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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an 26. 2023

나를 이해하고 너를 이해하는 길

글쓰기와 글짓기에 관한 상념

"소설 쓰기란, 자신과 몹시 다른 인물을 최소한 한 명 이상 온전히 살아 있게 하는 작업이라 하겠다. 스토리텔링이 여타의 글쓰기와 다른 점이다"


           - [캐릭터 직업 사전] 안젤라 애커만 외 -


최근 시간적 여유가 생겨 평소보다 많은 독서의 시간을 가졌다. 책을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감상들을 메모하고 밑줄을 그어 놓고도 독후감을 쓸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요즘 글쓰기의 대부분의 시간을 소설 쓰기에 할애하고 있다. 과거 소설을 쓸 때 그 기분을 다시 느끼고 있다.


웃긴 점은 소설(Fiction)을 쓰고 있다 보면 비소설(Non-fiction)을 쓰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고 비소설을 쓰고 있다 보면 소설을 써야 한다는 강박이 몰려온다. 참 사람 마음이 알 수가 없다.


글 쓰기 (Writing, Non-fiction: 비소설)


나는 소설을 쓸 때와 비소설을 쓸 때 마음가짐이나 감정상태가 완전히 달라짐을 경험한다.


일단 비소설을 쓸 때는 표정이 심각하고 진지해진다. 이성의 뇌가 작동하고 있다. 칼럼이나 서평(독후감)을 쓸 때이다. 일상 속에서 혹은 책 속에서 얻은 영감으로 시작해 거기에 나의 생각과 상상이 접목되어 새로운 생각이나 논리를 도출해 나간다. 그리고 이 새로운 생각과 논리는 글을 쓰는 과정 속에서 점차 그 뚜렷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머릿속을 맴도는 어렴풋하고 정리되지 않은 상념들이 글을 쓰는 동안에 정리되고 체계화되며 나만의 명확한 결론 혹은 논리를 도출해 내는 것이다.


나는 평소 책과 경험 속에서 생겨난 상념들을 메모해 놓는다. 만약 메모할 상황이 아니면 그 장면을 사진으로 남겨놓는다. 나중에 그것들을 다시 보면서 그때의 상념들을 떠올리며 몰입을 시작한다. 해마 속 깊숙이 잠자고 있던 기억들과 상상(꿈)들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지식과 사실(경험), 기억과 상상이 뒤섞인다. 이 과정이 요즘 대세로 떠오르는 정보 융합(연결)의 과정이다. 그러면 그것들을 자판 위의 손가락을 통해 모니터에 시각화(이미지화) 시킨다. 인간은 모든 것을 시각화 이미지화 하면서 정보를 강화하고 발전시킨다. 시각화된 정보들이 또 다른 정보를 생성하고 그 정보들이 또 시각화되는 과정이 반복된다.  한 문장에서 시작한 글은 문단과 문단을 거쳐 한 편의 글이 된다.


비소설(논픽션)을 쓸 때는 긴장감이 있다. 몰입의 과정 속에서 터져 나오는 생각들을 손가락이 따라가지 못해 그것들을 놓칠세라 긴장감 있는 글쓰기가 자주 연출된다. 그러다가 막히는 부분이 생기면 모니터에서 시선을 옮겨 먼 풍경이나 주변을 둘러보면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러면 다시 무엇인가 문득 떠오르고 그것을 다시 적어나간다. 그렇게 한 편의 글이 완성되면 알 수 없는 성취감이 생겨나고 자존감이 수직 상승하는 효과가 발생한다.


글쓰기는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스스로가 성장해 나간다는 것을 실감한다. 읽기만 하고 쓰지 않는다면 앎은 늘어날지 몰라도 변화는 쉽지 않다. 앎은 머리로 하지만 변화는 몸으로 하는 것이다. 손가락부터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읽고 쓰는 과정은 함께 해야 한다.


글쓰기는 자기 성찰과 자기 계발의 자주 좋은 방법이다. 타인이해하고 변화시키려 하기 전에 자신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것이 우선되어야 함을 알 것이다. 사실 타인은 우리가 변화되는 모습을 보고 변화다. 그건 바로 글쓰기로부터 시작된다.


