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급발진 03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건니생각이고 Jun 05. 2019

하마터면 복비를 제가 낼 뻔했습니다.

관행은 법이 아닙니다.

 이사를 했습니다. 그저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하기에는 감정 소모가 너무 심한 하루였습니다. 이사라는 게 마냥 들뜨고 즐겁기도 어렵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힘들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왜냐고요? 나오는 집은 복비를 둘러싼 집주인과 중개인의 콤비 플레이가 절 괴롭히고, 이사 간 집은 중개인의 뜻밖의 '갑질'에 당황스러웠거든요.


 먼저, 이사 나온 집에서 겪은 일입니다.


“중개수수료는 얼마 생각하세요?”


 네? 그걸 왜 제가..


 먼저 도착한 저에게 던져진 부동산 중개인의 갑작스러운 질문은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집주인과 합의를 했을뿐더러 만기 날짜를 한 달 앞두고 나가는 세입자인 저는 복비를 낼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당황스러운 저보다 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중개인과 집주인의 반응에 기분 좋게 나가긴 글렀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복비를 낼 거라 생각지도 못한 집주인의 발언은 더 가관이었습니다.


"기껏 편의 봐줬더니 딴소리하시네."
"기본은 아실 줄 알았는데.."


 참았습니다. 기본을 모르는 사람이 기본을 운운함에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우선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동산 전문가는 아니지만 적어도 관행과 법은 구분할 수 있고, 또 세입자의 기본까지 신경 써주는 집주인의 억울함을 풀어드리고자 친절하고 상세히 설명해줬습니다.


중개수수료는 중개업자가 집주인과 세입자를
중개한 대가로 받는 보수


 어떤 경우라도 나가는 세입자가 집주인의 복비를 낼 의무는 없습니다. 만기를 채우지 않고 세입자가 나가는 경우조차도 계약 연장 여부와 관계없이 복비는 집주인의 몫입니다. 이는 중개수수료를 담당하는 국토교통부 역시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다만, 집주인의 입장에서는 만기보다 세입자가 먼저 나갈 경우 ‘손해’를 볼 수 있으니 그 손해배상이 필요한거고, 관행적으로 먼저 나가는 세입자가 복비를 내는 걸로 상쇄했던겁니다. 중개인의 입장에서 더 잘 챙겨야 하는 고객은 집주인이기에 집주인의 피해 및 손해를 최소화해주고 싶은 맘은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법적으로 집주인의 몫인 복비를 나가는 세입자에게 관행적으로 '대신' 부담하게 하는 게 맞는 일일까요? 심지어 관행이 그러하니 양보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만기보다 먼저 나가는 상황이니 세입자가 ‘당연히’ 부담해야 된다는 법적 근거 없는 논리로 말이죠. 모르니까 당하는 거라고 할게 아니고, 잘못된 건 바로잡아야 하는 겁니다.

 

 기본을 모른다길래 위와 같이 기본을 가르쳐드렸습니다. 조금 전까지 억울함을 호소하던 집주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잔금을 치르기 위해 OTP카드를 찾더군요.


"아! 큰일 났다. OTP카드를 회사에 두고 안 갖고 왔네."
"뭐 어쩔 수 없지~ 회사 가서 가지고 와야겠네. 2시간은 걸리겠네."


 잔금 치르러 오는데 OTP를 안 갖고 온 남자나, 나가는 세입자 들으라는 듯 비아냥 섞인 말을 뱉어내는 여자나 황당 그 자체였습니다. OTP를 깜박하고 왔으면 근처 은행 가서 재발급받으면 될 것을 굳이 1시간이 넘게 걸리는 회사에 돌아가서 입금하겠다는 집주인을 굳이 이해하고 싶진 않더군요. 심지어 저 얘기는 제게 직접 한 것도 아니고, 그들끼리 나눈 대화를 건너 듣고 파악한 내용이었습니다. 기본을 모르는 게 자기들이라 억울하고 기분이 나빴던 걸까요. 잔금 처리는 제시간에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일부러 늦게 입금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지금까지도 굳게 믿고 있습니다. 결국, 이사 가는 집의 잔금처리까지 늦어지고, 더운 날씨에 고생하시는 이삿짐센터 분들도 1시간가량을 기약 없이 기다렸습니다. 잘못은 그들이 하고, 사과는 저와 아내의 몫이 되어버렸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사를 마무리하고, 이사 간 집의 중개인과 복비를 최종 협의하게 되었습니다. 이사 나오면서 집주인과 중개인 때문에 이미 진을 다 뺀 상태라 더 이상 논쟁할 기력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사 간 집의 경우, 소개받을 당시에 들었던 집의 향과 계약서 상의 집의 향이 달랐고, 계약을 진행하면서 중개인의 도움을 거의 못 받았습니다. 아니, 중개인은 오히려 집주인 편을 몇 번 들었었죠. 단지 복비를 깎아 달라는 요청이 아닌, 사실 확인을 위해 중개인과 협의를 하다 보니 두 가지 새로운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집의 향은 부동산마다 다르다?


