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텍사스>
영화 <파리텍사스>는 빔 벤더스 감독에게 왜 <로드무비의 왕>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니는지 수긍하게 만드는 그의 대표적 로드무비다. 1984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그해 칸영화제에서 만장일치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다. 영화제 직전까지 편집을 마치지 못한 상황에서 3일 만에 편집과 자막 작업까지 겨우 끝내고 영화제 상영 1시간 전에 아슬아슬하게 프랑스 칸에 도착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로드무비
로드무비답게 <파리텍사스>는 텍사스의 광활한 사막을 걸어가는 한 남자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갈증에 시달리며 힘겹게 걸어가던 이 남자는 사막의 어느 외진 가게에 들어가 기절하여 쓰러진다. 신분증을 통해 이 남자가 트래비스(해리 딘 스탠튼)라는 사실을 확인한 병원은 LA에 사는 그의 동생 월트(딘 스톡웰)에게 연락한다. 형제는 4년 만에 조우한다. 말하자면 트래비스가 4년을 길 위에 있었던 셈이다.
영화는 여행으로 점철된다. 4년에 걸친 트래비스의 홀로 여행은 여행이 끝나면서 혹은 중단되면서 영화 도입부에 살짝 소개되고, 곧바로 사막에서 LA 월트의 집까지 형제의 여행이 전개된다. 처음에 말문을 닫은 채 본래 자신의 사막여행으로 되돌아가려던 트래비스는 하는 수 없이 형제의 여행을 받아들이고 그 여행의 끝에서 형제는 화해한다.
여행은 부모로부터 버려져 삼촌, 즉 트래비스의 동생 월트의 집에 살던 트래비스의 아들 헌터와 트래비스가 다시 만나 부자의 정을 회복할 때까지 잠시 휴지기를 갖는다. 친해진 부자는 그들의 아내이자 어머니인 잃어버린 제인(나스타샤 킨스키)을 찾으러 곧 바로 댈러스로 여행을 떠난다. 제인을 찾아 모자의 상봉을 주선한 트래비스는 두 사람을 남겨두고 다시 홀로 여행을 떠난다.
수미상관(首尾相關)으로 주인공이 여행을 떠나는 구조이고, 두 여행 모두 트래비스가 가족으로부터(from) 벗어나는 형태이지만 두 여행의 의미는 판이하다. 후자의 여행은 아들과 아내에게로(to) 도달하는 과정이며, 전자의 여행이 무작정한 도피였다면 후자는 관계의 복원 후 새로운 자신에게로(to) 가는 여정이다.
전형적인 해피엔딩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피엔딩이 아닌 것도 아니다. 길 위에서 시작하여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 본래 인생이라고 한다면, 의미를 상실한 혹은 의미를 탈출한 여정에서 돌아와 의미를 추구하는 여정을 새롭게 떠나는 주인공 트래비스의 모습은 양가적이다. 자체로 삶의 은유이기도 하다.
가족과 화해하였고 아내와 아들을 재결합하게 해주었지만, 그 결합에 자신이 빠져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극복할 수 없는 본원적 슬픔을 엿보게 된다. 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화해하고 분리된 상태인 아들과 아내를 연결짓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이후에 내쳐 자신을 찾으러 나서는 모습은 실존적 희망을 상징한다.
<파리텍사스>는 간단한 스토리로 구성돼 있지만 영화 속 기타 소리처럼 묵직한 울림을 담았다. 로드무비이지만 로드무비 이상의 깊은 울림을 전하기에 로드무비다운 로드무비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길 위에서 길을 찾기 마련이지만 길 위엔 찾는 길이 없는 인생사와 흡사하다. 아무튼 인간이 길을 나서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관음증의 아름다움
<파리텍사스>에 많은 얘깃거리가 있지만, 후반부에 등장하는 트래비스와 제인의 재회 장면이야말로 압권이다. 남편-아들에게서 떠나온 제인은 관음증(觀淫症)적 유흥업소에서 일하며 생계를 해결하고 가끔 아들 모르게 아들을 돌보는 월트의 아내에게 돈을 보낸다.
영화 속 관음(觀淫)의 유흥공간은 두 개의 방으로 구성된다. 각기 다른 방에 여성 접대부와 손님이 들어가는데, 두 방 사이엔 커다란 통유리가 존재한다. 여성은 손님을 볼 수 없지만 손님은 여성을 볼 수 있다. 비대칭이 성립해야 관음이 가능할 테니 상상할 만한 구조이다. 한 사람은 상대를 보고 다른 한 사람은 상대를 보지 못하는 가운데 전화기로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인지의 불균형은 들여다보이는 쪽의 여성을 발가벗겨놓은 것과 같은 효과를 거둔다. 반대쪽은 터럭 하나 노출되지 않는다. 들여다보는 쪽의 비가시성과 익명성은 매매춘의 핵심역량인 구매력과 결부되어 들여다보이는 쪽을 지배한다. 전화기로 진행되는 대화는 따라서 결코 소통이 될 수 없다. 불통은 한쪽만이 아니라 양쪽에 다 해당한다. 들여다보이는 쪽이 들여다보는 쪽을 본원적 대화파트너로 삼을 수 없기에, 이 기이한 딜레마게임은 관음적인 허위의 판타지를 극대화할 뿐이다.
