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 대한 생각
“다운펌 저렇게 두면 안 봐도 비디오예요.”
미용실 원장님이 디자이너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원장님은 고객님의 헤어가 어떻게 될지 내 머리를 자르면서도 훤히 보이셨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다 말고 가만히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있어 이런 역할을 하고 있는지’ 반추해봤다. 원장의 자리는 그런 자리다. 경험이 쌓이며, 예상되는 문제들을 읽을 줄 알아야 사업도 하는 거다.
나는 피그마가 P인지 F인지도 모르고, 어도비가 피그마를 28조에 인수한다 해도 관심 없고, 크몽과 라우드소싱이 50만 원에 로고를 만들어 준다 해도 별 관심 없고, 망고보드나 미리캔버스가 카드 뉴스와 현수막을 만들어도 관심 없다.
나는 경력이 몇 년 차니까 이 만큼 비용을 받아야 해요.라고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배우 황정민 님이 말했다. 연기 얼마나 하셨어요?라는 게 무슨 의미냐고. 고등학교 때부터 했는지, 군대 다녀오느라 중간에 쉬었다고 해야하는지. 무슨 기준으로 경력을 말해야 하냐고. 오래 연기를 했다고 해서 연기를 잘하냐고.
사업자 대표인 내가 모르고 위임하면 그 결과에 대한 피해는 고객이 되어버린다. (A기업 전용서체를 살짝 변형해 B지자체 전용서체로 납품한 사례도 다 그런 맥락이다. 고객을 바보 만들고, 사용자를 바보 만든다.)
글립스, 폰트랩, 아니 포토샵, 인디자인도 모르는 내가 디자인 사업을 10개, 20개 받아와 봐야 무슨 관리가 될 까. 남성 컷 하나 할 줄 모르는 원장이 동료에게 “다운펌 저렇게 하면 안 돼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
원장이 실력 있으면 위임해도 된다. 책임을 질 수 있으니까. 나는 미용실에서 조금 전에 나왔지만, 분명 미용실 원장님은 디자이너가 벌려놓은 다운펌을 책임지고 해결해주셨을 것이다.
결국 대표가 실력 없으면 계속 남에게 위임하게 되고, 위임받은 사람마저 실력 없으면 고객은 아무 말 없이 다음엔 방문하지 않은 게 이 사회에 기본 구조다.
나는 어떤 고객은 망고 보드, 미리 캔버스, 크몽, 라우드소싱이라는 서비스를 원하고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배우 황정민이 이야기한 것처럼, 몇 년 차만 강조하는 실력 없는 대표가 되지 않아야 하겠다.
미용실 원장님과 실장님이 손님이 바글바글한 와중에도 말씀하셨다. “선희 씨 응원할게요.” 곧 출산을 앞둔 선희를 응원하겠다는 말이다. 그래. 고객을 기억하고 고객이 원하는 걸 알고, 고객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일. 그리고 실력을 갖춰 다양한 문제를 예측하는 일이 내가 해야하는 일이다.
#제가_가는_미용실은_당산역_근처에_있어요.
#일에대한생각 202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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