 분명, '정남향' 집을 알아봐 달라고 했습니다. 전에 살던 집이 '(남)서향'이다 보니 너무 더워서 살 수가 없는 이유로 이사를 간 터라, 집의 향이 무엇보다 중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집을 보다 보니 '남동향' 정도면 살 수 있을 것 같아 남동향 집도 소개받기 시작했습니다. 소개받는 집마다 나침반을 들고 다니며 중개인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남동향이라 설명 들은 집으로 최종 결정을 하고 계약금 일부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부동산에서 계약서를 작성하던 중, 집의 향이 남동향이 아닌 '동향'인 사실에 당황스러웠습니다.


"왜 동향이에요?"
"......"


 중개인은 집의 향이 설명과 다르다는 사실을 지적했음에도 얼렁뚱땅 넘어가기 바빴습니다. 집주인도 있던 터라 더 캐물을 수 없어 우선 계약은 마무리하고 따로 문의했습니다. 중개인의 답변은 더 황당했습니다.


"부동산에서 계약서를 직접 작성하기 때문에 집의 향이 잘못 기입될 수 있습니다. 제가 부동산에 얘기해서 남동향으로 수정하라고 할게요.”
"집의 향이 그렇게 쉽게 수정이 가능하다고요?"


 두 곳의 부동산이 계약에 관여되어 있던 터라, 제 중개인은 소개만 하고 다른 부동산이 계약서를 작성했습니다. 중개인의 말에 따르면 그 부동산에서 계약서 작성 시 집의 향을 잘못 적었다는 겁니다. 상식적으로 집의 향이 부동산마다 다를 수는 없을 겁니다.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아 집의 향이 왜 소개해 줄 때와 다른지 재차 물었으나 그 부동산이 계약서에 잘못 기입했을 뿐, 그 집은 '동남향'이 맞다는 답변만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남동향에서 동남향으로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중개인은 동남향이 맞다고 주장하더군요. 중개인은 협의 중간에 '동동남향'이라고 은근슬쩍 '동'을 하나 더 추가하는 주도면밀함까지 보여줬습니다. 근데 어쩌겠습니까. 이미 계약서에 서명까지 완료한 터라, 저희는 결국 동남향인지 동향인지 모를 애매한 향의 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중개수수료 깎아드릴게요.


 중개인의 참신한 발언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뭔가 뒤바뀐 것 같습니다. 복비는 중개인이 제공한 중개 서비스를 근거로 상한 요율 범위 안에서 타당한 금액을 서로가 협의하는 건데, 중개인이 먼저 친절하게 결정해 주시더라고요. 자칫하면 깎아주셔서 감사하다고 할 뻔했습니다. 애매하게 상한 요율만 정해놓은 법 때문에 생기는 논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비스 제공자인 중개인이 복비를 선심 쓰듯 결정하는 것도 소비자인 제 입장에선 쉽게 납득할 순 없습니다.


"사장님, 복비는 상한 요율 범위 내에서 합의로 결정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요."


 아니랍니다. 제가 알던 기본은 이번에도 틀렸나 봅니다. ‘특별히’ 깎아주는 상황이니 협상의 여지는 없는 것처럼 얘기하는 중개인을 이해하긴 힘들었습니다. 몇 차례 협의 끝에 중개인이 제안한 복비보다 조금 더 낮춰서 드리긴 했으나, 찝찝함은 여전합니다.




 관행 자체를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관행은 법과는 엄연히 다릅니다. 과거에 관행적으로 이루어졌던 부분들은 소비자에게 명확한 설명을 해주고, 필요하면 협의해야 합니다. 집주인과 세입자가 직접 얘기하면 불편할 수 있으니, 중간에서 중개인이 그 역할을 잘해주어야 합니다. 그게 중개인의 역할이고, 소비자가 마땅히 제공받아야 할 서비스입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아무리 기분이 나쁘더라도 할 말 안 할 말은 가렸으면 합니다. 집주인과 세입자는 주종관계도 아니고 갑을 관계도 아닙니다. 예상치 못한 복비 부담에 억울한 건 알겠는데, 기본을 몰라서 생긴 일이니 감수해야지 어쩌겠습니까.


이전 02화 지갑을 잃어버렸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