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짓는 목수 May 06. 2020

글 짓는 목수가 되다

EBS <나도 작가다> 공모전

   글쓰기, 그 시작은 퇴사와 함께였다


11년 만에 성사된 남북정상회담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던 그때 난 조용히 11년간의 직장생활을 마무리했다. 그 해 가을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계절이 반대로 흐르는 지구 남반구로 떠났다.  내 나이 마흔을 코 앞에 두고 떠나는 여정은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나의 이런 결정을 걱정하고 만류하는 모습이었다. 흰머리가 눈에 띄게 많아진 중년의 아재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쉽진 않았다. 더 늦으면 할 수 없기에 아니 더 힘들어진다는 걸 알기에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회사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의 인간이 되었지만 그 대가는 잔혹했다. 세상의 비바람을 그대로 맞아야 했다. 태초의 헐벗은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고 해야 할까?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감상은 숨만 쉬어도 새어나가는 시드니의 묵직한 생활비(주거비, 학비 등)의 압박 속에 금세 사라졌다. 일을 해야 했다. 처음 자리 잡은 셰어하우스의 집주인의 소개를 받아 지붕 목수 일을 시작하였다.

지붕 위에서

망치를 들다


안전화와 형광색 작업복(호주의 건설/건축 및 안전 관련 근로자는 형광색 혹은 주황색 작업복을 착용해야 한다.)을 입고 망치, 삼각자, 줄자 등 손 연장 등이 담긴 공구 벨트를 차고 건축현장을 들어서던 내 모습은 11년 전 신입사원으로 구두에 정장을 차려입고 크로스 서류가방을 메고 회사에 출근하던 모습과 복장만 바뀌었을 뿐 마음가짐은 똑같았다.


12월 한 여름 드니의 태양은 대지의 모든 것을 다 녹여버릴 듯이 맹렬했다. 어깨를 짓누르는 팀버(Timber: 목재)를 지붕 위로 수도 없이 날라 올리던 나의 머릿속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건 없었다. 뙤약볕 아래 타들어가는 듯한 피부의 따가움과 짓눌린 근육의 통증 그리고 비 오듯 쏟아지는 땀방울만 느껴질 뿐이었다. 오로지 현재의 순간만 느끼고 존재할 뿐이었다. 고된 육체 노동은 나의 몸에 노폐물 배출과 칼로리 소모를 돕고 있었고 불면증이 사라지고 숙면이 찾아왔다. 고통 속에서도 얻는 것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과거 시원한 에어컨 바람 속에서 손가락과 눈동자만 움직이면서도 과거의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는 항상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여기선 뜨거운 태양 아래 땀 흘리며 잠시 불어오는 산들 바람과 시원한 콜라 한 캔이 이렇게 고마울 수 없다. 작은 것에 감사하게 되었다. 몇 개월 사이 나의 몸은 정신은 땀과 먼지에 찌들어 가는 작업복처럼 화이트컬러에서 블루컬러로 바뀌어 갔다. 땀 흘리며 일하는 일상 속에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고 느낄 수 있었다. 그 일상을 사진과 함께 기록하기 시작했다.

목수와 콜라

책을 읽고 글을 쓰다


수많은 관계와 역할이 사라진 호주에서는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나머지 시간은 온전히 나에게 할애할 수 있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고요하고 긴 호주의 밤은 책을 읽고 글을 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다행히 시드니 곳곳의 도서관에서 한국 책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과거의 나의 삶과 책 속에서 이야기하는 삶이 오버랩되면서 피어오르는 생각과 느낌들을 글로 토해내기 시작했다. 처음은 쉽지 않았다. 무엇을 어떻게 써 내려가야 할지 몰랐다. 그냥 일상의 느낌을 시작으로 내 과거는 왜 책 속에서 얘기하는 것과 다른지를 써내려 갔다. 그렇게 쓴 독후감들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글 속에서 나를 찾다


