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나쁜 사람이어도 괜찮아
책이나 영화 혹은 드라마를 보다 보면 종종 드는 생각이 있다.
왜 늘 나쁜 짓만 하던 악당이 한번 옳은 행동을 하면 관객들은 열광할까. 또 반대로 왜 항상 정의로운 행동을 하던 착한 주인공이 한번 어긋나면 욕을 바가지로 먹을까.
간단하게 수치로 따져보자.
어떤 악당이 99번의 악행을 하고 1번의 선행을 한다고 쳤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이러하다. “개과천선했네.”, “역시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었던 거야.”, “다 사정이 있었겠지.”. 찬사를 받다 못해 지난날의 악행까지 미화가 된다.
그 악당과 대립하는 우리의 주인공은 99번의 선행을 하고 1번의 악행을 한다. 그걸 본 사람들은 말한다. "미쳤네.", “왜 저래?”, “제정신이야?”, “저놈 착한 척하더니 나쁜 놈이었네.”라며 비난한다.
아무리 그래 봤자 악당이 99번의 악행을 한 것과 주인공이 99번의 선행을 한 것은 변하지 않는데 말이다. 악당의 악행 1개와 주인공의 악행 1개는 확실히 그 무게가 다르다. 왜? 주인공이니까? 극 중 주인공의 탈선은 영화의 비극이나 다름없으니까?
분명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난 이것에 조금 더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고 확신한다. 왜냐면 스크린 밖의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이런 모순이 간혹 목격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필연적으로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중엔 내게 좋은 사람과 내게 나쁜 사람이 공존한다. 여기서 나쁜 사람이란 영화 속 악당처럼 비리와 폭력으로 점철된 범죄자뿐만이 아니라 단순히 내게 상처를 주고 내게 엉망으로 구는 주변인을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좋으나 싫으나 그들과 어울려 살아가야 한다. 당연히 좋은 사람에게 더 마음이 기울기 마련이고, 나쁜 사람과는 최대한 깊게 엮이지 않기만을 바란다.
그러나 우리의 관계는 언제나 유연하고 입체적이다. 모양이 규정된 도형과는 다르다.
그러다 보니 때때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만다. 이를테면 좋은 사람에게 서운한 일이 생긴다든지, 아니면 나쁜 사람에게 신세를 지는 일이 생긴다든지.
그럴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어떠한가. 대부분 영화 속 주인공과 악당에게 느끼던 감정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99번 잘해준 좋은 사람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우리에게 99번 잘못한 나쁜 사람에게 감동을 받을 테다. 그 사람들의 본질을 알면서도.
이 역설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나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사람 중 하나였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까진 아니어도 굳이 나쁜 이미지로 남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본성을 거스르고 부단히 노력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좋은 사람으로 산다는 건, 나쁜 사람으로 사는 것보다 더 고되다는 것을.
좋은 사람에겐 많은 기대가 잇따른다. 기본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거니와 그 이상의 것을 바란다. 타인을 향한 따뜻한 마음씨, 남의 힘든 노동을 덜어줄 선의 등이 요구된다. 견디다 못해 부탁을 거절하면 ‘네가 그럴 줄은 몰랐다’라는 등 섭섭한 목소리가 돌아온다.
반면에 나쁜 사람은 기본만 해도 쉽게 칭찬을 듣는다. 어쩌다 한 번 좋은 일을 하면 거의 칭송을 받기까지 한다. 좋은 사람이 긴 긴 시간을 노력해 쌓아 온 호감을 단숨에 얻는다. 우리는 악인의 선의에 더 환호한다.
이러니 좋은 사람 입장에선 허탈함이 몰려올 수밖에.
내가 왜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하지? 누군 뭐 나쁜 사람 못 해서 안 하는 줄 알아?
그래서 요즘 시대엔 ‘그냥 착하게 살면 된다.’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적당히 약을 줄도 알아야 하고, 적당히 실속도 챙길 줄 알아야 하고, 적당히 싫은 소리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하기 만만한 사람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
고뇌 끝에 내린 나의 결론은 이러하다.
법을 어기지 않는 한에서, 자신만의 신념을 가진 나쁜 사람이 되어도 괜찮다. 아니,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그렇게 살아야 인생이 편해진다. 오롯이 나의 일에 에너지를 집중시켜 한 단계 더 발전하기도 수월해진다.
내 인생인데,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게 뭐 어때서. 대신 피해만 안 주면 되잖아?
그러니까 꽤 자주 나쁜 사람이어도 괜찮아.
남의 눈치 보느라 이기적인 마음을 감추지 않아도 괜찮아.
싫은데 좋은 척하지 않아도 괜찮아.
괜찮지 않다고 말해도 괜찮아.
그러다 가끔 마음이 여유로운 날이 오거든 그때 잠깐 착한 사람이 되는 거야.
그래도 사람들은 널 좋아해 줄 거야.
단 한순간도 착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과거의 너보다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