 못해서다. 세 살 아이가 그러듯 알면서 부정하고 싶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알지 못한다'라고 적는 모습이 부끄러운 거다. 나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더 할 수 있지만 덜 하고, 하고 싶지만 미루고, 하지 못하는 이유를 내 밖에서 찾는다. 성실하고 한결같은 불성실함. 너무 오래 불성실했더니 그게 성실함인 줄 알고 자꾸 지키려고 한다.


 지난 토요일 집을 나서다 운동장에서 캐치볼을 하는 두 사람을 봤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남자아이와 아빠 같은 남자였다. 어린 남자는 더 힘차게 더 멀리, 더 빠른 공을 던졌고 조금 나이 든 남자는 있는 힘껏 공을 던지고 쫓아다녔다. 어린 남자는 자꾸만 있는 힘껏 공을 던졌고 공은 조금 나이 든 남자를 날아서 지나치거나 튀어서 지나쳤다. 두 사람 모두 즐거워 보였다.


 두 사람을 보면서 어쩌면 내게도 일어날지 모를 미래를 떠올렸다. 다시 10년쯤 후의 나와 아이와 우리. 그 모습이 '마흔까지 살면 충분하지 않을까'하던 이십 대의 나를 불러왔다. 이미 그 나이를 지나 더 나이 들어서야 소중해지는 삶이 여기 있었다. 내 삶을 가장 잘 안다고 믿어서 앞으로도 허무와 공허만을 실감할 거라며 낙담시키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음을 이제는 담담히 고백할 수 있다.


 좋은 아빠, 좋은 남편, 좋은 아들, 좋은 사람. 그게 뭔지는 잘 모르지만 그 뭔지 모르는 걸 알게 되려면 살아있어야 한다. 단지 눈을 뜨고 움직이고 숨을 쉬는 데 그치지 않고 살아야 한다. 다행히 내게는 삶이 주어졌으므로 삶을 둘러싼 것을 돌아보고 지키며 아끼는 법을 배워가야 한다. 


 서두르는 걸음, 급하게 달리는 숨이 느릴 수 없다. 급히 서두른다고 멀리까지 더 빨리 도착하는 것도 아니다. 너무나 당연한 걸 당연해서 잊고 지낸다. 해야 하고, 할 수 있다는 걸 잊어버리는 건 마음이 급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간도 있고 몸도 한가하고 건강하지만 마음이 급해서 무엇도 시작하기 어려웠다. 계기가 필요했고, 숨 쉬듯 천천히 생각하고 쓰면서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냄비 속 온도를 가늠했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을 만큼 뜨거울 뻔했다. 수십 년 머물던 고향 같이 아늑한 곳을 떠나려니 아쉬움이 남지만 나중에 올 휴식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이 자리를 비운다.  

  

 만난 적 없고 글로만 소식을 주고받다 그마저 끊겼던 사람의 글을 오랜만에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예전에 나눴을 필담을 떠올려보려고 하지만 좀처럼 떠오르는 게 없어 아쉬움도 있다. 살아 있어야 한다. 사는 동안 남기고 나눠야 한다. 글이거나 이야기 거나 마음이거나 이어지고 나누어야 계속된다. 우리 삶은 그런 점에서 글과도 마음과도 이야기와도 닮은 것이다. 

 

 소포클레스는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멋들어진 문장, 옳은 말은 게으른 사람을 일깨우거나 실의에 빠진 모두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허무한 사람에게는 아무 말도 별 의미가 없다. 말을 줄 것이 아니라 시간을 들여 계기를 기다려야 한다. 시간과 계기는 빠름과 서두름과 급함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천천히, 단 한 번도 의식한 적 없던 자기 숨을 알아차릴 만큼 숨 쉬듯 천천히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가장 느린 표현법이 쓰기다. 글은 언제나 말보다, 행동보다, 표정보다 느렸다. 숨 쉬는 속도에 가장 가까운 나. 그러므로 숨 쉬듯 천천히, 마지막 숨까지 써나가야 하는 것이다.

나중에 누군가가 화석을 뒤지듯 읽어주면 고마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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