퇴사를 하지 않았다면 글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금전적 여유는 사라졌지만 시간적 여유가 생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읽고 쓰는 데는 돈은 필요 없지만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활자 기피증이 있는 나에겐 더욱더) 직장생활을 하면서 독서까지는 어떻게 해보겠지만 글쓰기까지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혹자는 나태해서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겠지만 글 쓰는 환경은 매우 중요하다. 환경이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경험을 과거 10여 년의 직장생활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직장이라는 폐쇄적인 환경이 글을 쓴다고 해도 쉽게 오픈할 수 없었을 것이며 진솔하게 쓸 수도 없었을 것이다. 거미줄처럼 엮여있는 SNS를 타고 나의 글이 회사로 흘러들고 부적격 회사 인간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글은 자유롭게 나를 표현하는 방식이고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나는 아직 과거 일제 시대의 시인이나 소설가처럼 진정성을 글 속 깊숙이 꽁꽁 숨겨가면서 함축적으로 표현할 능력까지 갖추지 못했다. 숨기고 쓸 거면 일기만 쓰면 된다. 나의 생각과 경험들은 여러 가지 에세이가 되었다.


글을 쓰며 인생을 돌아본다


 <콰이어트>의 저자 수잔 케인은 인생에서 돈을 버는 시기(소득)와 지출(투자)하는 시기가 있다고 얘기한다. 소득이 없는 지출의 시기는 현업에서 떠나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 하는 것이다. 그 시간을 통해 변화와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한다. 나 또한 그 인생의 전환점을 지나고 있는 것이라 믿는다.


"글은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싸고 있던 포장을 벗겨내는 과정이다."

                                                                                                       - 글 짓는 목수 -


글쓰기만큼 자신을 들여다보기 좋은 방법은 없다.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몸처럼 글 또한 속박되지 않는 법이다. 과거 정약용 같은 문인들은 현업을 떠나 있던 유배시절 대부분의 유명한 저서들을 남겼다. 퇴사자의 글이 진정성 있는 건 그 때문이 아닐까? 속세를 떠나 과거를 되돌아보고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말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글로 정리하고 표현하는 동안 과거의 응어리가 풀리고 나를 찾아가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삶과 글은 닮아있다.


우리의 삶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기억 속의 이야기가 기록될 때 비로소 삶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글이 나의 역사이다. 위인들만 남기는 것이 역사는 아니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다만 기록하지 않았기에 남겨지지 않았을 뿐이다. 역사는 거짓을 기록할 수 없다. 신기하게도 기록하면서 삶을 더욱 의미 있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난다. 나의 일상이 글감이 되기에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기대되는 삶이 되어간다. 관조(觀照)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삶이란 어느 한 사람이 살아온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그 과정 속에서 기억하는 내용, 그리고 그것을 기억해서 이야기하는 방식, 그것이 바로 삶이다."


  - 수전 티베르기앵 <글 쓰는 삶을 위한 일 년> 중에서 -

상상은 여러 가지 삶을 만든다

내 삶의 또 다른 주인공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40년의 과거와 책 속에서 얻은 지식과 생각 그리고 현재의 새로움 삶이 더해지며 나의 글이 풍부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새로운 도전이 다가왔다. 스토리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어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하루하루 써 내려가던 에피소드들이 연결되며 장편 소설이 되어가고 있었고 그 소설 속 주인공은 또 다른 내가 되었다. 일반인은 현실 세계에서의 한 가지 삶만 살다가 생을 마감하지만 소설가는 여러 가지의 삶을 살다가 가는 것이다. 그 여러 가지 삶을 세상에 남겨 놓고 떠난다.


"나도 작가다"


비록 아직 책 한 권 출판하지 못한 글쟁이고 등단도 하지 않은 이야기꾼이지만 나는 스스로 작가 혹은 소설가라 얘기한다. 작가는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직업이 아니다. 작가란 글 쓰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다. 누구나 쓸 순 있지만 계속 쓸 순 없다. 글을 떠날 수 없는 사람 그것이 작가다.


그렇게 나는 집도 짓고 글도 짓는 글 짓는 목수가 되었다.

나는 작가다


이전 01화 나를 이해하고 너를 이해하는 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