그러므로 트래비스가 제인을 두 번째로 찾아갔을 때 유리창 건너편을 보지 않고 등지고 대화를 시도하는 장면은 근원적으로 공존이 불가능한 구조에서 최선을 다해 대화하겠다는 분명한 의지의 표명이다. 또한 원래 설정과 반대로 트래비스 방의 불을 켜고 제인 방의 불을 끔으로써 두 사람 사이의 불통을 극복하려 하지만, 불통이 완전히 극복되지는 않는다.
이 구조에서 두 사람은 대면하여 만날 수 없을뿐더러 유리창을 통해서도 동시에 서로를 볼 수 없다. 이 공간의 구조야말로 이 영화의 메시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랑의 이름으로 혹은 그저 사랑의 잔영으로 어렵게 기도하는 공존에 항상 파편적 인식과 일방적 오해가 따라다닌다는 마음 아픈 성찰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공존을 위한 대화를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서 사랑의 가능성을 엿보게 된다. 반대로 마음 아픈 성찰 뒤에도 대화를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랑 자체라는 생각이 가능하다.
이러한 불통의 대화나 어긋남의 공존은, ‘파리텍사스’라는 제목 자체에 내재한다. 극중에서 그 유리창의 공간에서 제인과 재회한 뒤 트래비스는 아들 헌터에게 말한다.
“내 아버지(헌터의 할아버지)는 어머니(헌터의 할머니)를 파리의 여자라고 사람들에게 소개하곤 했어.”
이 파리는, 프랑인이 “파리”라고 발음하는 프랑스의 수도 파리가 아니라 미국 텍사스주 동북쪽의 “패리스”를 말한다. 영화 속 이야기를 따라가면, 농담을 반복하다 보니 트래비스의 아버지마저 자신의 아내, 즉 트래비스의 어머니를 파리 여자라고 믿게 된다.
트래비스 어머니의 ‘파리(즉 패리스)여자’라는 정체성은 기표와 기의의 분리 없이 확고한 것이었지만, 남편에 의해 기표와 기의의 분열이 일어나고, 그 분열을 상호 공유하는 순간적인 유쾌함이 지나고 분열이 남편의 의식에 강제적으로 또는 폭력적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봉합되면서 실제 분열은 어이없이 트래비스 어머니에게만 남게 된다.
농담은 생각하기에 따라 심각한 오해를 산출한다. 우선 트래비스 어머니는 패리스 출신이지 파리 출신이 아니다. 그렇지만 남편과 주변에서 그를 파리 출신으로 간주한다. 그의 본래 출생지는 무화한다. 그는 자신이 파리 출신으로 간주되는 것을 알지만 스스로는 패리스 출신임을 알고 있고 더군다나 잊지 않았다. 트래비스 어머니 의식의 분열과 그의 정체성에 관한 남편을 비롯한 주변의 숨겨진 분열이 늘 공존한다.
트래비스의 부모가 텍사스주 패리스에서 사랑을 나눠 그의 어머니가 트래비스를 임신하였다는 설정 또한 함축적이다. 분열이 어머니에게 그치지 않고 굳이 따지고 들자면 트래비스에게 이어진다. 트래비스는 패리스에서 기원했는가, 아니면 파리에서 기원했는가.
이 영화는 인간 의식과 존재에 관한 흥미로운 메타포를 구현한 것 외에 시각과 청각 측면에서도 적잖은 얘깃거리를 전한다. 영화를 주도하는 색은 빨간색인데, 파란색과 종종 대비를 일으키며 다층적인 색감의 미장센을 구현한다. 트래비스가 아들에게 “나중에 텍사스주 패리스에서 살 것”이라고 말하는데, 아들이 “거기가 어디냐”고 묻자 “레드리버 근처”라고 말한 것까지 붉은색은 영화를 주도한다. 붉은색을 두고는 어머니의 자궁까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 보이는데, 해석하지 말고 색감을 집중하는 게 영화를 더 즐길 수 있지 싶다.
이 영화는 확실히 로드무비이지만 동시에 독특한 색감의 로맨스 영화이다. 뜨겁게 몰입하거나 돌진하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한 기억에 의지해 사랑을 맴돌다 사랑에 다가갈 듯 사랑에서 멀어지는 사랑이다. 멀어짐이 멀어짐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또한 사랑이란 뜻일까.
영화음악은 기타리스트 라이 쿠더가 연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