글 짓기 (Composition, ficition, 소설)


소설을 쓸 때는 비소설을 쓸 때와는 그 마음가짐과 감정 상태가 다르다. 일단 헤드폰에서 울려 퍼지는 감성적인 음악과 소음이 차단된 풍경 속에서 생각에 잠긴다. 감성의 뇌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 때는 외롭고 슬픈 감정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 좋다. 그래야 감성적인 글과 상상이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 속에서 재밌고 웃긴 장면도 연출되지만 그 시작은 외로움과 슬픔이어야 한다. 즐거움으로 시작해서 외로움으로의 전환은 쉽지 않다. 왠지는 나도 모른다. 나는 그렇다.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공감하지 않을까.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어느 책에서도 읽은 듯하다.


감성에 촉촉이 젖어들면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해마 깊숙이 잠자던 무의식이 작동한다. 기억과 상상 혹은 꿈속에서 본 듯한 것들이 이미지화 되면서 머릿 속에 장면(Scene)이 연출된다. 그 장면의 배경과 시점을 묘사하고 서술한다.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의 대화를 상상한다. 이때 인물 중에 적어도 한 명은 작가 자신이 이입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게 주인공(주연)이 될 수도 있고 주변 인물(조연)이 될 수도 있다. 그래야만 작가의 생각이 소설에 묻어날 수 있다. 그것이 소설가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소설가가 다른 작가(논픽션)와 다른 점이 바로 이 점이다. 스토리 속에서 간접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건 다른 예술가들이 생각을 그림이나 음률 혹은 영상 속에 묻어나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주인공 시점


자신의 이입의 강도가 가장 높게 표현되는 것이 바로 1인칭 주인공 시점이다. 주인공의 시점으로 모든 것을 연출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이입되지 않으면 스토리를 이끌어가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의 소설가의 처녀작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중심적인 소설이다. 그래서 시작은 보통 자전적 소설이 많다.


비주인공 시점


진정한 소설가는 이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 이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면 결국 글쟁이(작가)에만 머물 수밖에 없다. 이 글 서두(첫 문장)가 바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며 소설가가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소설가는 타인을 유심히 관찰하고 세상을 관조하는 자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 단계를 넘지 못하는 소설가는 주인공(나)의 시점으로만 세상을 살게 된다. '세상의 중심은 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사실 요즘 웹소설 중에는 이런 류의 소설도 적지 않다. 왜냐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해진 세상에는 내가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중심적 가치관이 반영된 소설들이 유행할 수 있다. 이건 호불호가 갈린다. 만약 작가가 나와 같은 가치관을 가진 자라면 무한 감동과 공감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겠지만 아니라면 비호감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건 주인공 시점은 색깔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빨강인지 파랑인지 노랑인지 확실하기에 집중도는 올라간다.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


균형 잡힌 소설은 인물을 다면적고 입체적으로 해석하고 표현한다. 주인공만 인간이 아니다. 주변인물들도 모두 인간이다. 그래서 조연들도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 있는 인물로 그들의 스토리를 불어넣어 줘야 한다. 이 과정이 바로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소설가는 이 과정을 위해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내가 좋아하고 알고 있는 소설가들은 대부분 외면적으로는 두리뭉실한 느낌이다. 그냥 모르고 보면 색깔이 없는 사람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알고 보면 무지개같이 여러 가지 색깔을 다 가지고 있어서 한 가지 색깔로는 표현이 안 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상황과 환경에 따라 색깔이 바뀐다. 나쁘게 보면 카멜레온 같고 좋게 보면 무지개 같은 것이다.

 

그래서 소설 쓰기는 글쓰기가 아닌 글짓기이다. 글쓰기는 유에서 또 다른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고 글짓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글쓰기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글짓기의 과정으로 나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 일단 글짓기도 모방 창조인 글쓰기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개념 자체 또한 우리가 생각해내지 못하고 보지 못했을 뿐 이미 있었다. 누가 먼저 발견했느냐의 차이일 수 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전에도 아메리카는 있었다. 다만 그 이전의 역사는 기록되지 않았을 뿐이다.


