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상은 대만 소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의 저자 린이한의 인터뷰 중 일부다. 작가 자신의 그루밍 성폭력 피해 경험을 토대로 쓴 <팡쓰치>는 <기억의 발굴>과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고 그래서 읽기에 괴롭다. 내 경우엔 <팡쓰치>가 <기억의 발굴>보다 좀 더 괴롭게 다가왔는데, 무엇보다 두 저자의 현재 상황이 나의 독서 과정에 은연중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다. <기억의 발굴>을 쓴 미국의 웬디는 현재 딸을 키우며 꿋꿋이 살아가고 있는 반면, <팡쓰치>를 쓴 대만의 린이한은 몇 년 전 책이 나온 지 두 달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한 1인칭 회고록이라는 형식으로 쓰인 <기억의 발굴>에 비해, 전지적 시점으로 쓰인 <팡쓰치>는 훨씬 더 분석적이고 노골적이다. 전지자의 입장에서 한 번 더 해석을 거친 감정 표현들은 매우 직접적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쿡쿡 찌른다.
두 책의 저자가 처한 환경과 시대는 서로 다르지만, 사건의 골조와 집필 동기는 비슷하다. 한 어린 여자가 있다. 그는 또래에 비해 조숙한 편이고, 본인도 그 점을 안다. 중학생인 그 여자는 한 남자 교사에게 호감을 느낀다. (학창 시절 여학생에게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 되기에 가장 쉬운 사람은 선생님이다.) 일련의 사건을 거치고, 여자는 선생님과의 관계를 사랑이라 믿으려 애쓰지만 실제로는 권력관계다. 남자는 때로 폭력성을 보인다. 여자는 때로 남자를 연민한다. 가끔은 남자로부터 공포를 느끼기도 하지만, 여자는 그러한 상황을 명확하게 납득하지 못한 채 지나간다. 여전히 그를 벗어나지 못하고, 마침내 그와 헤어질 때까지도 그 남자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사랑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뒤 여자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위 내용은 <기억의 발굴>과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이 똑같이 공유하는 부분이다. 두 책은 많이 닮아 있다. 웬디는 제프와의 마지막 만남에서까지 그에게 “사랑해요.”라고 말한다. 팡쓰치는 이렇게 묘사된다. “심지어 마지막까지도 그녀는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언어의 무게였다.” 그 ‘언어의 무게’는 웬디 역시 오래도록 짓눌렀다. 대만의 리궈화도, 미국의 제프도 똑같은 말로 어린 여성을 지배했다. 단지 정신과 몸으로만 지배한 것이 아니라 언어로도 붙잡아두었다. 이 책의 저자들이 붙잡혀 있던 그 세계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나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온통 고통과 혼란으로 채워진 그 세계를 나는 끝내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