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 있어 주는 사랑에 대해
나는 모든 아픔을 남자친구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연애가 시작되었다. 어쩌면 이것이 행복이라고 생각이 들어 그날 밤은 잠을 잘 잤다. 아픔을 털어놓고, 모든 것을 이해받은 적은 처음이라 그 뒤의 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누구에게 기대본 적도 없었다. 인생을 해부해서 조각조각 난 날것의 모습을 보여주거나 시식을 하게 한 적도 없었다. 남자친구가 내 에세이의 첫 번째 독자인 셈이다. (물론 그때는 에세이를 쓰진 않았지만) 나는 남자친구가 나의 옆에 있으려는 것을 알았지만 쉽게 기대지는 못했다. 나는 여전히 불행해지려고 하고, 자학하려고 하고, 외모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남자친구가 귀엽다고 예쁘다고 해줘도 나는 부끄러워서 그런다는 핑계를 대며 이리저리 피하기만 했다. 기대지 못하는 이유가 남자친구가 못미덥거나 싫었던 것이 아니다. 나는 분명 사랑한다. 나의 그늘이 되어주고, 나의 피난처가 되어준 그 사람을 사랑한다. 화장을 해도 안 해도 변함없이 나를 봐주는 그를 사랑한다.
남자친구를 사귀면 기대고 싶었는데 나는 어째서 기대지 못하는가. 아마 관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관성처럼 튀어 나가는 상처와, 자기방어, 불안과 자기혐오는 언제나 나와 같이 있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베푼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나의 불행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마음속의 불행이나 상처는 바로 치유되지 않는다. 사랑을 받았지만, 여전히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욕심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변해야만 했다. 남자친구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변해야 한다. 버스에 있다가도 버스가 멈추면 우리의 몸이 균형을 잃는 것처럼 불행도 관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행복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불행을 보여주고 약함을 보여줄 때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내가 더 나아지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털어놓을수록 그 사람을 위해 더 나아져야 한다. 완전하게 나을 수는 없다. 과거는 바꿀 수 없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그럼에도 완벽하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는가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분명히 천천히 행복해질 수 있다. 분명히.
처음에는 미안하고 불안해서 계속 이별을 말하려다 그만뒀다. 헤어지면 내가 너무 힘들 것 같았다. 내가 이별을 고하면 남자친구는 물론 힘들겠지만 잘 살아갈 거라고 생각이 든다. 아무런 결핍도 없으며 나무같이 단단한 존재였으니까. 변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나는 쉽게 변하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남자친구에게 털어놓으니까 괜찮으니 변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다면 한번 고쳐보는 것도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했다.
나는 새로운 야망이 생겼다. 원래부터 있는 야망이기도 했는데, 그걸 야망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부끄러운 부분이 있어 모르는 체하고 있었다. 바로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여성이 임신을 이렇게도 말한다. 경력이 단절되고, 복직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임신은 여성의 삶에 상처를 남긴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행복은 가족에서 온다고 믿는다. 아이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지해 주는 가족이 있다면 그 아이는 행복을 연습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기질처럼, 유전처럼 행복을 부릴 수 있다. 그것은 축복이다.
행복을 연습하고 있지만, 아직도 나는 내면에 불안이 있다. 아직도 나는 나를 완전히 사랑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확실하다. 사랑은 달콤하다. 행복은 달콤하다. 나도 달콤한 것을 누릴 자격이 된다.
남자친구가 나를 좋아해 줬을 때, 나와 사귀었을 때. 나는 구원자가 나타났다는 착각에 있었다. 하지만 바로 행복해지지는 않았다. 행복해지는 연습을 하는 것, 내면의 불안을 덜어내는 것은 나다. 그가 내게 빛이 되어준 것은 맞지만, 내가 그 빛을 들고 목적지까지는 가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기대던 그 순간은 물론 소중했지만, 진짜 구원은 내 안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