싫어하는 인간을 이해한다는 건


내가 있으면 너가 있다. 너가 있으므로 내가 존재한다. 내가 싫어하는(혹은 상반되는) 너를 알아가는 것이 바로 소설 쓰기의 시작이다. 소설은 스토리(이야기)다. 스토리 속에 악역이 없을 수 없다. 대부분의 소설이 선악 구조를 가지는 이유이다. 선만 있고 악만 있는 이야기만큼 재미없는 이야기도 없다. 잘 먹고 잘 살고 행복한 이야기는 우리가 가장 원하는 삶이지만 가장 재미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만약 당신이 선이면 악을, 당신이 악이면 선을 이해해야 한다.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다면 묘사하고 서술할 수도 없다. 만약 한다 해도 독자가 이해하고 공감하기 힘들다. 그럼 생명력을 잃어버린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수박 겉핥는 소설은 독자는 금방 알아채고 덮어버린다. 독자들은 소설을 읽으며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경험을 한다. 극 중에 한 명쯤은 자신과 비슷한 혹은 선망의 인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없다면 독자는 그 이야기에 몰입할 수 없다. 그래서 소설가는 다양한 사람들을 다양하게 묘사하고 표현하며 다양한 사람들이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신은 세상에 78억 명의 다양한 사람을 만들었다.


타인의 생각을 읽다 = 독서


소설가는 다양한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더 많은 이야기(글)를 읽어야 한다. 글 속에 타인의 생각과 경험이 녹아있다. 독서가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에서 직접 타인과 부딪치고 경험하는 것만큼 확실하고 생동감 있는 것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한정된 시공간에서 한정된 사람들만 만나다가 인생을 끝내는 존재이다. 그 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어떻게 다 직접 경험할 것인가? 그래서 독서가 타인을 이해하는 속성 과정인 것이다.


그중에서도 소설(문학)은 한 권의 책에서 여러 인물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문학은 인문학에서 가장 중요하고 다양하며 광범위하다. 하지만 그 가치는 상대적으로 낮다. 왜냐 현실의 세상은 깊고 좁고 전문화된 것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정량화, 규격화, 보편화, 체계화되지 않는 것들의 가치를 낮게 본다.


중요한 사실은 현대 과학(AI) 영역이 나가가는 방향이 바로 현재 이 비정량화, 비규격화, 비보편화, 비체계화 되어 있는 것들을 정량화, 규격화, 보편화, 체계화시켜나가려 한다는 것이다. 난 문학의 영역도 과연 AI가 에서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가능은 하지만 인간보다 앞서 갈 순 없다, 왜냐 AI가 섭렵한 것들은 과거 인간의 기억이고 AI가 섭렵한 이후 인간이 다시 생각해 내는 정보는 AI에게 아직 Input 되지 않은 정보이기 때문이다. 수학, 과학의 영역은 머신 러닝(논리, 연산, 유추등)으로 발전하지만 인문학의 영역은 그런 규칙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할 것이다.)

 

너를 이해하는 길


독서와 글짓기, 초등학교 시절 해마다 독서와 글짓기 행사가 있었다. 이건 마치 명절처럼 때만 오면 하는 의례적인 행사였을 뿐 일상 속으로 파고들지 못했다. 선생들은 말로만 독서를 강조했지 그 시기가 지나면 다들 교과서를 펼치라고 했고 또다시 외우라고 했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논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독서와 글짓기가 바로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던 것이다.


독서와 글짓기(글쓰기)가 부재한 나라의 국민들이 어떤가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난 이곳 호주에 온 이후 열차나 공원에서 책을 들고 독서를 즐기는 호주인들을 자주 발견했다. 한국에서는 보지 못했던 풍경이다. 한국은 도서관에서도 책이 아닌 수험서를 펼친 취준생과 공시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취업에 성공해 사회에 나가면 더 많은 시간 돈을 벌고 돈을 쓰면서 나라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는 국민이 된다. 하지만 그들이 시간이 갈수록 냉소적이고 이기적이고 개인적으로 변해가는 건 왜일까.


시간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가 결국 지금의 당신을 만드는 것이다. 항상 남 탓만 하고 타인을 욕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쓴 대부분의 시간은 타인(소비자)이 쓰고  받기 위한 물질(상품)을 생산하고 서비스(용역)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소비한 시간은 얼마나 되는가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나를 이해하고 싶은가 그럼 읽고 쓰라.

너를 이해하고 싶은가 그럼 읽고 지어라.


In the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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